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미의 제주여행(17)] 화산박물관, 비양도 여행

   
한림항에서 하루 두번 다니는 자그마한 도항선을 타고 뱃길로 15분, 아직은 외지인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아 자연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을 법한 섬.

협재해수욕장의 하얀 모래를 앞에 두고 검푸른 남해 바다를 등에 지고 홀로 떠 있는 섬, 비양도. 제주에서 가장 늦게까지 화산활동이 있었던 그 섬으로 지질 공부를 하러 떠났다.

자연의 모습을 찾아….

   
비양도는 협재리에서 마주 보이는 북쪽 해안의 포구인 '압개(개창)'포구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동서의 길이가 1,020m, 남북의 길이가 1,130m로 거의 원형에 가까운 섬 중앙에는 해발 114m의 비양봉이 솟아있다.

비양도는 해안선의 길이가 3.5km인데 비양봉의 둘레가 2km나 되는 그야말로 섬자체가 하나의 오름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양도의 관문인 압개포구는 '개창'이라고 하는데 '船艙'이라는 뜻을 지닌 제주어이다.

포구는 조간대 상층에 자리하기 때문에 썰물 때는 그 안으로 배가 드나들 수 없다.
그럴때는 배를 바깥에 매어두어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그래서 안쪽 칸살을 '안개창', 바깥을 '밧개창'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섬사람들은 개창으로 밀려드는 모진 동남풍을 두고 '삼부새'라고 한다.

옛날 '삼부새'가 거칠게 일 때는 '안개창'에 배를 들어 놓고, 칡줄 따위로 감아, 여기저기에 묶어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개창 보다 더 넓고 큰 방파제를 만들어서 전천후로 이용하고 있으니, '삼부새'는 옛말이 되어 버렸고, '안개창'은 보잘것 없는 뱃자리가 되어 버렸다.

   
비양도는 언제 생성되었을까?
압개포구에 내려 방파제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폭낭 그늘팡 앞에 2002년 7월21일 세워진 '비양도 천년기념비'가 있다. 그럼 비양도가 1002년에 솟아났다는 얘기이다.

비양도 생성에 관한 기록은 조선 중종 25년(1530년) 「신증 '동국여지승람' 38권」에 고려 목종 5년(1002년)과 10년(1007년)에 해중에서 화산이 분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일본인 학자 나카무라(1921)가 처음으로 제주도의 화산지질을 조사하면서 비양도로 추정한 것이다.

그런데 비양도 남서쪽 해안단애의 표토층으로부터 신석기 시대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이 토기편은 '압날점렬문토기'로서 4,000∼5,000년전 시기의 것이다. 또한 耽羅시대(2000년 前 추정) 유물인 적갈색토기 등도 다수 발견되었다. 이처럼 비양도의 생성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연구결과 제주도에서 가장 최근에 형성된 화산섬인 것 만은 틀림이 없다고 한다.

그럼 이 섬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
비양도는 한림항에서 북서쪽으로 3km, 협재리에서는 1.5km 떨어진 곳이다. 무인도였던 비양도 일대는 대나무가 무성하여 대섬(竹島)이라고도 불렸었다. 조선조 고종13년(1876년)에 徐氏가 제일 먼저 입주하여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협재리 거주 윤씨(尹氏)가 정주하면서 동남쪽의 비탈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부업으로 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비양봉은 높이가 114m로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으며 두 개의 분화구를 가지고 있다.
마을에서 '비양봉산책로 가는 길' 표지판을 따라 오름의 남서사면으로 가면 풀밭에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어렵잖게 산위의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무인등대가 서 있는 봉우리가 주봉이며, 남사면에 있는 큰 분화구(큰암메)는 깊이가 79.8m인 깔때기형 분화구로 남쪽으로 활짝 열려 있다.
주 분화구 북쪽에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또 하나의 깔때기형으로 깊이가 26.5m인 작은 분화구(족은암메)가 있다. 토질은 화산쇄설물인 스코리아(송이)로 구성되어 있다.

   
오름은 대부분 해송이나 새밭으로 이루어져, 중산간오름에서 볼 수 있는 음침하고 칙칙한 삼나무숲이 없는 때묻지 않고 수수한 오름을 만끽할 수 있다.

남사면과 일부 사면 기슭에는 푸른 대나무숲이 보이는데, 죽도라 했을 만큼 대나무가 무성했던 것이 화살대로 공출하는 심한 부역을 견디다 못해 불질러 버렸다는 옛이야기가 가슴에 닿는다.

주봉에서 북쪽으로 염소가 다니는 길을 따라 사면을 가로지르면 오름 능선을 통해 족은암매로 이른다. 족은암매 분화구 안에는 이 곳에만 자생하는 비양나무가 있어 제주도기념물 제4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빙 둘러 철조망이 처져 있는 그 곳에는 사방이 아름드리 해송으로 우거져 있다.

   
비양도는 고려시대 중국에서 날아와서 생겼다는 전설이 있고, 한라산에서 봉이 하나 날아와서 생성되었다고 해서 비상의 섬(飛翔의 島)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오름을 한 바퀴 돌아내려 다시 마을 퐁낭 그늘팡으로 돌아와 잠시 흐른 땀을 식힌다.

같은 배를 타고 온 어떤 가족은 벌써 섬을 한 바퀴 돌고 오름까지 오르고는 섬을 떠나는 배를 찾고 있었다.

도항선이 오려면 아직도 세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낚시를 하거나, 아니면 섬의 구석구석을 찬찬히 둘러 보려고 작정하지 않는 한 비양도는 참 체류시간이 짧은 섬이다. 하긴 제주도의 부속섬 어디를 가도 1시간 남짓이면 걸어서든 아니면 차를 이용해서든 돌아볼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바다 풍경, 오름 풍경만 바라 보며 지나지 말고, 옛지명이나 민속유적이 있는 곳, 아니면 있었던 곳에 안내판을 세워 한번씩 읽고 가도록 하면 역사나 민속도 공부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되지 않을까?
그늘팡 역시 안내판을 세우면 무심코 지나치지 않는 하나의 장소가 되지 않을까?

   
지금은 할머니들이 보이지 않는 그늘팡에서 잠시 땀을 식히고 서쪽으로 섬 일주를 시작했다.

그늘팡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안개창'에 마을회관이 있고 그 뒤에는 바닷물이 빠지면 나타나는 코지에 등표가 서 있다. 그 코지를 '오저부리'라 하고 오른쪽의 '낭시끄는코지' 사이에 '원'이 하나 있었다.

그 원으로 가는 바닷가에 조그마한 집 한 채가 있고, 그 집 마당에는 바다로 직접 통할 수 있게 한쪽 담을 터 놓았다.

"할머니, 저기가 원 이서난디우꽈?"
"맞수다, 하르방 살아 이실땐 멜도 하영 들어신디, 이젠 젊은사람들 세상이주!"
무언가 부지런히 손을 놀리시던 할머니는 일손을 멈추지 않은채 나그네의 질문에 대답을 한다.

'너부배원'은 긴둥근꼴로 60여m의 담으로 막아 만들었는데 매년 3, 4월에 공동으로 보수를 했지만 지금은 흔적만 보잘것 없이 남아 있다.  집 담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경사져 원까지 이어졌을 갯것은 해안도로를 만들며 중간을 높게 쌓아 버렸다. 멀리 멜 잡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보기좋게 쌓아 놓은 돌담에 가려져 버렸다.

   
너브배원을 지나 조금 가면 전경초소가 나오는데 그 곳 해안단애에서 신석기시대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지금은 해안도로를 만들며 절개지를 모두 돌로 쌓아 막아버렸다. 어차피 출토 된 유물은 박물관으로 갔을 터여서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겠지만 아쉬움을 뒤로할 수 밖에 없다.

   
전경초소를 조금 지나면 마을에서 큰가지와 족은가지라고 부르는 코지가 있다.
제법 높직한 바위돌로 이뤄진 곶부리 사이에 '테매는개'라는 포구가 있었다.
통나무 여럿을 이어붙여 만든 배를 '테우' '터우'라고 하는데 '테'를 매어두던 뱃자리였기에 '테매는개'라고 한다.

지금은 하나의 바다밭 이름으로만 전해질 뿐, 뱃자리로 쓰이는 일은 거의 없다.

   
큰가지와 족은가지 주변은 고구마 모양의 커다란 암석 덩이들이 나타나는데, 이 암석 덩이가 화산 분출 때 나온 화산탄(volcanic bomb)이다.
화산탄의 크기는 4m에 이르기도 하는데, 무게는 대략 10톤 정도로 추정된다.
화산탄은 분석구를 형성하는 화산활동 기간 중에 터져 나와 화구주변에 쌓인 것이다.

층리를 보이는 분석구의 일부가 도로변에 남아있고, 층리가 화산탄 분포지 반대쪽으로 경사를 갖는 것으로 보아 분석구의 대부분은 바닷물에 의해 깎여 나가고, 무거운 화산탄만 그 자리에 남겨진 것이다.

지금의 비양도를 이루고 있는 분석구 외에 또 다른 분석구가 비양도에 있었고, 바닷물이 거대한 분석구 하나를 전부 깎아 버렸다는 얘기이다.
이미 깎여 나간 분석구의 외곽부에 해당하는 분석층이 층리를 갖고 도로변에 분포해 있다.

   
큰가지 부근에는 높이 20m에 달하는 해식구가 있다.
마을 사람들이 '코끼리바위'라고 부르는 해식구는 파도의 차별침식에 의해 고립되어 형성된 암석 덩어리로 해식동굴이 있고, 새들의 배설물로 윗부분이 하얀색을 띄고 있다.

   
비양도는 용암분출에 의해 형성된 비양봉조면현무암과 분석 분출에 의해 형성된 비양봉 분석구로 구성되어 있다.
도로 주변의 해안절개지에서는 붉은 색과 검은 색의 스코리아(송이)층이 동시에 보인다.

   
섬의 북쪽 해안은 여러가지 화산활동 생성물들을 볼 수 있는 화산박물관이다.
그 곳에는 섬 사람들에게 '애기업은 돌'이라고 불리는 암석이 있다. 이것이 비양도에서만 볼 수 있는 호니토(hornito)이다.

호니토는 용암류 내부의 가스가 분출하면서 만들어 놓은 분기공으로 내부는 비어있다. 큰 것은 직경 1.5m, 둘레 4m, 높이 4.5m에 이르며 주변에 40여개의 호니토가 분포하고 있다.

'애기업은 돌'에는 아주 오랜 옛날에 아기를 업고 밴 해녀가 뭍으로 나간 남편은 기다리다 굶주림에 지쳐 김녕 쪽을 처다 보다가 죽고 말았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 이 곳에는 동쪽에 '큰원', 서쪽에 '족은원'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듬북만 가득할 뿐 '원'은 없다.

   
비양도를 처음 내려서면 볼 수 있는 안내표지판에 '수석관람지'라고 되어 있는 곳, 바닷가로 내려 가지 않아도 다양한 화산 생성물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받침대까지 만들어 놓은 친절함(?)에 가슴이 저려온다.

멀리서 차를 타고도 또 배를 타야 올 수 있는 손님들을 위한 작은 배려가 이 곳에까지 상륙한 것인가?
아니면 바닷가에서 자연을 관찰하다 다쳐 중상을 입었다는 보도를 접한 것일까?

   
자갈이 곱게 깔린 해변을 싹뚝 잘라서 해안도로를 만들었다. 해안도로 바깥의 물을 그나마 깨끗하게 보이지만 안쪽 자갈밭은 검게 죽어 있었다.

비양도를 한바퀴 도는 몇 시간 내내 차나 경운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해안도로는 트럭 한 대는 거뜬히 다닐 수 있게 넓게 만들어 놓았다.
해안도로는 주민에게 어떤 편리함을 가져다 주고 있을까? 그 용도가 궁금하다.

   
자연생태 관찰 학습장, 펄랑.
길이 500m, 폭 50m, 수심 1.5m의 반달형 염습지로 바닷물이 출입하는 습지이다.
10억원이라는 많은 돈을 투입해 '생태관광연못'으로 조성한 곳이다.

   
그 곳 '펄랑'의 한 귀퉁이에 안내표지판이 무거운 몸을 돌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돈이 모자라 미처 받침대를 세우지 못한 것일까?

   
주민들의 마음의 안식처인 포제단과 당이 펄랑이 시작되는 곳에 있다. 당에서는 해마다 영등굿을 한다. 사철나무를 神木으로 삼고, 紙錢, 物色, 명사(命絲) 등을 걸어놓고 있다.

堂神으로 '종남머리 술일한집'을 모신다. 이 신은 비양도 사람들이 生産, 物故, 戶籍을 관장하며, 祭日이 매 술일(戌日) 곧 '개날'이어서 '개당'이라고 한다.
금릉 또는 옹포에서 가지갈라온 당이라고 하며, 옛날에는 지나가는 배도 와서 제를 드리고 갔다. 그래야만 고기도 많이 잡고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비양도에서는 1990년대부터 농사는 거의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예전엔 보리농사가 주였고 그 중에서도 맥주맥을 주로 하였다고 한다.

소똥이 추잡하고 나물 같은 것에 피해를 주므로 비양도 천년행사 때 전부 없애도록 하여 지금은 소도 없다. 그러나 염소는 키우고 있었다.
비양봉 기슭에 놓아 먹이는 염소는 비양봉 등산로 여기 저기에 배설물을 남겨 놓았고, 그 위에는 파리들이 놀고 있었다.

윤경(輪耕)하여 쉴 때 소를 놓아먹이지 말도록 하는 신호로 대를 몇 개 밭에 꽂아 놓으면 누구도 그 밭에 소가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마소 진입금지의 표지인 이 대를 '종'이라 한다. 비양도에는 염소를 들이지 말도록 '종'을 꽂아 놓았다.

   

펄랑에서 발전소 앞으로 나오면 마을의 동쪽 끝자락에 도착한다. 그러면 비양도 여행은 끝이 난다.

비양도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도항선에 오른다.
점점 멀어져 가는 섬에서 아쉬움의 흰포말이 나를 따라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하루를 소비하며 섬에 들어 간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나오는 것일까?
하얗게 포장된 해안도로일까?
바다를 떠나 육지에 오른 화산탄일까?

※ 양영태님은 '오름오름회' 총무, 'KUSA동우회 오름기행대' 회원입니다. 이 글은 양영태님의 개인 홈페이지  '오름나들이(ormstory.com) 에도 실려 있습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