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 메이커(Change Maker)

사회적 起業家 … 체인지 메이커(Change Maker)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어업을 혁신해 산업으로 의미를 갖게 만드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가라면 어업 혁신에 관심을 갖는 게 마땅합니다. 사회 전체를 바꾸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바로 혁신가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회적 기업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져오고, 다른 이를 혁신가로 변화시킵니다. 이들은 창조적 파괴자이며, 새로운 모델의 소개자이며, 역할 모델이기도 하지요. 마이크로크레디트를 구현해 노벨 평화상을 받은 무하마드 유누스도 아쇼카재단이 지원했습니다. 지금 유누스는 세계를 바꾸는 사회적 기업가의 역할 모델이 되어 있지요. 아쇼카재단의 비전은 이런 혁신가의 비전을 모든 사람이 갖는 사회(Everyone a changemaker)를 만드는 겁니다. 혁신가의 정신은 여러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데, 이를 사회 문제 해결에 적용하는 게 사회적 기업가 정신입니다.”
 
  전 세계 100만명이 넘는 사회적 기업가의 롤 모델(role model). 사회 혁신을 꿈꾸는 이들이 하나같이 ‘구루’(guru, 스승·지도자라는 뜻)로 추앙하는 사람. 지난 6월초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아쇼카재단 창립자 빌 드레이튼이 말하는 사회적 起業家의 정의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바꾸는 체인지 메이커(Change Maker), 사회적 起業家... ‘좋은 일도 하고 돈도 버는’ 걸로 좁아져 버린 우리네 사회적 企業家와 비교하면 너무나 아쉬운 대목입니다.
 
 나이팅게일, 사회적 기업가의 원조

   
1850년대 크림전쟁에서 수많은 영국군의 생명을 살린 ‘등불을 든 여인’ 나이팅게일. 오늘도 간호사를 꿈꾸는 모든 학생들이 ‘백의의 천사’로 동경해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이팅게일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잘 모르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나이팅게일이 간호 현장에서 직접 활동한 건 고작 4년 남짓.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간호학교를 나온 뒤 7년이나 지난 1853년, 서른 세 살의 나이로 런던에 있는 환자간호여성회에 수간호사로 취업해서 이듬해 가을 크림전쟁이 한창이던 흑해 북부해안 스쿠타리 야전병원에서 종군했던 1856년까지입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간호사라기보다는 공중위생과 병원에 관한 한 탁월한 행정가로 이름을 떨칩니다.  

나이팅게일의 눈에 비친 야전병원의 실상은 한마디로 목불인견(目不忍見). 운영체계가 무너진 군 병원에 수용된 2400명에 가까운 환자와 부상병들... 공간이 부족해 간이침대가 6킬로미터씩 늘어서 있고 환자들은 때에 찌든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기본적인 수술자재나 의료자재가 없는 건 물론이고, 병원 막사에는 쥐와 벼룩이 득실거려 콜레라와 티푸스, 이질 같은 풍토병에 걸린 사람 둘 중 하나는 죽어나갔습니다.

나이팅게일은 도착해서 얼마 후 야전병원 운영체계를 근본부터 뜯어 고칩니다. 그녀는 모든 실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문서화 시스템을 도입하고 새 부엌과 세탁실을 마련했으며 병사들의 위생을 철저히 관리했습니다. 또 밤마다 병실을 돌면서 ‘부드럽고 은은한 목소리’로 병사들을 다독입니다. 나이팅게일은 읽고 쓸 줄 모르는 병사들을 가르치기 위한 영어수업과 몇 가지 교양강좌를 마련하고, 독서실과 여가오락실 등을 개설했으며 심지어 병사들이 월급을 고향으로 송금할 수 있는 제도까지 갖추는 파격을 감행했습니다. 그 결과, 스쿠타리 야전병원의 사망률은 1855년 2월 43%에서 3개월 만인 5월 2%로 뚝 떨어집니다.

종전 후 국가적 영웅이 되어 귀국한 나이팅게일. 그녀는 800쪽에 달하는, 군대 내 각종 질병과 사망을 야기하는 원인에 대한 광범위한 보건 통계자료인 <영국군의 건강, 능률, 병원운영에 관한 견해>를 손에 들고 군대위생 관리 실태를 바꾸기 위해 온 몸을 바칩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영국군 당국은 의료교육기관을 신설했고 전국의 군대막사를 뜯어 고쳐, 2년 반 만에 영국 내 군인 사망률은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나이팅게일은 30대 이후 내내 열병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이후 1910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녀는 55년간 줄곧 제대로 서있기 힘들 만큼 심한 현기증을 달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생애를 통해서 나이팅게일은 1만 2000통의 서신과 200권의 서적, 각종 보고서와 논문을 쏟아냈습니다.

마침내 나이팅게일은 1860년 일반인들의 지원을 받아 ‘나이팅게일 간호사 양성소’를 설립합니다. 그전까지 간호사란 ‘상스럽고 무례하고 지저분하고 종종 성격 까칠한 나이 많은 여자’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는 가정에서 윤리의식을 익히도록 하는 한편,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도록 했습니다. 이를 통해 간호가 현대적이고 존경받을 수 있는 직업으로 변모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된 겁니다. 결국, 인구 통계 조사의 직업 목록에서 줄곧 ‘집안일’로 분류되던 ‘간호일’이 ‘의료’ 직업군에 포함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텁니다. “내 머릿속에 처음 떠 오른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 모두 간호 일이었다.”라고 나이팅게일은 말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나이팅게일이 상냥하고 온화한 여성일 거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누구든 나이팅게일을 행정관이나 통계학자, 로비스트로 그리긴 힘들 겁니다. 더구나 그녀를 ‘기업가’로 생각하는 건 생뚱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간호사들에게 미래를 열어준 것 외에도, 나이팅게일은 위생관리 및 병원운영에 관한 기준을 처음 정비했으며 이것이 세계적 표준으로 정착되었습니다. 그녀가 행한 모든 일이 건강관리 자원의 생산성 또는 효율성을 증대시켰다는 점에서, 나이팅게일이야말로 사회적 起業家에 정확히 들어맞는 인물입니다.
 
 간병인, 아무도 돌보지 않는 '돌봄 노동자'

   
“언제나 환자 곁에 있어야 해서 밥 먹으러 갈 시간도 없어요. 집에서 싸온 밥 한 덩어리를 환자 옆에서 급하게 먹는 게 고작이죠. 왜 사서 먹지 않냐고요? 시간당 2천500원 버는데 밥 사먹을 돈이 어디 있나요. 24시간 일을 하고 일당 6만원 받아요. 그렇게 온종일 환자를 돌보느라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밤에도 일을 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자서 늘 몸이 성칠 않죠. 그래도 산재 같은 건 꿈도 못 꿔요. 간병인은 유료소개소를 통해 환자-보호자에게 고용된 처지라 근로기준법 적용도 안 되니 8시간 노동, 휴일 휴가, 퇴직금, 법정수당, 최저임금, 산재보장은 그림의 떡이죠. 사실은 병원직원이나 다름없지만 법적으로 간병인의 자리가 보장되지 않으니, 병원에서 우리는 유령이나 다름없는 처지예요.”

 올 초 102주년을 맞은 3.8 세계여성의 날 전국대회에 나선 어느 간병노동자의 절규입니다. 제주는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 하지만 간병인으로 대표되는 돌봄 노동 종사자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근로자가 아닌  건 매한가지. 당연히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돌봄 노동자’, 간병인. 더 이상 간병노동 종사자들을 모호한 법적지위 상태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8시간 노동, 최저임금과  퇴직금 보장, 산재적용과 같이 너무나도 기본적인 권리는 보장돼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간병제도의 건강보험 급여화, 간병노동자 직접고용이 필요합니다. ‘보호자 없는 병원’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돌봄 노동이 사회적 직업으로 당당히 대접받는 그 날까지...

   
전통 사회에서 돌봄은 노동으로서의 의미보다 여성의, 혹은 어머니로서의 의무요, 책임으로 마땅히 감수해야 된다고 치부돼 왔습니다. 그러나 고령인구의 증가와 가족 구조의 변화, 그리고 여성의 노동 시장 진출 등으로 더 이상 여성에게 어머니의 의무를 당연시하며 돌봄 노동을 강요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회 서비스는 이러한 변화에 근거한 사회적 요구와 필요에 의해 시작된 겁니다.

 요즘 정부는 사회서비스를 통하여 일자리 창출에 앞장섰으며 고용취약계층인 여성과 중·고령자에게 적절한 일자리를 제공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일자리가 마련되고 여성들이 돌봄 서비스에 뛰어든 건 맞습니다. 돌봄 노동이 전통 사회에서 여성들의 몫이었듯이 노동 시장에서도 여성들의 몫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 서비스는 전통 사회 가정 안에서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당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현대 사회에서 여성에게 그대로 강요하는 형태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돌봄 노동의 사회화라는 시대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시장 위주로 확대되는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사회복지가 그러하듯 사회서비스도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며 또한 사람이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때문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교육, 환경, 노동 조건 등은 전적으로 서비스의 질적 수준을 결정하거나 중대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결국 이들에 대한 안정적 고용과 최저 임금을 보장하는 건 필수불가결. 돌봄 노동은 우리 사회의 생명을 돌보고 삶을 가능하게 하는 가치 있는 노동입니다. 돌봄 노동이 사회적 직업으로 당당히 대접받는 그날을 기다려 봅니다.
 
 
 나이팅게일. 그녀가 그립습니다.
150년이나 지난 오늘, 그 당시 간호사들만큼이나
똑같이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들의 처지가 너무나 고달프고 안쓰럽기 때문입니다.
아니 맨땅에 헤딩하듯 자활이란 이름을 달고 간병사업을 시작한 지 10년,
어쩌면 나이팅게일 같은 사회적 起業家가 있어
간병인이 우리 사회에서 직업인으로서, 노동자로서 당당히 살아나갈 길을
열어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엊그제도 갑작스런 사고로 입원한 어머니를 정성껏 간병해 줘 고맙다는
환자보호자의 따스한 한 마디를 들으며 괜시리 눈시울만 뜨겁습니다.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2010년 7월 18일 아침에, 사무실에서 보냅니다.
강종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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