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스님의 편지] 그 시절 기억은 순수한 영혼 그대로…

▲ 보리밭 ⓒ 사진 오성 스님

보리가 익어갑니다.
누런 물결이 들판의 바람을 따라 흔들리면
나의 마음도 따라 흔들거립니다.

유년의 보리나라에서
‘삐-- 삐-’ 길고 짧은 보리피리를 불며
학교를 가던 그 아이를 기억하십니까?
고령의 분들은 배고픈 절박함이 생각나시겠지만
내겐 마냥 즐거운 시절이었습니다.

▲ 보리밭 ⓒ 사진 오성 스님

보리를 수확하고 나면 짚단으로 ‘눌’을 쌓습니다.
어른들은 불 지필 요량이지만
우리들에겐 그보다 좋은 놀이방이 없었습니다.
눌 밖에 몇 개와 안쪽에 좀 더 많은 짚단을 빼내면
우리들만의 아지트가 만들어졌습니다.
더러 너른 공간을 확보하려고 너무 많이 빼서 무너지는 날에는
마음씨 좋은 삼촌을 모셔와 복원을 해야 하는 수고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곳은 몇몇의 절친한 친구들만이 알았고
혹여 나중에 알게 된 한, 둘은 섭섭함으로
심통을 부리거나 어른들께 일러 혼나게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섭섭함을 경계로 비밀이 형성되었습니다.

▲ 오성 스님
밥 몇 숟가락을 그릇이나 봉지에 떠서 ‘개역’을 넣고 흔들면
고소하고 든든한 간식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딱지를 들고 방과 후나 주말에는
약속하지 않아도 하나 둘 우리는 그곳에 모였습니다.
가끔 다툼이 생겨 서먹한 관계에 놓인 친구끼리도
비오는 날에는 스멀스멀한 습기처럼 슬그머니 기어들어와
개역을 한 숟가락 나눠 먹고
흑인처럼 두툼해진 입술로 웃으며 통통한 배를 두드리고 나면
아이들의 마음은 비 개인 후 무지개로 피었습니다.

우리들에겐 얼마 되지 않은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나 둘 생겨나는 흰 머리, 주름진 이마
처진 어깨에 회복되지 않는 뱃살을 한 중년이 되어
가져도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물욕과 불안한 마음 안에
그 유년시절의 기억은 순수한 영혼 그대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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