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바람에 날라버리는 인생의 기준 '노란봉지'

마을 뒤, 매립지에 놀이터가 생겼다.
겨울이어도 볕이 좋기에 일곱 살짜리 아들보고 놀이터에 가서 놀라고했다.
아이는 집에 놀러 온 친구를 데리고
"엄마, 다녀올게."하며 신이 나서 나갔다.
이층에서 보니, 심은 지 오래지 않은 소나무에 솔잎같은
햇살이 반짝이고 있다.

오래지 않아 아들이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왔다.
"왜 그냥 왔어?" 놀란 얼굴로 묻는 내게
"엄마, 노란 봉지가 없어져서 놀이터를 찾을 수가 없어."하며 울먹거렸다.

아들에게 차근차근 물으니, 지난번에 누나랑 놀이터에 갈 때, 낯선 길이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외우고 갔나보다. 조그만 키의 아이는 나름대로 놀이터의 위치를 기억하느라 기준점을 정했겠지.

그런데 그 기준점이란 게 하필 길가에 굴러다니던 노란봉지였던 모양이다. 그날은 돌아올 때까지 그 봉지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게 오늘까지 그 자리에 있을 리 없다. 아이는 노란 봉지에서 방향을 바꿔야 하는데, 아무리 가도 노란 봉지가 나오지 않자, 너무 황당하고 맥이 풀려 돌아오고 만 것이다. 울상인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길을 자세히 일러주곤 다시 가보라 했다.

끄덕이며 돌아서는 아이가 왠지 불안해 보인다.
내려다보니, 조그만 두 아이가 얘기하며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노란 봉지를 잃어버린 아이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걷고 있을까?

또 내가 기준으로 삼고 있는 가치는 정녕 노란봉지처럼 불확실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노란 봉지를 기준 삼아 걷던 아이는 어려움을 만나 담벼락이라든가, 벤취와 같은 좀 더 확실한 기준을 정할 것이고, 키가 더 자라면, 초록색 지붕이라거나 좀 더 멀리 있는 학교와 같은 것을 기준으로 위치를 정해 갈 것이며, 더 자라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머리 속에 있는 마을 지도를 펼쳐 위치 표시를 해 둘 것이다.

나이와 눈높이에 따라 위치를 정하고, 기준을 삼는 가치는 달라진다. 이제 돌아 보건데, 내 삶을 위치 짓는 기준점도 달라져서, 점점 높이 보고, 점점 멀리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가 아이의 눈높이에서 볼 수 있는 게 한정되어 있듯, 멀리 혹은 높이 본다한들 내가 산 세월 만큼이고,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일 뿐이란 걸 아이들에게 배운다.

내가 지금 최선이라 선택한 일도 먼 훗날 보면, 한심스럽게 느껴지게 될 때도 있을 것이고, 내가 옳다고 한 일도 다른 이의 기준에서는 옳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준만 옳은 것처럼 아집을 부리지는 않았던가?

볕은 좋아도 차가운 겨울 공기에 발갛게 달아진 얼굴을 하고 아이들이 돌아온다. 아이가 금새 자란 것 같다. “이제 노란 봉지 없어도 놀이터 찾을 수 있어?”하고 물으니, 아이는 끄덕이며 웃는다. 언 아이의 볼에 손을 대니, 얼음처럼 차다. 아이를 꼬옥 안으니, 내 삶의 기준 하나가 가슴 안에서 꼼지락댄다.

나는 정녕 이 아이들을 바르고 밝게 자라게 하는 바른 기준을 가졌는가? 어른으로서 이 아이들에게, 바람에 쉬 날아가 버리는 노란 봉지 같은 불확실한 기준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