[김국주의 경제칼럼]금융의 종(種)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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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 제주의소리
1820년 스코틀랜드의 그레고르 맥그레고르(Gregor MacGregor) 장군은 지구 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포이에스(Poyais)라는 나라의 땅을 영국인에게 팔아먹었다. 그 땅을 산 의사 변호사 은행원 등 240명의 정착이민자들 태반은 중남미 오지에서 풍토병 또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60명만이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메릴랜드 대학의 카르멘 라인하트 교수와 하바드 대학의 케네스 로고프 교수의 공저 ‘이번만은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라는 책에 나오는 일화다. “이번만은 다르겠지”라는 환상 때문에 번번히 속는다는 것이다.

지난 8세기 동안 세계 66개국의 대형 금융위기의 자초지종을 보면 매번 유사한 원인과 경로를 거쳐 문제가 터졌는 데도 불구하고 이를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이번만은 다르니까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것으로 오판했기 때문에 금융위기가 반복돼왔다는 내용이다. 그 공통적인 위기의 징조는 다름아닌 부채와 자산가격의 급등, 즉 금융과잉 현상이었다.

위기 원인은 항상 같았다

1996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의 주택 실질가격 상승률(주택가격상승률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숫자)은 92%에 달했다. 이는 1890년부터 1996년까지 106년간의 주택가격 상승률 27%의 3배다. 이런 신호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문가들은 각종 이유를 대며 이번만은 다르다고 했다는 것이다.

금융이 실물 경제를 위한 수단으로 머무르는 한 금융과잉은 빚어지지 않는다. 집을 의식주의 사용가치로 보고 구입하는 경우는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어든다. 그러면서 가격이 제자리를 찾는다. 그러나 투자가치를 보고 집을 산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가격이 오를수록 수요가 몰린다. 같은 주택금융이라도 전자는 실물의 경제, 후자는 돈의 경제에 속한다.

은행들도 마찬가지다. 고객들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영업의 한계를 뛰어넘어 단기적으로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자기들만의 머니 게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꼭 유가증권을 사고 팔지 않더라도 금융선물(financial futures)을 이용하면 이자율이나 환율, 또는 주가지수의 변동을 예측만 잘 해도 큰 돈을 벌 수 있다. ‘CDS’(신용부도 스왑)는 어느 국가나 회사가 채무불이행 상태로 될 가능성에 돈을 거는 흉측한 상품이지만 이를 만들어 파는 금융회사(예 : AIG)나 이를 사고 팔아 매매차익을 얻으려는 사용자(예 : 헤지 펀드)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고 현재도 성업 중이다.

그러나 금융과잉의 그늘에는 금융소외가 따른다. 그 현장을 영국에서 보자. ‘사람과 지구를 걱정하는 경제학 모임’ NEF(New Economics Foundation)가 작년 11월에 발간한 금융개혁 백서에 의하면 영국의 세 가구 중 한 가구는 은행 예금계좌가 없다. 이들은 온라인 송금이나 자동대체를 이용하지 못한다. 따라서 가스나 전기, 전화 요금을 선납해야 한다. 이용단가는 오히려 10% 더 비싸다. 이들은 연리 160%에서 2000%를 물리는 고리대금업자의 먹이감이 되기도 한다.

금융이 실물 경제를 지원하도록 만드는 방법은 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은행의 헤지 펀드 투자나 유가증권 매매를 막겠다고 하는 것은 이런 취지에서다. 유가증권을 자산으로 가지고 싶으면 기업이 처음 발행할 때 사주라는 것이다. 또한 은행들로 하여금 금융 낙후지역에서의 영업활동을 공개하도록 하는 미국의 지역재투자법(Community Reinvestment Act)도 제대로 운영된다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계에 종 다양성의 보존이 중요하듯이 금융계에서도 금융기관의 크기와 성격이 다양하게 존재하도록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해 보인다. 그 동안 거대주의(巨大主義)를 좇아 진행되었던 은행의 대형화를 지역화 및 다양화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실물 경제를 잘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환자로 들끓는 종합병원보다 동네 의원들이 마을환자들의 병을 더 잘 관리할 수 있듯이 말이다.

금융의 종(種) 다양성

‘이번만은 다르다’의 저자들은 이번에는 위기로부터의 탈출과정이 전과 다를 수 있다는 경고를 덧붙인다. 전례 없이 ‘글로벌’하다는 특징, 즉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나라가 똑같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구감소 현상 때문에 과거처럼 ‘성장’이라는 해결사가 위기탈출을 도와줄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도합 5년간의 실업 증가, 6년간의 집값 하락을 예측한다. 그렇다면 이제 금융은 그 본연의 기능이 더 절실히 요구되는 계절을 맞는 것이다. / 전 제주은행장 김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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