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비극적 역사 대표사례”...강창일 의원 인터뷰도 실어

프랑스 일간 '르 몽드(Le Monde)'는 지난 13일자(현지 14일)에 '한국의 친일청산에 관한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르 몽드 Philippe Pons 기자는 '한국, 슬픔과 연민'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한국이 명백한 외부의 적, 일본의 역사 왜곡뿐 아니라 친일파와 군부독재 등 내부의 ‘암울한 과거’를 청산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고 소개하며, 한국이 역사 ‘씻김굿’의 고통스러운 여정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이 기사를 두고, 국내 일부 언론은 르몽드가 “남한이 김일성 항일투쟁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데 초점을 맞추어 보도함으로서 논란이 일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최근 논란이 된 바 있던 강만길 광복60주년기념사업회 위원장의 발언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 르몽드 기사 전문이 소개되면서, '르 몽드'가 중점을 두었던 것은 “한국이 해방이후 과거사청산이 여의치 않았던 것은 분단 이후 친일파가 그대로 지배세력이 됐고, 이후 친일경력의 박정희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여전히 정치경제계를 지배하게 된 엘리트계층이 반공주의를 내세워 자신들이 일본에 협력한 과거를 씻어내기에 바빴던 때문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 르몽드가 비극적인 과거의 한국역사의 대표적 사례이자 과거사 청산의 단초로 제주 4·3을 지목했다는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제주는 비극적 한국역사 축약해서 보여주는 깊은상흔이 남아있는 땅"

르 몽드는 그 글의 첫머리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여자와 돌 그리고 바람이 많다고 해서 ‘三多島’라 명명되는 한국남단의 제주도는, 무엇보다도 그 화려한 경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곳은, 비극적 한국역사를 축약해서 보여 주는 깊은 상흔이 남아 있는 땅이기도 하다. 매년 4월3일이 되면, 제주시민의 절반은 1948년 봄의 무장봉기사건 (일본의 식민통치 멍에를 벗어낸 후, 미국에 의해 배치된 집권당에 대항) 당시에 학살당한 인척들을 기리며 눈물짓는다. 그 해 몇 주 만에 학살된 주민들의 수는 3~4만명에 이르는데,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까지 마구잡이로 처형되었고 마을들은 약탈당하고 불태워져 버렸다. 하지만 그 후 연이어진 독재정권들은, 이러한 유혈의 역사를 명백히 밝혀내는 일을 철저히 거부했다.”

이어 르몽드는 “제주도의 이 비극적 사건을 비롯한 상처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아물기는커녕 오히려 골이 깊어지고 있는 까닭에, 한국은 중국의 경우와 같이 역사의 암울한 장들을 다시 들추어보기로 결정했다”라며, 과거사 청산의 단초를 제주4·3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군대에서 근무하며 항일 투쟁을 하던 유격대원(빨치산)들을 공격했다(본인은 한결같이 이를 부인하지만)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면서 박정희를 일본식민통치 유산의 연속사슬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했다.

이어 기자는 노무현 정부 들어서 시작되는 과거사 청산작업의 의미에 대해 제주출신 국회의원인 강창일 의원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우리는 책임의 소재를 명백히 밝혀서, 식민통치 시대부터 독재정권들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유지했던 일부 엘리트 계층에게 희생된 이들의 우롱당한 명예를 회복시켜 주려는 것이다. 징계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한데 모으려는 것이다.(강창일)”

이어 르몽드는  “반공주의나 일본에 대한 원한이 아니라,  민족 정체성의 재정립에 기반을 둔 민족적 화합을 이루기 위해"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의원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르몽드는 또한 “프랑스인들은 4년동안 겪은 고통이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35년 동안이나 지속되는 암흑 기간이었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면서 바로 이 점이, 역사진상 규명 작업의 여러 위험 요소들 중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즉, “거의 40년 동안 지속된 식민통치 아래 놓여 있었던 상황에서, 재벌로부터 시작해서 정치, 관료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에는 식민 유산의 자취가 뿌리 깊게 남아 있어” 일제 식민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이다.

르몽드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은, 북한 공산주의 독재자 김일성이 항일 투쟁을 했다는 당혹스러운 역사적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르몽드는 또한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현재의 움직임에 정치적 논란이 없지는 않다고 지적한다.

과거사 청산에 반대하는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의 움직임을 소개하며 이러한 싸움 중에, 집권당 당의장이었던 신기남(부친이 일본 군경에서 근무)씨가 당의장 직에서 물러난 것, 아버지가 일제시대 헌병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죄인 공시대(公示臺)에 매달리게 된 이미경 국회의원의 경우를 보며, “과거라는 실타래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은, 역사 씻김굿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시작하는 단계

글을 맺으며 르몽드는 다시 제주로 돌아온다.

“ 이 학살(4.3)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남자들이 투쟁을 하는 동안 마을에 남아있던 여인네들이 대부분이다. 배척당한 이 여인들은 침묵 속에 격리된 삶을 살았으며, 오랜 세월 동안, ‘공산주의자들’이었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조국의 기억에서 추방된 死者들의 혼을 무당들만이 불러내어 주었다. 이제는 그들을 기리는 기념비 설립에 관한 일이 과제로 있다.”

이어 기자는, “한국은, 역사 씻김굿의 고통스러운 여정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며 글을 맺는다.

즉 르몽드는 한국의 과거사 청산의 실타래를 제주 4·3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하는 르몽드 기사 전문]

'한국, 슬픔과 연민' - 르 몽드 Philippe Pons 기자

여자와 돌 그리고 바람이 많다고 해서 ‘三多島’라 명명되는 한국남단의 제주도는, 무엇보다도 그 화려한 경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곳은, 비극적 한국역사를 축약해서 보여 주는 깊은 상흔이 남아 있는 땅이기도 하다. 매년 4월3일이 되면, 제주시민의 절반은 1948년 봄의 무장봉기사건 (일본의 식민통치 멍에를 벗어낸 후, 미국에 의해 배치된 집권당에 대항) 당시에 학살당한 인척들을 기리며 눈물짓는다. 그 해 몇 주만에 학살된 주민들의 수는 3-4만명에 이르는데,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까지 마구잡이로 처형되었고 마을들은 약탈당하고 불태워져 버렸다. 하지만 그 후 연이어진 독재정권들은, 이러한 유혈의 역사를 명백히 밝혀내는 일을 철저히 거부했다.

제주도의 이 비극적 사건을 비롯한 상처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아물기는커녕 오히려 골이 깊어지고 있는 까닭에, 한국은 중국의 경우와 같이 역사의 암울한 장들을 다시 들추어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이 군국주의적 과거와 그에 동반된 잔혹한 행태들을 단순하고 간편하게 그저 자신들 좋을대로 해석하며 스스로 그 죄의 짐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분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자국 역사의 어두운 측면들을 그들 스스로 다시 조명해보고 있다. 일본 점령세력과의 협력, 그후 수십년 동안의 독재체제 아래 행해진 참혹한 수탈과 고문, 암살 등.

1905년, 수천년 역사의 주권국가였던 한국의 작은 왕국은 일본의 보호령 아래 들어갔다. 5년 후 일본에 합병된 한반도는 1945년이 되어서야 독립을 되찾았지만, 초강국들에 의해 둘로 나뉘어지고 국경 양쪽의 독재정권 아래 동족상잔 비극을 겪기도 했다. 한반도 남쪽 한국에서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절대적 필요성에 의해 모든 사실들은 은폐, 위조되었으며, 집권층의 인물들이 직접 일본과 협력했거나 일본인들을 위해 일한 가정 출신이라는 ‘國是’가 연유가 되어 비밀에 붙여졌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을 착취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본어 및 일본에서 도입된 풍습과 가치관들을 한국인들에게 강요함으로써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말살시키려고까지 했다. 저항하는 한국인들도 있었지만, 일부 한국인들은 동족을 지옥과 같은 일본의 광산으로 보내는 징집활동과 탄압에도 가담하고, 심지어는 일본군의 매음굴에서 매춘을 강요당한 20 만명의 ‘위안부’를 모집하는 일까지 도울 정도로 매우 적극적인 협력을 했다.

일본인들의 책임이 크지만, 그들에게 매수당해 있던 한국 관료들과 징집요원들의 책임도 크다.

한국을 발전궤도에 올려 놓은 군장성 출신의 박정희 대통령 (1961년에서 1979년까지 한국 통치)은, 이러한 연속사슬의 상징적 인물이다.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군대에서 근무했던 그는, (항일 투쟁을 하던) 유격대원(빨치산)들을 공격했다(본인은 한결같이 이를 不認)는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미국 점령세력에 의해 집권한 이승만 독재정권을 학생들이 전복시킨 지 1년 후에 권력을 쥐게 되었다. 40년 일본 식민통치 기간 중 권력층에 있다가 여전히 정치 및 경제계를 장악하게된 엘리트 계층은, 적극적인 반공주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대일 협력 과거를 ‘씻어내는’ 일에 전념했다.

이와 같이 과거를 억눌러 묻어두고 외면함으로써 일제 식민통치의 과거가 청산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식민통치의 폐해에 대한 유일한 피고인 일본 뿐 아니라 그야말로 가차없는 숙청작업을 과시할 수 있었던 북한에 대해서도, 한국은 난감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숙청’은 매우 상징적인 수준이었다. 겨우 682건이 공개되었고, 그 중 38건에 관련된 판결이 내려지고 7건에 대한 刑이 주어졌으며 7건은 사면처리되었다. 이는 점령세력 미국이 한국을 통제하기 위해 일본인들에 의해 배치된 행정 및 치안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인데, 그 결과,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과거가 외면되고 강탈 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원한과 적대심 그리고 저항감을 불러 일으켰다.

2002년 12월 선출된 노무현 신임 대통령과 함께, 15년전 독재정권을 물러나게 하고 한국을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 민주국가의 일원이 되도록 만든 개혁주의 일파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구성된 한 군단이 한국의 지도층을 이루게 되었다. 법령들이 가결되고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구성이 되어 한국역사 1백년에 대한 ‘재검토’가 시작되었다.

제주 출신인 강창일(여당 국회위원)씨는 진행 중에 있는 이 작업에 대해 설명한다. “우리는 책임의 소재를 명백히 밝혀서, 식민통치 시대부터 독재정권들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유지했던 일부 엘리트 계층에게 희생된 이들의 우롱당한 명예를 회복시켜 주려는 것이다. 징계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한데 모으려는 것이다.”

“1940년대 말부터 휴전이 체결된 1953년에 이르기까지, 1백만의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그 중 다수는 공산주의라고 몰려서 죽은 것이다. 그들의 자녀들까지 차별대우의 희생자가 되었었다”라고 그는 말을 잇는다.

역사를 전공했으며 1970년대 말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던 강씨는, 반공주의나 일본에 대한 원한이 아니라, 민족역사의 어두운 측면들까지 국민들의 역사의식 속에 통합되어 받아들여져서, 민족 정체성의 ‘분석과 재정립’에 기반을 두고 민족적 화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반도에서 전례 없는 이러한 역사 재정립 작업은, 남아프리카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 사례를 본받은 것인데, 이는 한국이 일본에게 역사에 대해 숙고해 볼 것을 요구할 때 훨씬 더 당당한 입장이 되도록 해 줄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이와 같은 내적 성찰을 거듭 촉구하고 있다. 일본의 패전을 기념하던 2004년 8월15일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가정들은 3세대에 걸쳐 차별대우의 희생자가 되고 빈궁한 삶을 사는 반면, 일본과 협력했던 가정들은 특혜를 입었던 터무니 없는 현실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실, 과거에 대한 조사는 이미 10 여년 전에 ‘민중’이라는 급진적 史料 편찬 세력권 비정부단체들이 고생스럽게 수행한 연구활동을 통해 시작되었다. 연구욕이 왕성한 이들의 활동 덕분에 진상들이 밝혀지고 일제와 협력한 이들의 명단들이 작성되었다.

“史料를 다시 뒤적이고 직책에 부적합한 인물들을 퇴출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은 현재에 남아 있는 일제의 유물을 밝혀내기 위함이다. 이는 민족분단과 50년간의 권위주의적 정치 습관의 저변에 있는 불행한 역사의식의 원천이다”라고 Alain Delissen은 평한다. 그는 현대 한국사 전문가로서 Ecole des hautes ?tudes en sciences sociales (인문과학고등연구원)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분단의 심한 충격 이외에도, 인정받는 것에 대한 가시지 않는 갈증 또한 한국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이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Marcel Ophuls의 기록영화 Le Chagrin et la Piti’ 로 인해 프랑스 국민들이 각성을 하게 된 사실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된다”고 Chu Joo-supil씨는 말한다. 그는 1999년에 한국어로, 프랑스의 역사청산에 관한 최초의 저서를 썼다. 중앙일보의 파리 특파원을 지낸 그는, 1980년에 군부 출신의 전두환대통령 정권의 지시에 의해 해고되었다가 7년이 지난 다음에야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Barbie, Touvier, Papon의 소송을 지켜 본 덕택에 그는,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긴 시간에 걸쳐 진전된 프랑스의 여론을 알리는 일에 기여했다.

“프랑스와 한국의 경우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프랑스인들은 4년동안 겪은 고통이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35년 동안이나 지속되는 암흑 기간이었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바로 이 점은, 역사진상 규명 작업의 여러 가지 위험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즉, 거의 40년 동안 지속된 식민통치 아래 놓여 있었던 상황에서, 과연 ‘일제에 협력한 사람들’ 등을 운운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며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길은, ‘평범한 협력’을 하는 것이었다.

재벌로부터 시작해서 정치, 관료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에는 식민 유산의 자취가 뿌리깊게 남아 있다.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은, 억눌러 놓았던 고통스런 과거를 다시 들추어내고 한국이 스스로를 희생자로서만 인식하는 것을 포기함을 전제로 한다.

한국이 희생자였다는 사실은 명백하지만, 한국의 책임인 부분도 있다.

한국은, 북한 공산주의 독재자 김일성이 항일 투쟁을 했다는 당혹스러운 역사적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 반공 프로파간다에 의해 수십년 동안 외면되고 비하되었던 김일성의 ‘武功’들이 이제는 교과서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

여론은 오랜 冬眠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중이며, 이와 함께 막연한 불안감 내지 거북해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아이들이 어른들(부모와 조부모)에게 난감한 질문들을 하는 것이다. 예전에 프랑스에서 젊은 세대들이 이해하려고 애쓰던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격렬한 상처들도 그럭저럭 희미해져 버린 노년 세대는, ‘잊고 용서’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다.

서울의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한 할머니는, “그 진흙탕을 뭐하러 휘젖는 것인갚라고 말을 내뱉았다. 그녀는 시련을 겪은 얼굴에 새들해진 사과처럼 주름진 모습이었다. 일제시대에 강요된 언어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아직도 일본어를 구사하는 이 할머니는, “식민통치 동안에도 우리는 살아야 했다…”고 말한다. 이는 당시의 많은 소시민들이 취했던 굴종적 태도를 반영해 주는 말이지만, 수치심과 원한이 섞인 어렴풋한 감정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소설가 조정래의 아리랑, 우리의 땅은 우리의 삶이다(L’Harmattan출판사) 에서는 이와 같은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은, 고통의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이 깃든 대하소설이다.

물론,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현재의 움직임에 정치적 논란이 없지 않다. 우파에 의해 공산주의를 지지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중도좌파는, 우파는 일제 협력세력 출신이라고 비난함으로써 이에 응수하고 있다. 지난 여름 조선일보는 한국사 재검토에 대해 항변하며, “한국을 수치스런 국가로 만들어야 할 것인갚라는 질문을 던졌다. 전통적 보수파 엘리트를 대변하는 한나라당 역시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한나라당은, 역사진상규명은 한나라당 당수인 박근혜(독재자 박정희대통령의 딸)씨의 평판을 깍아내리기 위한 음모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싸움 중에, 집권당에서도 당의장이였던 신기남(부친이 일본 군경에서 근무)씨를 비롯한 여러 명이 직책을 잃게 되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헌병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죄인 공시대(公示臺)에 매달리게 된 이미경 국회의원의 경우를 보면, 과거라는 실타래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학생시절 독재정권에 대항해 투쟁했던 그녀가, 부친의 행적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는 것일까? 삼촌 중 한 명이 월북했다는 것 때문에 온 가족이 ‘낙인’ 찍힌 것인가?

이와 같은 사가는, 일제에 협력했다는 비난과 함께 공산주의를 지지한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을 수 많은 가정들의 고통을 보여 준다.

수난의 섬 제주도에 대한 역사소설 한라산의 노을(10여년 전 출간)을 쓴 한림화씨는, “제주도 사람들의 기질과 사고양식은 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덕구는 (4.3 무장투쟁 당시) 제주 유격대를 지휘했다. 그는 체포되고 고문받은 후 처형되었으며, 십자가형 나무틀에 묶인 그의 시신은 대중들이 볼 수 있는 공공장소에 공개되었다.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남자들이 투쟁을 하는 동안 마을에 남아있던 여인네들이 대부분이다. 배척당한 이 여인들은 침묵 속에 격리된 삶을 살았으며, 오랜 세월 동안, ‘공산주의자들’이었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조국의 기억에서 추방된 사자들의 혼을 무당들만이 불러내어 주었다. 이제는 그들을 기리는 기념비 설립에 관한 일이 과제로 있다.

한국은, 역사 씻김굿의 고통스러운 여정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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