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경비대원'들을 위한 '어버이날 ' 행사

대한민국 동쪽 땅끝 독도. 면적은 0.186㎢이며 동경 131°51'~131°53', 북위 37°14'00"~37°14'45"에 있다. 옛날부터 삼봉도(三峰島)·우산도(于山島)·가지도(可支島)·요도(蓼島) 등으로 불려왔으며, 1881년(고종 18)부터 독도라 부르게 되었다.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는 화산섬으로 비교적 큰 동도(東島)와 서도(西島) 두 섬 및 총 91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부근 해역은 전갱이, 고등어, 미역 따위가 풍부한 어장이다. 이 섬이 주목받는 것은 한국 동해의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라는 점도 있지만, 한·일 양국 간 영유권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백과사전에서 발췌>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주권의식 확립을 위해 중·고등학교 역사 교육과정에 독도 교육이 강화되고 있다. 때마침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국회의원 정옥임(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의원의 주최로 가칭 '독도경비대원을 위한 어버이날 행사'가 이뤄졌다. 지리적 특성으로 면회가 어려운 독도경비대원들을 응원 ? 격려하고, 최근에 잇따른 사고로 말미암아 군 복무 중인 아들들을 염려하는 부모와 국민에게 안전하고 건강한 우리 경비대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함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강화시킴으로써 독도수호 의지에 대한 대국민 홍보를 강화하고자 함이었다.  
    

▲ 여객선이 동도 접안지에 도착하면 서도의 독도관리 사무소 직원 2분이 고무보트를 타고 동도로 와서 인원을 점검한다. 일반 관광객들은 20~25분 가량 접안지에서만 머무를 수 있다.

5월 7일 저녁, 이스타나 항공의 날개를 빌려 하늘로 날아올랐다. 문득, 1년 전 허리가 아프다며 치료를 받고자 휴가를 나왔던 녀석이 생각났다. 그때는 녀석이 중간제대하면 어쩌나 속앓이도 참 많이 했는데, 오늘까지 무탈하게 있어주는 녀석이 고맙기만 하다. 눈물이 팽그르르 볼 위에서 맴돌다 떨어진다. 서쪽 하늘에 짙게 깔린 노을이 잘 다녀오라는 듯 밝게 비추더니 이내 사라진다. 행여 아들 녀석 만나러 가는 길 끝까지 밝혀주지 못함이 안쓰러운 듯 지상에 하나 둘 불을 켜게 하더니 이내 무수한 별빛이 되어 하늘길을 비춰준다. 그랬다, 별은 하늘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상에서도 하늘을 향해 쏘아대는 무수한 별이 있었다. 서울 하늘에 다다르자 축복이라도 보내는 양 그 별빛은 찬란히도 빛났다. 용산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여섯 시 반, 지정장소인 노들섬에 도착했다. 헬기는 정확히 일곱 시에 출발했다. 밥추리(잠자리의 제주방언)비행기의 주위는 초고속 태풍의 위력 못지않게 거셌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정옥임 의원이 어버이날을 맞아 개최한 행사 독도 면회. 독도경비대원들과 부모들이 독도에서 면회한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다.  
    

▲ 서도와 연결되어 있는 탕건봉은 벼슬아치가 갓 아래 받쳐 쓰던 관(冠)의 하나인 탕건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도와 서도 사이에 있는 삼형제굴 바위엔 세 개의 굴이 있다.

행여라도 날씨 때문에 행사가 취소되면 어찌할까 염려도 하였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날씨는 오히려 가는 길 더디다고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당겨주는 듯 헬기와 나란한 방향, 축복임이 분명했다. 예상보다 빨리 울릉도에 도착했다. KBS 다큐 3일 팀이 기다리다 인터뷰를 요청했다. 망망대해에 아들을 보내놓고 천안함 사고 이후 걱정이 되지 않았느냐고 물어왔다. 하지만 이제 난 아들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저 자랑스러울 뿐이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독도에 대한 연구논문이 많이 쏟아져서 제삼국에서 일본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하는 것뿐이다. 독도로 향하는 울릉군청 행정선 역시 예상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독도의 동도, 접안지에 내렸다.  
    

▲ 높이 98.6m의 동도로 오르는 길은 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계단의 높이는 만만치 않았다.

설렌다. 가슴이 마구 뛴다. 내 아들이 근무하는 곳이어서라기보다 독도에 내 발도장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설렜다. 부리나케 아들 녀석들 만나고자 동도를 오르는 다른 부모들과는 달리 그저 난 독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들 녀석이 입대하던 날, 논산의 훈련소에 녀석을 입소시켜놓고 비행기 안에서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앙앙 울던 걸 생각하면, 나 역시도 아들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내 아들이 독도경비대에 배치되어 남들이 할 수 없는 국토 최전선을 지키는 게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리. 제주도 한 바퀴 도보여행을 하던 어느 봄날, 이미 산새들의 먹이가 되어 남아있지 않은 줄 알았던 노박덩굴 씨앗이 돌담 위에 고스란히 앉아있는 걸 보았었다. 어쩌면 군에 간 녀석을 기다리는 나와 닮았다며 지었던 시조 한 수를 꺼내어 조용히 읊조려 보았다.

노박덩굴

- 고봉선 -

막다른 골목길로 동장군 밀어놓고
버선발 살그머니 정낭 내려놓으면
봄 전령 말발굽 소리 담벼락을 타고 온다. 

빈혈 앓는 밥상에도 난 자리가 눈에 밟혀
아들 녀석 휴가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에미는 울릉섬 찾아 목을 길게 빼어 들고. 

상처인들 대수인가, 흡착손에 힘을 싣고
동해 찾아 더듬대는 그 눈빛이 하도 고와
주린 배 서럽다 울던 산새조차 비켜간다.  
    

▲ 동도로 이어지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숫돌바위가 마주보고 있있다.

마치도 하얀색 땡땡이 무늬 도배지를 발라놓은 것 같은 섬 독도. 지난 1월 울릉도의 독도박물관에서 영상을 보며 괭이갈매기를 운운하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군가 침략이라도 할까 감시하는 양 섬 위를 유유히 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행사는 막사의 2층에서 이뤄졌다. 아들과 함께 부르는 어버이날 노래가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외롭다 하지만 절대로 외롭지 않은 섬 독도. 올라가는 길은 조금이라도 덜 가파르라고 구불양장으로 정비되어 있지만, 그래도 계단은 쉽게 오를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오르다 불편하여 신발을 벗었다. 막사 안에 들어서자 뒤를 보이며 서 있는 대원들이 보인다. 뒷모습만으로도 능히 알 수 있는 녀석의 뒤에 가 섰다. 무언가 날카로운 끝이 입천장을 뚫고 콧등을 꿰차는가 싶더니 눈물이 솟구친다. 마침내 돌아서며 앞을 보이는 녀석을 향하여 두 팔을 벌렸다. 통통했던 녀석의 몸매는 간데없고 수척해진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대견스러웠다. 녀석이 달아주는 카네이션에 가슴을 맡겼다. 어버이날 노래를 같이 부르며 나 역시도 시부모님과 친정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 내 아들이 독도에서 근무하며 생활하는 막사다. 최대한 뒤로 물러섰지만 더는 물러설 수가 없어, 이 모습이나마 겨우 담을 수 있었다.

정옥임 의원은,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도발을 언급하면서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독도에서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하며 '앞으로 이 행사를 매년 한 차례씩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동행한 정진석 의원도 "우리 영토의 동쪽 끝을 지키는 여러분은 대한민국의 영광스러운 자산이다. 여러분 덕분에 우리 국민이 육지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지낼 수 있다."라고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 독도는 경비대원들만이 지키는 게 아니었다. 그곳의 식물들이, 파도소리가, 갈매기들도 서로 조를 이루어 독도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역력히 보였다.

저 멀리 동해 외로운 섬, 그렇지만 그들은 오히려 외로움을 즐기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겨나가고 있었다. 아니, 그 외로움이 있기에 더 돈독하게 독도경비대원과 괭이갈매기, 키 작은 사철나무와 독도의 식물들이 어우러져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비대원들만이 독도를 지키는 게 아니라 독도 역시 경비대원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 독도우체통이다. 저 우체통을 꼭 한 번 이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녀석이 독도에서 근무하는 동안 한 통의 편지를 써야지 했지만, 우편물을 받아보기에는 불투명하다 하여 실행하지 못했다. 영영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독도를 한국 주권 영토로 인정하기 위한 상징적 조형물로서 투입된 우편물은 독도 경비정 입항 시(2개월에 한번) 수거 발송되므로 정상적인 배달이 어려우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울릉우체국장 

독도우체통이다. 저 우체통을 꼭 한 번 이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녀석이 독도에서 근무하는 동안 한 통의 편지를 써야지 했지만, 우편물을 받아보기에는 불투명하다 하여 실행하지 못했다. 영영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2003년 경비대 막사 옆에 설치되었으며 우편번호 799-805이 부여되었다.
    

▲ 정옥임 의원이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왜 나는 작성하지 못하였을까? 그저 설렘으로 독도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보니 난 차마 생각도 못했는데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 같다.

2층에서 어버이날 행사를 치르고 1층 식당으로 내려왔다. 녀석들이 직접 준비한 홍합밥과 닭고기 조림, 미역국과 생미역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미역은 경비대원들이 직접 바다에서 채취한 것이란다. 국을 조금도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고 옆에서 아들 녀석이 챙긴다. 그런 녀석을 보며 참 많이도 어른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어 뿌듯했다.  
    

▲ 독도경비대원들이 이미 마련한 식당에서 우리와 마주 앉은 행사 주최자 정옥임 의원과 정진석 의원의 모습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 훈이와는 이미 친숙한 사이인 듯하였고, 나는 낯설다고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괭이갈매기를 못살게 굴고 있어서인지 줄에 묶어 키우고 있었다.
    

▲ 어쩌다 한 번 티비에서나 봤던 삽살개가 막사 앞에 있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아무 생각없이 그저 가까이 다가섰는데 녀석은 낯설다고 쳐다보기만 했다. 상상했던 것 보다는 아주 컸다.

사진에서만 봐 오던 곳 독도. 살아생전 밟아볼 수나 있을까, 꿈에만 그리던 곳에서 생활하는 내 아들. 그 아들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게 될 줄이야 꿈인들 꾸었을까마는.  독도는 섬 자체가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풀 한포기, 돌 한 조각 가지고 나올 수 없다.
    

▲ 독도가 왜 한국령인가를 입증하는 자료는 많다. 그런데도 분쟁은 왜 끊이지 않을까? 이번 내가 찍은 발도장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더 큰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기 한 채 보이는 그 집이 독도의 유일한 집이다. 1981년 최종덕 씨가 최초로 주민등록 전입을 했고, 1991년부터 김성도, 김신렬 씨 부부가 지금까지 살고 계시다. 언젠가 휴가 나왔던 녀석이 서도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난 저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 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삶은 동경이 아닐 테니 말이다. 비록 동도에 한정된 방문이었지만, 그래도 내 머리엔 지난날 섬사람들의 표정같은 애환과 그리움이 그려진다. 인자한 표정으로 독도를 어루만지는 두 분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 독도의 유일한 주민 김성도 할아버지 내외가 살고 계신 집이 보인다.

헬기장에서 녀석을 앉혀놓고 한 방 박았다. 독도에도 헬기장이 있는데 왜 이곳으로 바로 오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잠시 일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내 아들이 곧 해결해 주었다. 지금은 괭이갈매기들의 산란기라고 했다. 편리를 위한다기보다는 괭이갈매기들의 처지를 배려한 주최 측이며 독도경비대의 배려가 고맙기만 한 순간이다. 
    

▲ 군에서 추억을 남길 만한 사진 한 장 제대로 없을 터였다. 추억의 한 페이지 장식할 수 있을까 싶어 앉으라 하여 서도를 배경으로 한 컷 눌렀다.

1954년, 독도에서는 맨 처음 순직자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지난해 실종됐다가 발견된 독도경비대 통신반장 고 이상기(30) 경사까지 합하여 순직자는 모두 일곱 분이다. 현재 비석은 모두 6석이며 아직 이상기 반장님의 비석 1석은 세워지지 않았다. 그분들의 묘비 앞에서 정옥임 의원과 정진석 의원, 독도경비대의 조근 소대장님께서 묵념을 올리고 있다.  
    

▲ 행사 주최자 정옥임 의원과 정진석 의원, 조근 소대장님께서 독도에서 순직하신 분들의 묘비 앞에서 묵념을 올리고 있다.

▲ 이번 행사 모든 참가자들이 모여 기념컷을 눌렀다.

내가 독도를 방문한다는 사실이 흥분되었던 것 중 하나는 그곳의 식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철나무가 있다는 사실은 독도박물관의 영상에서 보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늘이 되엄직한 나무는 한 그루 보지 못했다. 드문드문 갓나물인 듯싶은 노란 꽃이며 땅채송화가 바위를 덮고 있었다. 게다가 해국과 제비쑥으로 섬은 뒤덮여 있었다. 언뜻 냉이꽃을 닮아 보이는 섬장대가 방문객을 반긴다. 
    

▲ 청순한 모습의 섬장대는 나를 보며 말하는 듯했다, 독도는 외롭지 않다고.

쉽게 말하면 독도를 비추는 유인 등대, 독도의 항로표지소다. 이곳은 독도경비대원과는 별도로 등대를 운영하는 등대원이 상주하며 보통 한 달 단위로 돌아가며 근무를 한다고 했다. 
    

▲ 독도경비대와 이곳 항로표지소에도 초고속 인터넷이 제공되고 있어 더 한층 우리 땅임을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SBS 생방송 투데이 뉴스에서 나온 촬영팀이다. 돌 태극기의 위치를 물어 가리켜 줬더니 그쪽으로 가다가 가까이에 앉은 괭이갈매기를 발견했다. 카메라를 내미는 순간 괭이갈매기는 날아간다. 그 모습이 나에게 잡혔다. 역으로 그 기자 역시 우리 훈이가 나를 향해 돌 태극기 앞에서 셔터를 누르는 모습이며 나를 향해 카메라를 돌렸다.  
    

▲ 행사의 모든 면과 독도의 모습을 일일이 담고 있다.

독도의 영원한 지킴이이자 우리 땅임을 알리는 돌 태극기 앞에 서라며 아들 녀석이 한 컷 눌렀다.  
    

▲ 대형 돌 태극기는 바위에 누워 속삭인다, '독도야 걱정마라 내가 널 지켜줄게.'라고.

저 끝에 보이는 초소가 독도경비대원들이 경비를 서는 마지막 부분 동쪽 끝이라고 했다.  
    

▲ 우리가 독도 구석구석을 살피노라 여념이 없을 때도 대한민국 동쪽 끝은 철통방위가 이뤄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산란기를 맞은 괭이갈매기들은 내가 섬에서 왔음을 알아 차렸는지 아는 체하는 것만 같다. 마치도 나를 향해 "야!"라고 부르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그만 "무사('왜'의 제주방언)?"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손을 잡고 걷던 아들 녀석이 빙그레 웃는다.  
    

▲ 녀석들은 기껏해야 만나는 이들이 독도경비대원이 전부일 터인데도 그리 낯설지 않는다는 듯이 피하거나 경계를 하지는 않았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는 독도이지만 그들 역시 사람과 함께 하는 새였다.

우리가 독도를 둘러보는 사이 보초를 서는 경비대원 못지않게 높은 곳에 앉아 보초를 서는 갈매기 한 쌍. 그들도 이미 독도경비대원의 일원이었다. 
    

▲ 섬 둘레, 꼭대기 어느 한 곳 놓치지 않고 이들도 독도를 지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알은 풀숲에만 낳는 것이 아니었다. 바위 위에 알을 낳고 품으면 체온은 어떻게 전달하고 또 부화는 제대로 이뤄질는지 걱정도 되었다. 하긴, 나뭇가지에 둥지를 튼다 하여도 둥지를 틀엄직한 나무 한 그루 없는 독도였다. 뱀이며 고양이가 없는 한 풀숲에 둥지를 튼다 한들 문제 될성은 없다 싶다. 설령 바위에 둥지를 틀지도 못한 채 알을 낳았다 할지라도 그 역시 나만의 기우인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독도에서 살아온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지혜가 있을 테니 말이다. 풀숲에 둥지를 트는 게 가마우지와 이들의 특성이라는 걸 저어새를 공부하며 우연히 알게 되었다. 바위에서 굴렀는지 이따금 깨진 알도 보였다.  
    

▲ 알이 굴렀는지 노른자위가 바위에 흘러있는 모습을 보자 괜스레 이들이 안쓰러웠다.

통로 가까이에 알을 품은 괭이갈매기에게 카메라가 향했다. 난처한 듯 천천히 옆으로 비켜서는 어미 갈매기에게 미안하다. 얼른 셔터를 누르고 자리를 비켰다.  
    

▲ 대부분의 갈매기들이 알을 품고 있었는데, 한번에 낳는 알의 숫자는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동쪽 끝 경비초소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래를 굽어 보며 한 컷 눌렀다. 내려다보는 순간 내 귀에 들려오는 저 아우성은 무어란 말인가? 참으로 이상도 하여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자연적으로 땅이 꺼져 형성된 천장굴이라고 했다. 바닥에는 구멍이 있어 바다하고 연결되어 있으며 굴 안에서 파도가 치기도 한단다. 
    

▲ 자연적으로 형성된 굴이며 바다와 연결이 되어 있어 안에서 파도가 치기도 한다.

이제 떠나야 하는 시간, 더 머무르며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싶지만 지나친 욕심은 금물이다. KBS 다큐 3일 팀에서 다시 인터뷰를 요청한다. 다른 부모들과 달리 제일 씩씩하게 보인다면서 슬프지 않으냐고 묻는다. 일본이 억지를 쓰는 독도에 우리 땅임을 강조하는 내 발도장을 힘차게 내리찍을 수 있어 좋고, 또 그런 독도에 근무하는 아들이 자랑스러울 뿐이라고 했다.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섬을 내려서며 선착장으로 가는 길, 정말이지 티비가 끝나는 시간, 애국가가 나올때나 볼 수 있었던 모습들이다. 
    

▲ 독도는 섬 자체가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되어 있다. 과연 구석구석 모두가 천연기념물이었다.

통로를 사이에 둔 두 개의 숫돌바위를 보며 난 혹시라도 수돌과 암돌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날을 세우는 숫돌을 의미하는 숫돌바위라고 일러준다.  
    

▲ 부채바위와 또 하나의 숫돌바위.

조용히 일렁이는 바다 위로, 독도를 맴도는 괭이갈매기들의 노래가 마치도 독도는 우리가 지킬 터이니 염려 놓으라는 듯 들린다. 
    

▲ 촛대를 닮아서 촛대바위라고 한다는데 어쩐지 나는 출산을 앞둔 만삭의 여인 같이 느껴졌다.

헤어지기 전, 대원들은 부모님을 마주하여 절을 한다. 코끝이 찡하여 온다. 
    

▲ 앞에서 절을 하는 녀석을 보며 콧등이 시큰해지더니 눈물이 왈칵 솟았다.

4월의 막바지에 다다른 어느 날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더니 독도에서 소대장님이며 부소대장님께서 전화가 왔었다고 했다.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행스럽게도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어버이날 독도 방문을 계획 중이라고 참석할 수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는 중이라고 했다.
    

▲ 난 헤어지기가 아쉽지 않아, 네가 독도에서 훌륭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건강하여라.

순간적인 설렘, 무조건 가야지 하면서도 사실 경비문제로 고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이내 밀어준다, 돈이야 마련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당신은 헬기를 타 봤으니 나더러 가란다. 남편의 뒷심을 등에 지고 오른 독도 행이었다. 
    

▲ 잠시동안이나마 만남을 가졌던 부모를 보내며 사랑한다고 외치는 대원들.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을까. 그래, 나도 사랑한단다.

그렇게 일정이 정해진 다음부터 까닭 없이 내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산만 떨다 보니 어느새 D-day는 다가와 있었다. 무엇을 들고 갈까? 음식을 만든다 하여도 전날 출발해야 하기에 상해버릴 것만 같고,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운 아들, 소중한 독도를 만나러 가는데 차마 그냥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금감이나 사갈까 싶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남편이 가지고 가라며 청견(제주산 오렌지) 10kg를 사왔다. 시댁에서 따다가 항아리에 담가 둔 당유자차를 꿀병에 넣었다. 녀석 세대의 입맛에야 안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그 맛을 알면 쉬 잊을 수 없는 게 당유자차다. 감기 기운이 있을 때, 혹은 피곤하다 느껴질 때, 일없이 목 아프고 기침이 나올 때는 최고다. 천식 기가 있는 녀석이라 더더욱 챙겼다. 챙겨도 챙겨도 모자란 것만 같아 다시 고민했다. 
    

▲ 이미 헤어져 배는 움직이고 있다. 그래도 보내기는 왜 이리도 힘이 든지 돌아서기가 힘들다. 배 안의 유리창 얼룩이 심하다,

무엇을 더 가지고 갈까? 마땅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내가 어렸을 적 어머니께서 종종 고아 주시던 엿을 떠올렸다. 차조와 제주산 한우를 샀다. 좁쌀밥을 짓고 엿기름을 풀었다. 20분 정도를 재웠다가 짜냈다. 친정어머니께서 도와주시는 데 엿기름 찌꺼기가 안 보인다고 이상하다고 하셨다. 한참을 고았다. 아무래도 이상하셨는지 누룩가루를 넣은 게 아니냐고 하셨다. 순간 아차 했다. 지난겨울에 된장을 담그며 사다 놓은 누룩가루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내내 엿기름으로만 착각하고 있었던 나다. 6일 저녁, 수업을 끝내고 돌아오며 다시 소고기와 차조를 샀다. 금요일의 수업은 훗날 보강하기로 학부모님들께 양해를 구하였다. 독도 행을 준비하며 피곤해 하는 나를 보더니, 팔순을 넘기신 친정어머니께서 당신이 볼 터이니 한숨 자란다. 그렇게 시작한 엿은 7일 오후에야 다 고았다. 부랴 짐을 챙겼다. 부리나케 퇴근하며 달려온 남편이 공항으로 데려다 줬다. 고향의 친구들이 서울에서 번개를 치자고 하였지만 다 마다하였다. 무척이나 피곤해 있던 나는 용산에 도착하여 싱숭생숭하다 잠이 들었다. 
    

▲ 입대할 땐 까마득한 세월이 남아 있는 것 같았는데 ,가을이 되면 제대하게 되는 녀석의 거수경례가 제법 듬직했다.

훈련소로 떠나던 날, 남편은 공항에서 녀석을 앞에 앉혀놓고 말했다, 전투경찰은 절대 안 된다고. 하지만 녀석은 전투경찰이 되고 말았다, 본인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훈련소에서 마지막 편지를 보내왔다, 아빠가 그토록 안 된다고 하시던 전투경찰로 떨어졌노라고. 자신의 의지와 달리 이미 결정되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고. 하늘이 노랗게 보이던 순간이었다.

그랬다. 정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바랄 수 있는 건 수도권에만 배치되지 말아 달라는 비는 것뿐이었다. 다행히도 경북경찰청이다. 그다지 고생을 모르고 자라던 녀석은 훈련 내내 생각나는 건 집뿐이었나 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마음 놓는 나에게 "엄마, 경북경찰청이면 울릉도로 떨어질 수도 있단 말이야."라며 그저 집에서 멀어져가는 것만 안타까워하던 녀석. 남들은 평생 한 번 가보지도 못할 곳에서 근무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냐며 남편이 옆에서 거둔다. 
    

▲ 한참을 가다가 문득 뒤돌아본 그곳에서도 녀석들은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먹고 산다는 이유 때문에 녀석을 돌본다는 건 늘 뒷전이었다. 그래도 녀석은 말썽없이 동생까지 보듬으며 잘 자라주었다. 그런 녀석을 군대 보내고 나니 처음 몇 달은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어도, 설거지를 할 때도 예외 없이 눈에 밟혔다. 그때마다 흘린 눈물은 또 얼마만큼이나 될까? 울릉경비대에 첫발을 딛고 홈페이지에 사진이 올라오던 날, 아마 난 밤을 새워 울었을 것이다. 경직된 자세에 눈동자는 거의 사팔뜨기다시피 돌아가 있었다. 행여 내 아들 잘못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오매불망 그리던 녀석이 첫 휴가를 나온단다.

휴가 날, 배가 묶여버렸다. 안절부절못하던 녀석은 몸뚱어리만 울릉도에 남겨두고 마음은 이미 바다를 건너 제주를 향하고 있었다. 묵호로 향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통화를 하면서 터미널을 찾았고 힘들게 새벽에서야 부산에 떨어졌다. 새벽녘, 집을 뒤흔드는 벨 소리. "엄마, 나 지갑이 없어졌어." 울릉도가 참으로 멀긴 먼가 보다. 게다가 험난하기까지 했다. 사색이 되어 있을 녀석을 생각하니 정말 눈앞이 아찔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만 생각하자며 녀석을 안심시켰다. 그렇게 힘들게 첫 휴가를 다녀갔다.

자랄 때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별일이 있어도 면회는 다녀와야지 마음먹었다. 동생을 그토록 보고 싶어 하기에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막내와 함께 울릉도로 향했다. 참말로 변덕스러운 날씨, 그렇게 포항에서 3일을 묵다 보니 면회는 6박 7일이 되어버렸다. 그보다 훨씬 난조건인 독도에 편히 다녀올 수 있었던 1박 2일. 다행스럽게도 날씨가 좋아 가는 시간도 오는 시간도 훨씬 단축이 되었던 관계로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빨리 서울에 도착했다.
    

▲ 1년 중 50여일만 볼 수 있다는, 삼대(三代)가 공을 쌓아야만 갈 수 있을 만큼 험한 독도에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던 건 헬기 덕분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있었다는 독도경비대원과 부모와의 만남. 처음인 만큼 경찰이며 군이 행사를 추진하는 데는 힘이 들었다고 한다. 이번을 계기로 앞으로는 이 만남이 계속 이뤄질 거라는 믿음과 함께……. 도착한 노들섬에서 뒤를 돌아보며 수고했던 경찰들과 헬기를 향하여 마지막 컷을 눌렀다. 노들섬에 내리꽂히는 태양이 우리가 이용했던 헬기의 빛깔만큼이나 붉다. 나에게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하여 주신 정옥임 의원님께 감사드린다. 하지만 나의 아들이 그곳에 없었다면 과연 독도를 밟아볼 수나 있었을까? 처음 염려했던 바와 달리 어진 모습 그대로 군 생활에 충실해 준 나의 아들, 그런 나의 아들 훈이에게도 한없이 고맙다는 마음 보낸다. 더불어 늘 보살펴 주시는 조근 소대장님께도 감사하다는 말 전한다.

독도가 띄우는 편지

- 최광림 -

서러워한 적이 없다
누굴 미워한 일도 없다
그렇다고 죄를 짓거나
배신한 적도 없다
날마다
지고 또 뜨는 해를
울컥울컥 삼켰다. 

동도 서도 마주보며
수인사를 할 때마다
입술 곱게 단장한
망부석이 되었다가
어쩌다
심심한 날은
웃음 한 쪽 베어 문다. 

태극기 휘날리는
어머니 자궁 같은
탯줄 묻은 반도가
못내 그리웠을 뿐이다
그 품에
날 앉힐 양이거든
칼 꽂듯 화인 찍어두거라. 

<제주의소리>

<고봉선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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