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영전에 드리는 못난 아들의 글월

어머님!

이렇게 불러보아도 허공중에 떠 돌고 마는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입니다.

초등학교적 추억이 리와인드되면서 다시 클로즈업되는 우리 어머니의 이미지.

모슬포 신영물깍(지금은 도시개발로 매립되어 버린 갯벌) '절간앞바당'에서 일어난 '어미닭과 오리새끼의 대소동'입니다.

초봄 나는 무심코 그 앞바당에 나갔다가 바닷가에서 갑짜기 '대소동'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제 갓부화된 병아리들을 데리고 소풍나온 어미닭이 목메이게 깍깍거리고 날개짓을 해데는 것이었습니다.

그 엄마닭이 데리고 나온 '병아리'들은 모두 '오리새끼들'이었습니다. 그 오리새끼들은 '물'을 만나자마자 모두 물속으로 뛰어들어 재미있게 노는 것이었습니다. 잠수도 하고 헤엄도 치고...

그러나 따라온 어미닭은 애간장이 다 녹아내렸습니다. '저것들이 빠져죽을텐데...' 어미닭은 혼신을 다해서 '얘들아, 어서 나와!' 외쳐데는 것만같았습니다. 자신이 물속으로 뛰어들어보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어린 오리새끼들은 어미닭의 심정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는지 천진난만하기만 했습니다.

나도 어머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지도 못하고 천진난만하게 '섬'을 떠나 '육지'로 나갔습니다. 내가 떠나갈 때 어머님의 심정은 아마도 이런 어미닭의 심정이 아니었나 오늘 새벽에 또 다시 헤아려 봅니다.

어머님은...

소학교(=초등학교) 문전에도 못 가본 어머님은 달걀, 보리, 고구마, 소 판 돈들을 모두 나의 '학위' 받는데 몽땅 투자했습니다. 먹어보고 싶은 것 입어보고 싶은 것들은 몽땅 뒤로 하고 말입니다.

나는 그 모든 '고지서'(=청구서, bill)들을 천정에 눈에 쉽게 띄게 메달아 두시라고 했습니다. 언제가는 "꼭 돌아와서 갚겠습니다" 굳은 약속을 하면서...어머니의 굳은 살이 박히고 헤어진 손금으로 점철된 손을 움켜 잡으면서...

어머님의 운명 직전에 그 '고지서'에 대해서 물어봤습니다.

"그 고지서 어디 있습니까?"
"벌써 다 갚았다"
"아니, 언제 누가요?"

나도 모르는 새 누가 갚았단 말인가....어머님은 나의 '무능'을 아시고 몽땅 탕감해 주었습니다.

"어머님, 어디로 가시렵니까?"
"나 조상한테로 돌아간다"
그러고는 홀연히 떠나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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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는 메릴랜드 농장엘 갔었습니다. 아내가 잘 아는 노인분이 지난 겨울에 준 도라지랑 더덕 씨앗을 농장 한 귀퉁에 뿌렸답니다. 나는 장시간 운전해서 가느라 너무 피곤해서 '간섭'을 할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뿌렸어요?" "그냥 쏟아 부었지요" ...돌아오는 길에 봄비가 내렸습니다. 그 씨앗이 어떤 모습으로 싻이 틀 지는 보나 마나...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어디에 씨앗을 뿌렸는지 표시는 해 두었어요?" "그럼요..."

한 15 에이커 땅에다 한 줌도 안되는 씨앗을 한 귀퉁이다 뿌렸으니...밭은 동네 아저씨가 트럭터로 몽땅 갈아 놨더군요. 닭똥도 잔뜩 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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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떠나시기 전 동생에게 부탁하던 말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씨마농은 서늘한 그늘에 둬사 헌다...우영팥에 검질(김메기)은 누가 헐껑고?"
"나 죽으면 제사허지 않아도 된다."
"무사마씸?"(왜요?)
"죽은 사람은 먹으레 오질 않았져"

그렇다면 왜 어머님은 평생동안 조상제사를 지내다 가셨습니까? 자손들도 제사를 지내 줄 것으로 믿으시지 않았습니까?

그것보다도 어머님은 자손들이 제사지내느라 고생하는 것을 더 안타까워 하셨지요? 그래서 그만두라고 하셨지요?

어머님은 사람의 '혼'은 없다고 생각하셨지요.

평생동안 일찍 돌아가신 나의 아버님 꿈을 한 번도 꾼 적이 없었다고.... 즉, 꿈에서도 한 번도 만나보질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혼이 있다면, 니 아방이(너의 아버지가) 혼번(한번)만이라도 꿈에 싣꿨을 것이여 만은...'나, 영정허연(이런 저런 이유로) 죽었져'라고 골아줄 건디(말해 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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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우리 아방 시신은 지금 '백조일손' 공동묘역에 없는 것 같습니다. 3년전 늦가을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시신들이 더 암매장되었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재발굴을 시도했습니다. 50년 동안 자란 잡목들을 모두 뽑아내고 밑바닥까지 다시 파는 일을 했습니다만 잔뼈들만 들어났습니다.

그러나 수소문한 끝에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할아버님 어머님네가 1차로 발굴(1956년 5월)을 끝낸 후에 고철장사꾼들이 그 학살터에서 철근들을 캐내다가 별도의 곳에서 2구의 시신을 발견해서 인근 정씨 문중밭 기슭에 묻어줬다는 목격자들을 두 사람이나 만났습니다.

현장 검증을 시도했으나 잡목이 우거져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 두구의 시신은 나의 아버지와 앞집 '좌서기' 시신인가 봅니다.

[학살당일(1950년 8월 19일) 밤중에 집에서 잠을 자다가 불려나간 대정면사무소 직원은 나의 아버지와 좌서기였다. 예비검속되어 있지 않았고, 불려나가자 마자 20일 새벽 해병대에 의해서 총살되었다.]

언젠가는 꼭 찾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와 좌서기 말고도 50 여 구의 시신이 행방불명입니다. 산방산 기슭에서 "총알 세발씩 받고 쐈다"는 해병1기(당시 모슬포부대 분대장)는 김아무개씨를 서울에서 찾아내어 만나기도 했습니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어머님 날에 좋은 소식 전하지 못하고 우울한 과거를 들춰내서...

'50년의 한'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이제 풀어야겠지요.

그 '한'을 풀기 위한 '진실추구'라고 봐 주시기 바랍니다.

제주성내(제주시) 정뜨르 비행장에 묻힌 시신들고 건져내야 하고요...육지 형무소에 가서 두메산골 어디엔가 묻힌 시신들도 수습해야 한답니다.

할 일은 태산같고, 맘은 원이나 육신이 따라주질 않습니다.

나의 '고지서'를 언젠가는 갚아야 할텐데 갚을 길이 이젠 영영 없나 봅니다. 어떻게 하면 좋지요?

어머님, 그곳에서도 편히 계십시오.

이역만리에서 도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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