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사랑의 사진·편지 공모전 수상작

나의 디딤돌 같은 남편에게..

새벽 2시반 이면 당신이 전쟁터로 나간 흔적과 아침이면 학교로 향한 우혁이의 흔적들이 방안이며 거실 여기저기 널려져 있고 그 어지러움 속에서도 행복했던 시간과 힘들었던 아픈  추억을 되살리면서 커피를 마시고 당신을 생각하면서 두서없이 감사함을 전해 봅니다.

우혁아빠..

당신과 나의 운명적인 만남이 96년 4월 장애인의 날이라는걸..

세상에 태어나 땅 한번 짚어보지 못한 채 장애인으로 태어나 늘 집안에서만 살아오던 나를 구출해준 사람이 당신이지요.

친정이 섬 안이라 방안에서만 살아오다가 바람도 쏘일 겸 장애인의 날 행사에 참석을 한 게 아마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지요.

당신은 어느 장애인 차량봉사를 하러 나왔다가 내 덫에 걸리고 말았지..

그때의 내 나이는 29살 이었고, 당신은 40대 노총각 이었죠.

당신은 나의 활발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는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나의 두 다리의 역할과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겠다면서 연락이 왔었죠.

걷지 못하는 나는 집안에서만 생활 해 온 탓인지 결혼이란 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고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살아야만 했어요.

그래서 평생을 부모님과만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 밖에 하지 못했던 걸 당신이 내게 깨우쳐주었어요. 당신의 청혼은 큰 두려움과 충격 이었어요.

당신은 나의 두 다리가 되어주겠다면 추자도 섬까지 와서 부모님께   “미현이의 두 다리 역할도 하며 고생시키지 않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며 무릎을 끊고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을 때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었고 큰 용기가 생겼어요. 당신의 끈질긴 노력으로 부모님은 허락을 하셨고, 그때부터 우리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죠. 방 1칸짜리 월세 방부터 시작한 우리는 부모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어서기 위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고 아주 기본적인 몇 개의 살림 도구만 준비해 살다가 하나씩 우리 힘으로 마련해 보기로 하자고 우리의 새로운 삶의 전쟁이 시작했었지.

당신이 일을 나가고 나면 혼자 덩그마니 남아 라디오와 티브이가 친구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친정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낯선 곳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야 하는 신혼 생활이 내게는 너무 힘들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순간에 나의 몸속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말았어. 생명을 잉태했음에도  나 같은 장애아가 태어날까봐 두려움이 먼저 앞섰고, 걷지도 못하는 내가 이 몸으로 기어 다니면서 도저히 아이를 키워 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으로 근심하고 있을 때 당신의 끈질긴 사랑과 격려로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잖아요.

아이를 가지면서 몸이 워낙 작아서인지 모든 게 다 힘이 들었어요. 더구나 남의 집 셋방살이에 임신을 하고 나니 몸이 무거워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화장실 문제부터 시작해서 욕실과 병원나들이 문제까지 어려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그러다보니 자꾸 당신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고 짜증만 내고 후회도 많이 해보고 행복했던 신혼시절은 잠시 뿐 새로운 생명으로 인한 불안과 초조함 그로 인해 힘들었던 시간들이 모든 것이  힘겨운 연속의 시간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힘들었던 시간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대한 삶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는가 싶어요.

그 어려운 문제들을 당신이 포기하지 않고 하나씩 다 해결해 주었고 몸도 마음도 다 편안하게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었어요.

당신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1년이란  세월이란 흘렀네요.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므로 마음의 위로가 되고 부자가 된다는 말 들은 적도 있어요. 가진 것은 없어도  행복한 사랑을 한 몸에 다 받으니 세상 부러울 게 뭐가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힘들었던 일 언제 지나갔는지 이젠 그 기억도 가물가물 해지네요.

힘든 기억은 빨리 잊어지고 행복하고 좋은 순간들은 오래 간다고 했던가?

우혁이를 낳아서 키우는 일부터 가정의 모든 일들이 당신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늘 내 옆에서 큰 울타리가 되어주고 큰 소나무가 되어 주었던 남자가 바로 당신이예요. 당신 기억나요? 걷지 못한 나를 바람 쏘여준다고 봄이면 가족을 데리고 서귀포로, 한라산으로, 꽃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고, 일요일이면 늦잠도 자지 않고 헌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새벽이 채 가시지도 않은 어둠을 뚫고 조용히 고사리를 꺾으러 산으로 향했던 당신은 온 몸이 가시에 찔려 여기저기에 피멍이 들었음에도 고사리를 한광주리 들고 들어와 횐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으며  고사리를 내려놓고는 "우리 이것 말려서 장인어른 제사 때 쓰라고 보내주자" 며 혼자서 삶고 말리고 했었잖아요.

가을이 오면 단풍색깔에 취해 어디든 가 보자며 산업도로로 달리고 바닷가 보이는 해안도로에서 길 다방 (자판기) 커피가 맛이 있다며 바다가 보이는 해변 가에 서서 커피를 마시는 당신의 모습은 세상의 그 어떤 남자들보다 멋있고 듬직해 보였어요. 전혀 걷지 못한 나를 업고 오일시장과 계단이 있는 곳도 힘든 내색 하나 없이 구석구석 구경을 시켜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당신이 있었기에 나는 행복할 수가 있었던 거예요. 11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하지 않는 마음 하나로 늘 나에게 등불이 되어준 당신이예요.

비록 장애의 몸으로 정상적인 육신을 가진 이들보다 조금은 어둔하고 불편한 것들이 많지만 우리 작은 임대아파트에서 풍족하게 살지는 않지만 마음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넉넉한 부자로 살아가고 있잖아요.

당신은 늘 말하잖아요. “우리 가진 것 없어도 지금 이대로 거짓 없이 행복하게 살자 ”

나보다 12년이나 나이가 많은 당신과 띠 동갑으로 살고 있는 우린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그렇게 변함없이 살아가요..여보 난 두 다리는 걸을 수 없지만  당신이 있기에 우혁이가 있기에 ..너무나 행복해요..사랑해요...

김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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