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군대환(기미가요마루)

무정한 군대환은 무사 날 태워 완, 이 추룩 고생만 시켬신고
청천 하늘엔 별도 많치만, 내 몸위에는 고생만 많구나
이 몸은 이 추룩 불쌍허게, 일본 어느 구석에 댁겨지고
귀신은 이신건가 어신건가, 날 살리잰 올건가 말건가
나신디 날개가 이서시문 나랑이라도 가구정 허건만,
날개가 어신것이 원수로다

옛날 재일동포들이 일에 힘들고 고향생각에 눈물이 날때 불렀던 이 노래. 제주도에서 옛날부터 불리워 온 「청춘가」에 일본판 가사를 붙친 이 노래. 뼈에서 우러나오는 그 괴로움과 눈물이 지금도 보이는듯 하다.

현재 제주도 인구 약55만명, 재일동포 약60만명중 제주도가 본적지 사람 약10만명. 그중 상당수가 오사카(大阪)에 살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일본 오사카에 오게 했으며, 또 무엇이 그들을 태워 왔는가.

그들을 태워서 온 배는 군대환(君が代丸 기미가요마루) 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탔었었고, 우리 아버지가 탔었던 배이다.

해방 후 한참 뒤에도 군대환이란 배 이름은 제주도에 남아 있었다. 1955년 출생인 필자는 어릴 때 '군대환' 이라는 단어를 무수히 들어왔다. 군대환이 무언지도 몰랐다. 관심을 가져서 나이드신 분께 여쭈어 보니, 제주도와 일본을 오고간 배라는 사실을 초등학교시절에 알았다. 너무나 귀에 익었기에 친밀한 감정마져 준다. 어른들은 큰것만 보면 군대환 같다, 라는 말을 했다. 큰 것의 대명사가 군대환이었다.

군대환(君が代丸 기미가요마루) 는 어떤 배인가.

군대환은 제주도와 일본 오사카(大阪)를 연결시킨 직행노선의 객선이었다. 군대환은 두 척이 있었다. 군대환을 소유한 회사는 아마사기 기선(尼崎汽船)으로서 1922년 제1 군대환을 제주도와 오사카 항로에 취항시킨다. 선장은 原口熊次郞 씨. 배는 669톤으로서 1891년 네덜란드에서 건조된 배이다. 제1 군대환은 1925년9월 제주도 동남부 즉 서귀포와 표선읍 사이를 항해 하던중 태풍을 만나, 항해 불가능이라고 판단한 선장이 인명구조를 위하여 뭍으로 배를 돌려 좌초시킨다.

▲ 좌초되는 군대환 ⓒ신재경

이래서 회사는 새로운 선박을 구입하게 되며, 제주도 사람들이 보통 부르는 군대환이란 배가 제2 군대환, 이 배이다. 제2군대환은 러시아의 군함이었다. 1886년 건조, 군함때는 1224톤이었으며, 군함 때의 배 이름은 「만쥴(Mandjur)」호 였다. 러일전쟁(1904년∼1905년) 때는 극동방면에 소속된 러시아 해군 제1 태평양 함대의 포함으로서 소속되여 있었으나, 1904년 당시 중국 청나라에 압력을 넣고, 한편으로는 일본이 순양함을 파견하여, 이 배를 무장해제 시킨다.

이런 이력이 있는 배를 尼崎汽船은 1925년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구입, 25년 가을부터 약 반년간 오사카의 조선소에서 개조공사를 한후에 1926년부터 제2 군대환이란 선명으로 제주도와 오사카를 객선으로 취항하게 된다.

개조공사후의 군대환의 재원은 919톤, 830마력, 길이 62.7미터, 폭 10.6미터, 깊이5.2미터, 吃水 12.7미터 이다. 승객정원은 365명, 그러나 685명까지는 승선 가능했다고 한다. 이 배는 철선이며, 특징은 선수의 아랫부분 즉 뱃머리의 수면 부분이 앞으로 튀어나온 특이한 형태의 배이다. 이 형태의 배는 라무(衝角) 형태 라고 하여, 이전 세대의 군함에서 볼수 있는 형태라 한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이런 형태의 배는 거의 자취를 감추어서 大阪港에서도 아주 신기하게 보이는 배였다.

▲ 러시아 군함 만줄호. ⓒ신재경

형태야 어떻든 당시의 제주도 사람들의 눈에는 거대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1960년대 70년대 까지도 큰것을 비유한 제주도 말이 「군대환 같다」라는 말을 들어 왔다.

이 제2 군대환은 1945년 4월 중순 오사카의 安治川의 千船橋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격침될 때까지, 20여년간을 제주도 사람들을 大阪으로 또 제주도로 실어 나른다. 이 배는 상등선실과 하등선실이 있었으며, 상등선실은 갑판위에 있었다. 하등선실은 갑판 밑에 있었고, 하등선실은 상층과 하층의 2단이며, 천정은 매우 낮아 키 큰 사람이 서면 머리가 닿을 정도였다 하니 얼마나 좁은 선실 구조인가는 알만 하다.

승선 후에는 식사는 배에서 제공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경험자의 이야기로는 제주도 집에서는 보리밥을 먹었지만 배를 타고보니 쌀밥을 주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일본에서 출발해 제일 먼저 기항하는 곳은 현재의 제주시 였다. 그러나 당시의 산지항(현재의 제주항)에는 접안을 못하여 먼바다에 배를 정선 시키고 있으면, 소선으로 사람들을 태워가고 태워 왔다. 그후 제주도를 서쪽으로 약 2일간에 걸쳐서 일주하
여, 면 소재지 11개소에 기항했다. 기항이라고 해도 접안은 할수가 없었기에 제주시와 같은 방법으로 소선으로 사람들을 큰배까지 왕래시켜다.

▲ ⓒ신재경

제주도 일주 후 다시 산지항을 기항, 제주도를 출발하면 약 2일만에 일본의 중심도시 오사카항에 도착할수 있었다고 하니, 제주도 일주 2일에, 현해탄 및 세토나이까이에서 2일이므로, 배를 제일 오래탄 사람이라도 4일이 소요된 셈이다. 증언에 의하면, 군대환이 오사카을 아침에 출발하면 다음날 저녁 때는 제주시에 입항할수가 있었다고 한다.

배의 속도는 지금의 객선과 큰차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의 제주 부산간을 운항한 아리랑호, 도라지호가 평균 12놋트로 15시간 걸려서 도착한것으로 보면, 2놋트보다는 느렸지만 상당히 느리지는 않았다고 추정된다.

배에서의 풍경이 당시 일본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枡田 一二(마스다 이치지) 地理學論文集, 弘詢社(東京), 1976년8월)

1934년 8월 1일 오사카 축항 잔교에서 제주도로 출발한 군대환에는 563명의 승객이 있었다. 이중에 상등객실 7명중 2명만이 일본인. 이것은 2:561 이었다. 그외로 사복 승선 이동 경찰관으로서, 大阪府警察署 思想係 O씨, 大阪築港水上署 W씨, 島의 巡警, 이로서 일본인은 사복경찰관과 상등객실 승객 2명 뿐이었다.

▲ 군대환의 사람들. ⓒ신재경

승객은 젊은 사람이 많았고, 17,8세에서 30세 전후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 중에는 상투를 하고 수염을 기르고 갓을 쓴 사람도 있었으며, 할머니도 있었다. 사람 머리의 3배정도 크기의 태왁에 나무를 구부려서 만든 망사리 옆에서 어린애에 게 젖을 먹이고 있는 해녀도 있었다. 혈색 좋고 건강한 체구의 여자들이 여기 3사람 저기 5사람 보인다. 검은 얼굴하며 소지품으로 보아 출가후 돌아가는 해녀들이라것
을 곧 알수가 있다.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 어린애를 데리고 있는 부부도 있어서, 일가족이 돈벌러 갔다
오는 모습이 알수 있다. 해녀들과는 얼굴색이 다른, 창백한 얼굴의 여공으로 보이는 쳐녀도 보이며 총각도 보인다.

563명중 무료승객인 어린애가 80여명 있다고 하니 돈벌러 갔다오는 일가족도 상당수 있는 것을 알수 있다. 선실에는 누울수 있는 공간이 않보일 정도로 사람으로 만원이다. 그래서 통로도 좋고 갑판도 좋고 물건 위도 좋다, 또 뜨거운 햇빛밑이라도 누워있는 모습이다. 아침에 브릿지에서 본 갑판은 너무도 처절한 풍경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사람을 얼마나 짐짝 취급했는지를 알수 있다. 그런 짐짝 취급을 하면서도 사복경찰관이 승선한 것을 보면 또 통제를 심하게 했는지도 알수 있다. 또 군대환은 살아있는 사람 뿐만아니라 사망한 사람들까지도 실어 날랐다. 우리 제주도 사람들은 죽어서도 화장이 아니라 토장이다. 객지에서 죽어서도 몸은 고향땅에 묻히고 싶은게 본인의 희망이요 자식들의 도리인 것이다. 군대환의 상등객실 후미, 배의 가장 선미 자리에 관을 안치할수 있는 곳, 2곳이 있었다고 한다. 오사카에서 사람이 사망하면 바로 제주도로 가든지, 아니면 가매장을 하여 몇년이 지난후 시신이 어느정도 정리가 된후에 제주도로 가는게 통례인 것은, 우리 제주도의 장례문화를 보아도 충분히 짐작 할수가 있다.

시신을 지금의 生野區근처에서 오사카항까지 인력으로 운반했을 것이고, 거기에는 만장 행여가 앞에서 인도 했을 것이다. 시신이 배에 타면 그 앞에 만장을 걸어놓고서 상주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군대환은 식사때가 되면 제일 먼저, 상에 올릴 뜨거운 밥을 준비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금은 살아있는 사람의 5배 정도였다고 한다.

군대환을 소유한 아마사기 기선(尼崎汽船)은 어떤 회사인가.

아마사기(尼崎) 일족은 해운을 중심으로, 조선 탄광 토지 해상화제보험등의 사업을 전개한 간사이(關西)지방에 본거지를 둔 지방재벌 이었다. 1880년 부터 해운업을 시작하여, 세토나이가이(瀬戸内海)•九州 노선은 2차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주노선으로서 해운사업의 중심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 배 3척이 육군에 징용을 당한다. 1903년에 오사카를 기점으로 神戶, 關門을 거쳐 한국의 부산 목포, 군산을 경유, 인천까지의 항로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한반도가 전쟁으로 위험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운항을 계속했다해서, 1910년에 대한제국 황제로 부터 훈장을 수여 받았다고 한다.

1923년3월부터 제주도•오사카 정기항로를 개설했다고 회사의 자료에는 나와 있으나, 실제로는 1922년에 군대환으로 오사카에 건너온 사람들의 증언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22년부터 23년3월까지는 부정기 노선으로서 취항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7년 시점에서 이 회사는 37척의 선박을 소유했으며, 西日本을 각지를 연결하는 10개 노선, 또 제주도•오사카 노선, 인천•오사카 노선(神戶, 下關, 부산, 목포, 군산 경유) 이 있었으나, 이 인천•오사카노선에는 1개 항로에 7척의 배를 투입했다. 1928년에는 이 회사의 오사카 지점에는 한국사람 229명이 船員•船夫로서 근무했다.

2차세계대전때 소유선박 전부를 군대에 징용당하거나 격침되고 만다. 전쟁후에 재건이 불가능해져 회사로서의 운명을 닫게 된다. 제주•오사카 노선 개설시, 경험이 풍부하고 한국을 잘알고 있는 原口熊次郞씨를 선장으로, 在阪제주도人 金秉敦씨, 제주도에서는 제주상선의 金根蓍씨, 제주도 실업가 朴宗實씨, 변호사 崔元淳씨등의 실력자들이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제주의소리>

<신재경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