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평화공원

최근 제주4·3평화재단이 4·3평화공원에 조성된 위령탑을 이설하고 공원 내에 사업비 18억 원을 들여 지름 40미터의 ‘성령의 연못(Holly pond)’을 조성키로 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평화를 상징하는 하늘연못 위 중앙에 제주도 모형의 꺼지지 않는 불꽃을 연출해 4·3의 영원한 혼을 상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에 대해 도의회 상임위에서 제동을 걸고 나섰고, 재단 측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포기했다는 후일담이 전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4·3평화재단이 만들어질 때, 많은 진통을 겪었다. 그것은 재단 이사장 선임과 둘러싼 갈등이었는데, 관주도냐 민간주도냐의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정상적인 출범을 못하고 1기 이사장은 행정부지사가 겸직했다. 이후 민간인인 장정언 현 이사장이 선임되면서 4·3평화재단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특히 도의회의장시절부터 4·3에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그의 지난 행보 때문에 많은 이들이 평화재단의 활동에 기대를 걸었다.

장정언 이사장은 취임연설에서 여러 사업들을 열거하면서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공원을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 날 행사에 참여했던 필자는 그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갸우뚱 한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파행전시 중인 4·3평화기념관 상설전시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취임 9개월 만에 내온 그 구상의 일단이 ‘성령의 연못’으로 나온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평화재단이 해야 할 일 중에 중차대하고 시급한 문제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시작도 하지 못한 원래의 기념관 전시

2008년 3월 28일 개관해 개관 3년차를 맞는 4·3평화기념관은 단 한 번도 애초에 계획된 대로 정상적인 전시를 해 본 적이 없다. 그 배경은 개관 당시 정치상황과 연동되어 있다.

개관연도인 2008년은 이명박 정부가 갓 들어선 와중이었다. 이 당시 평화공원은 지난 4년간의 조성사업을 마치고 개관준비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이때 보수세력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4·3위원회 폐지, 4·3진상조사보고서 부정, 국가적 차원의 공식사과에 대해 딴지걸기, 특별법 개악 등의 4·3 흔들기가 시작되었다. 특히 이러한 이념농단은 당시에도 제주도민과 유족들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못을 박는 행위로 제주도민 전체의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리고 4·3평화기념관의 전시물에 대해서도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좌편향 시각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트집 잡으면서 대대적으로 공세를 가하던 시기였다.

4·3평화기념관의 전시는 국내적으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료+예술작품의 결합을 통해 부족한 사료의 약점을 보완하고 4·3사건을 보다 입체적이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전국의 작가들 중 시각예술분야 작가 11명이 참여한 아트워크(Art Work) 작업을 상설전시의 동선에 최초로 도입한 전시기획이었다. 그 결과는 개관 후 전시관을 방문했던 많은 전문가들과 관람객들의 반응을 통해 “신선하다, 적절했다, 유물 중심의 전시보다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는 등의 평가로 나타났다. 하지만, 개관 년도인 2008년 12만 3천여 명, 작년 한 해만 13만 6천여 명이 다녀간 이 기념관은 개관 후 한 번도 제 얼굴을 드러낼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다. 지금도 전시공간에서 철거당한 전시물의 일부가 수장고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관람객들은 절름발이 전시를 보고 간 셈이다.

▲ ⓒ박경훈

화가 박불똥의 작품 ‘행방불명’. 이 작품은 절름발이 작품이 되고 말았다. 특히 작품의 정 중앙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얼굴이 게재된 당시의 타임지를 콜라쥬 한 것을 가려버렸고, 벽면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제주도 순시 시 지프차에 타고 있는 사진을 활용한 작품 역시 역시 영사기를 꺼버림으로써 이 작업의 가장 중요한 이미지요소가 빠져 버렸다.

▲ ⓒ박경훈

현재 4·3평화기념관 내 전시중인 설치작품 모습. ❶타임지의 표지가 삭제되었다. ❷프로젝터가 꺼져 있다. ❸이미지가 사라진 채 텅 빈 벽면만 남아 있는 채로 전시되고 있다.

▲ ⓒ박경훈

만화가 김대중의 작품 ‘오라리 사건의 진실’. 이 작품은 역량 있는 젊은 만화가 김대중 씨의 야심찬 대작이었다. 이 작품 역시 당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석연찮은 핑계로 현재 전시되지 못하고 있다. 예술적 상상력을 사료의 확인불가능성을 이유로 제약한다면, 역사 속의 어떤 것도 표현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예술적 상상력과 형상화작업은 이러한 역사의 공백을 채워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대장금 같은 드라마도 탄생하는 것이다. 또한 예술가들은 그저 맹랑하게 상상력을 동원해 허구적으로 형상화 하지 않는다. 사건의 전체 맥락을 꿰뚫는 예술가의 눈과 상상력이 사료가 없으면 꼼짝 못하는 역사가들의 역사적 결론보다 우월한 경우가 종종 있어왔다.

위의 두 작품은 아직까지도 관람객들에게 제대로, 또는 전혀 전시되지 못하고 있다.

이 전시작품들이 제대로 전시되지 못한 것은 4·3을 이념의 잣대로 보는 보수적 시각을 지닌 이명박 정부의 따가운 시선 때문이다. 하지만, 유족과 도민들은 합심해 보수우익들의 책동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4·3특별법 개악이 그렇고, 여러 법적 심판에서의 승리가 이를 말해준다. 그렇다면, 새롭게 꾸려진 4·3평화재단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비정상적인 전시가 재단 설립 이전에 생긴 일이라면, 당연히 재단이 생긴 후에는 무엇보다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 ⓒ박경훈

사진 왼쪽은 개관 당시 가려진 벽면, 오른쪽은 현재의 전시상태이다. 만화는 강력한 매체이다. 특히 밋밋한 사진 몇 장과 텍스트로만 설명하는 오라리 사건의 진실은 만화매체를 통해 더욱 알기 쉽게, 그리고 더욱 생동감 있게 전달될 수 있으며,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다양한 예술매체의 동선과도 연결되어야 하는데 현재 전시는 이런 맥락을 차단당하고 있으며, 그 효과 역시 반감되고 있다.

4·3은 시련 속에서 살아나온 역사이다. 마찬가지로 4·3평화기념관 역시 시련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야 할 것이다. 바람만 불면 납작 엎드리는 역사적 진실은 이미 그 진실의 존재 자체가 신뢰를 잃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뢰를 잃으면 곧 그를 담은 기념관 역시 진정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오키나와의 경우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관 역시, 일본에 의한 대규모 옥쇄를 감행하여 무려 23만여 명이나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을 기리는 공원이며, 평화기념자료관은 1975년 6월에 개관했다. 그러나 자료관 건설은 주민의사와는 상관없이 졸속으로 추진되면서 강력한 비판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에 대해 현지의 역사연구자 및 오키나와전쟁 관련 주민들이 강력하게 전시내용의 개선을 요구했다.  ‘오키나와전을 생각하는 모임’이 조직되어 전시내용 개선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제출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지료관 설립의 기본이념’이 채택되었다. 새로운 자료관이 들어서면서 헐리기까지 이 자료관은 오키나와를 찾는 내·외인들에게 오키나와전쟁의 실상과 핵심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역할을 규모는 작지만 충분히 해냈다.

2000년 4월에 오키나와평화공원과 자료관이 대재적으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하지만 신관의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시변경사건’은 보수적인 오키나와현 수뇌부와 일본본토의 군국주의적 관료들이 비인간적인 전쟁의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역사인식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이다.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집단자살 강요, 주민학살의 실상 등을 숨기고 그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세력의 불순한 행동은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이 사건은 원래의 전시 기본안을 관철 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진실을 감추려고 하는 세력과 주민의 입장을 관철하려는 세력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몇십 년 동안 이어져 오는 오키나와의 ‘역사진실전쟁’의 사례를 보면 하나의 기념관의 완성은 건축적인 완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진실을 감추고 역사를 거스르고자 하는 세력들이 발흥할 때 이를 방어하고 지켜내는 것도 기념관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특히 이번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불거졌던 4·3과 관련한 퇴행적 책동들은 우리들의 쟁취한 역사적 진실의 위상마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4·3평화기념관은 기념관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최소한 애초에 구상되었던 기본적인 전시라도 한번 제대로 열리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4·3평화재단은 이에 대해 못들은 척하는 것인지, 딴전을 부리는 셈이다.
 
‘성령의 연못’ 조성사업은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즉, 그것은 4·3평화공원이 그동안 조성되는 과정에서 겪었던 엄청난 과정상의 오류들을 또 다시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 ‘성령의 연못’이라는 하늘연못의 구상안도 문제가 된다.

하늘연못은 이미 제주돌문화공원에 조성되어 있다. 하늘 연못은 돌문화공원만의 독특한 조성물이며, 나름대로 돌문화공원의 주변시설과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인상적인 시설물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설물을 전혀 다른 맥락의 4·3평화공원에 다시 등장시킨다는 것은 좋은 발상이 못되는 것이다. 안 그래도 하늘연못과 노출콘크리트로 지어진 건축적 아이디어는 상당 부분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에 닿아 있다. 그런데 4·3평화공원에 비슷한 조형공간을 그것도 공원의 핵심부에 들여 놓는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지금의 4·3평화공원의 조형물들은 다 나름대로 어려운 조성과정의 역사를 안고 있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발을 들여놓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평화공원 야외공간에는 애초의 평화공원 기본구상에서 제시된 원칙들을 무너뜨리는 조성사업들이 이어지면서 평화공원 특유의 공간미가 사라지고 있다.(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따로 다룰 것이다.) 새 이사장이 올 때마다 공원의 조성물들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한다면, 공원의 전체적인 조화로움이 무너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일 것이다.
                             
물론 필자도 현상공모 절차를 통해 조성된 현재의 위령탑이 4·3공원의 정중앙부에 위치하면서도 4·3의 상징성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에는 그 누구보다도 동의한다. 왜냐하면 공모당선 당시 공모당선작이 4·3의 역사적 진실과 상징성을 담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에 따라 별도의 전시기획팀을 꾸렸었고, 필자도 거기에 참여한 바 있기 때문이다. 실제 전시기획팀이 활동하면서 애초에 공모당선작의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대체 되었다. 수정된 부분만 무려 70여 곳을 헤아린다. 현재의 각명비가 중앙원형공간으로 옮겨진 것도 오랜 기간 논의를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전시기획팀에 함께 참여했던 한국건축계의 원로인 고 강병기 교수는 공모를 통해 당선된 최소한의 상징적인 조형물들은 일단 놔두자고 했다.(그것이 바로 우주선 같다느니, 청국 모자 같다느니 말이 많은 기념관 외관과 중앙의 위령탑이었다.) 왜냐하면 4·3의 상징성을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건축설계경기라는 건축계의 규칙과 공모 당선이라는 합법성을 통한 절차성은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미 거액의 공사비가 투자된 여건 등을 감안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한 10년쯤 지나 제대로 된 것으로 바꾸면 되지.”라고 말했었다. 현재의 중앙탑인 위령비는 사실상 4·3의 상징성과는 거리가 먼, 그렇다고 대단한 감동을 주지도 못하는 위령탑인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선·후차성이 있다. 또한 필요한 절차가 있다. 개관 후 이제 3년차, 기념관전시는 계획전시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아름다운 공원 만들기 사업이나, 적어도 지금 4·3평화재단이 해야 할 일은 ‘성령의 연못’을 조성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 것인가가 더욱 시급하다. 위령탑을 10년 후에 고친다고 4·3역사가 왜곡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순리대로 하자.

무엇보다 4·3평화재단에 지금 시급한 것은 지속적인 진상규명사업의 추진, 기념관 전시의 정상화, 국내외 유관시설·기관·도시와의 국제네트워크 구축과 연대를 통한 4·3의 세계화사업 등 고유사업이 아니던가? 또한 4·3평화공원 자체 내의 문제만으로도 4·3평화공원의 다크투어리즘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홍보의 강화, 기념관 건축공간 내의 게획공간들(현재 기념관의 주요시설들 중, 모든 기념관의 주요시설인 <뮤지업 샵>이나, <카페테리아> 등 방문객들에 대한 서비스공간들은 모두 운영되지 못하고 비어 있다.)의 정상 운영 등 산적한 과제들이 많다.

얼마 전 4·3평화기념관을 방문하고 나서 놀란 일이 하나 있다. 올 해 4월에 슬그머니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이 걸린 것이다. 나는 황당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애초의 전시기획에는 전혀 포함되지 않았던 현직 대통령의 사진이 전시의 맥락과는 아무 개연성도 없이 걸려야 하는 지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가수반으로서 그 어렵고 힘든 국가폭력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 역사적인 인물이었기에 전시관에 사과장면이 걸리었다. 하지만, 오히려 4·3을 폄하하는 정부의 대통령 사진이 이 기념관에 걸려야 하는지, 또한 누가 걸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정권 때마다 전시물마저 자의적으로 올리고 내려진다면, 이 기념관의 전시물들은 정치의 희생양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흔들리다 보면 이 기념관이 어떻게 역사적 진실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을까?

▲ ⓒ박경훈

기념관 전시물 중 노무현대통령 공식사과 영상물과 평화의 섬 선포 전시물의 중간부분에 끼어 든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 원래의 전시계획엔 없었던 장소에 들어갔다. 이러다 후임 대통령들의 사진이 모두 이 부분에 걸려야 할지도 모른다. 취임 이후 이대통령은 단 한 번도 4·3위령제나 평화공원을 찾지 않았다.

최근 평화공원이 다크투어리즘의 명소로 방문객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다크투어리즘의 매력은 역사적 진실을 담는 장소인지, 유적인지, 기념관인지가 핵심이다. 방문객 증가에 기뻐할 일만 아니라 그러한 다크투어리즘을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 독재자 프랑코가 세운 세계 최대의 십자가
독재자 프랑코가 세운 세계 최대의 십자가

10년 전 <4·3위령공원기본구상연구용역>에 참여한 당시 연구진들은 4·3평화공원과 평화기념관을 만들 때, 가장 경계해야 할 반면교사로 스페인의 로스카이도스(Valle de los Caidos) 계곡을 첫 대상으로 꼽았었다.

‘전몰자들의 계곡’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성당·수도원과 함께 바위산 250미터를 뚫고 산 정상에 152미터의 거대한 십자가를 세웠다. 이 건축물들은 독재자 프랑코총통의 명에 의해, 좌우이념의 화해를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공화파 포로 2만 여명을 동원해 18년에 걸쳐 완성했다. 그리고 자신도 여기에 묻혔다. 그

▲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제주의소리
런데 이곳을 찾는 세계인들은 프랑코의 바람대로 ‘화해의 성지’로 읽기보다는 독재자가 자신의 죄과를 감추고 애매모호한 종교적 장치로 참혹한 역사적 진실을 파묻으려 조성했던 세계 최고의 십자가와 종교적인 디자인과 문화적 장치로 만들어진 가식적이고 과시적인 잘못 만들어진 기념물로 기억한다.

지금 4·3평화공원에서 지켜내야 할 것, 시급한 것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다면, 다크투어리즘에도, 평화의 성지로도 제 역할을 못하는 평화공원·기념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제주의소리>

<박경훈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