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26)세화리 - 4·3희생터다랑쉬굴

▲ 다랑쉬굴 찾아가는 기행팀 ⓒ김은희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굴은 제주4·3사건 당시 토벌대의 토벌작전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모여 지내던 굴이다. 그러나 굴은 토벌대의 손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지고 말았다.

1991년 처음 굴이 발견되었을 때, 제주4·3사건 당시 희생된 유해들이 가지런히 누워있었고, 그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보여주는 부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두 개의 큰 무쇠솥에는 밥과 국을 앉혔을 것이고, 항아리에는 물이나 간장, 대나무 차롱에는 채소들이 올려져 있었을 것이다. 좁지만 잘 갖춰진 부엌에서 이들은 밥을 먹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굴을 알게 된 건 1991년 12월, 제주4·3연구소 ‘잃어버린 마을’조사팀으로 다랑쉬 마을을 조사하러 가서였다. 대나무밖에 남아 있지 않은 마을 터를 안내하던 문모 할아버지께서 “이 근처 굴에는 4·3사건 때 찾아 가지 못한 뼈들이 있다. 그 굴을 찾아주마.”고 하며 우리 일행들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다. “그 굴 토벌작전에 나도 참가했는데,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사람들을 질식케 했다.”고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끝내 우리 일행들에게 굴을 찾아주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귀신의 부름인지, 도저히 굴이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 다랑쉬굴이 있었다. 유해 11구. 처음 들어간 굴에 10구, 좁은 통로를 따라 더 들어가니 한눈에도 부엌임을 알아 볼 수 있는 곳에 1구가 더 있었다. 이후 4·3연구소에서는 고고학에 이청규 교수, 신경정신과의 전신권 원장 등을 초빙하여 감식을 의뢰했다. 결과는 아이 1명과 여성 3명, 남자 7명이라고 했고, 제주4·3사건 때 것이 확실하다는 거였다.

1992년 3월 다랑쉬굴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제주도는 물론 전국이 들썩했다. 말로만 듣던 제주4·3사건의 실상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구좌읍 세화리 사람들을 만나면서 굴 토벌 과정이 밝혀졌고, 종달리 채정옥 어르신은“ 굴 안에서 벽에다 코를 박고 죽어 있던 시신들을 정리했다.”고 증언했다. 채 옹은 이들의 이름을 적고 다니다가 종이를 잃어버렸지만 누구인지 기억한다며 알려 주었다.

그러나 유해의 주인인 유족들의 표정은 밝지가 않았다. 주눅든 표정들이 역력했다. 그 당시만도 그랬다. 어떤 주장도 하지 못하고, 혹시나 돌아올 해코지가 더 두려운 때였다. 경찰 쪽에서 화장을 권유했고, 이어 장례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랑쉬굴의 유해는 급히 꺼내져 화장하고, 유족들은 재로 변한 유골을 안고 종달리 바다에 나가 통한의 눈물을 감추며 뿌려야 했다.

이후 다랑쉬굴은 무거운 바윗돌로 입구를 막은 채 20년이 지났지만 제주4·3사건을 생각하는 기행팀이 자주 찾아 가는 곳이다. 굴 입구에는 제주민예총에서 세운 아담한 비석도 있다. 2008년에 개관한 4·3평화공원에는 다랑쉬굴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여 재현해 놓았다.

다랑쉬굴의 희생자는 강태용(당시 34세), 박봉관(당시 27세), 고순환(당시 27세), 고순경(당시 25세), 고태원(당시 25세), 고두만(당시 21세), 함명립(당시 21세), 김진생(당시 51세·여), 부성만(당시 24세·여), 이성란(당시 24세·여), 이재수(당시 9세) 등으로 밝혀졌다. / 김은희

* 찾아가는 길 : 평대리 비자림 입구 → 다랑쉬오름으로 1km → 활공장 →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마을’ 표석 → 동쪽 시멘트 길 500m → 억새밭 가운데 위치

<본 연재글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엄격히 금지합니다. 본 연재글의 저작권은 '제주발전연구원'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