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생님은 이 여행서 무엇을 찾으시나요?"

  나는 제주섬 사람이다. 지금껏 이 섬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다. 뭍에서 지낼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다. 군복무 기간이 그것인데, 그나마도 서해의 섬 백령도에서 보냈다. 그 섬에서 난 겨울만 햇수로 4번을 맞이 했었다. 결국, 사십 평생 뭍에서 보낸 시간이란 군 훈련소 기간인 4주가 전부인 셈이다.

  그런 나에게 ‘뭍의 진수’라 할만한 ‘대륙’ 탐방 기회가 주어졌다. 중국 시안(서안)에서 시작해서 투루판 - 우르무치 - 쿠처 - 돈황, 다시 서안을 거쳐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왕복 5000km의 실크로드 기행이 그것이다. 때문에 나에게 이번 여행은 고대 문명기행이라는 의미 이전에 열흘의 짧은 기간이나마 대륙의 지평선에 서서 ‘뭍’의 광활함을 만끽함으로서 지난 세월, 섬에 갇혀(?) 지낸 세월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를 더 앞세워 의미를 찾으려 했다. 대륙의 사람들, 대륙의 풍경과 무릎을 마주하는 것, 이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라면 목적인 셈이다.

  이번 여행은 공학박사이자 여행 전문가인 김찬수 박사의 제안에 의해 이뤄졌다. 여기에는 작가 현기영 선생, 성공회대 허상수 교수, 음악평론가 박은석씨, 필자 등 총 다섯 명이 함께 했다. 모두가 제주가 고향인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 중 대부분이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인지라, 미흡한 필자가 기행문을 쓰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이다. 때문에 이번 기행문은 순전히 필자 개인적인 여행감상 후기에 불과함을 밝혀둔다. / 프롤로그

▲ 광막한 사막 풍경 ⓒ박은석

 실크로드…

 이 길위에서 수많은 국가들이 명멸하고 동서의 문명이 교차하였다. 명백히 고대 문명의 중심이었던 이 길의 도시들은 그러나 지금 중국의 변방에 불과하다. 이 대목이 제주와 흡사하다. 제주 역시 고대 탐라국 시절, 스스로가 문명교류자였다. 그러나 중세 이래 제주는 한반도의 변방으로서, 심지어 절해고도 유배지로서 위치지어졌다. 그리고 지금 다시 변방에서 중심을 모색하는 기로에 서있다. 중국의 변방으로 위치지어진 실크로드의 도시들 또한 다시 성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문명교류자에서 변방으로, 다시 새로운 기회로 나가려는 이 도시들의 여정에서 제주를 떠올리려는 것이 애초 나의 기행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생각은 바뀌었다. 실크로드 여정 어디에도 실크로드는 없었다. 문명교류와 문화전파의 상징처럼 붙여진 이 이름도 사실은 불과 100년 전 독일의 한 지리학자에 의해 명명된 것일 뿐이다. 실제로, 이번 여정에 들른 실크로드의 도시들에서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의 경우처럼, 교역의 역사를 배경으로 ‘실크로드’란 이름을 브랜드로 활용해 경쟁적으로 상품화에 나설법도 한데, 그런 현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실크로드란 무역의 통로을 일컫는 것인데, 무역은 인류가 생존을 위해 행했던 방편에 다름 아니다. 생존의 수단으로서 무역을 위한 그 길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뼈를 묻기도 했다. 여기에 비단이 주요한 교류 품목이었다는 이유로 ‘비단길’이라 명명되었지만, 왠지 그 광막하고 척박한 행로에 붙여진 이름치고는 사치인듯 여겨진다.

▲ ⓒ박은석

▲ 4000m의 텐산(天山)산맥으로 둘러쌓인 투루판(吐魯蕃)은 해발 18m~106m로 중국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다. 그 곳의 아이딩 호수(Aiding Hu: 艾丁湖). 해발 -155m로 세계에서 가장 낮다는 해발 -396m의 중동의 사해(死海) 다음으로 낮은 호수이다. 지금은 모두 말라버린 이 아이딩 호수의 의미는 위구르어로 '달빛'이라고 한다. ⓒ박은석

  그래서 실크로드 기행이란 나에게 적절치 않았다. 또한 실크로드 기행 그 자체는 고대 이래 근 100년 전까지 이어진 문명 흐름에 대한 탐색이 목적이 되는데, 이는 학자들의 몫이다. 아니면, 문명기행으로서 실크로드 탐색은 혹 다시 있을지 모르는 이후의 기회에서 찾아야 할 듯 싶다. 나에게 있어서 이번 여행의 흥미는 풍경과 사람이다.

 “선생님은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찾고자 하시나요?

 이번 여행에 함께한 현기영 선생께 질문을 드리는 것으로부터 여정을 시작했다.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 사이에서 고대로부터 수많은 도시들이 세워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는데, 그 현장에 서면 삶의 무상함이랄까, 뭐, 그런게 다가오지 않겠나?”

  “작년에 내신 선생님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누란’이 있었던 곳도 바로 우리가 갈 여정에 놓여있는데, 누란이라는 소설을 쓰신 의도는 무엇이었나요?”

  “한 마디로 문명의 자기모순에 의한 멸망을 말하고 싶었지. 지금 자본주의가 마치 누란과 같아. 날로 고도화 되어 가지만, 또한 날로 쇠락해가는 느낌이야. 문명의 이기를 쫓는 일이 반성없는 사회를 만들고 있어. 인간이 만든 문명이 오히려 인간과 인간사회를 망치는 거지.누란에서는 그것을 지적하고 싶었어.”

 

▲옛 자취만 남아 있는 자오허 고성(交河故城). 지금은 세월의 무상함만 느끼게 하는 이 곳은, 고대 서역 36국가 중 차사전국(車師前國)의 도읍지였다. 마치 섬처럼 사방이 절벽인 이 성은 길이가 1,650미터, 폭이 300미터에 이른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토성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박은석

  나는 현기영 선생의 소설 누란과 이후 읽었던 ‘더 로드(The Road)'에서  어떤 영감을 얻은 적이 있다. 바로 세상은 결코 한 쪽만을 허락하지는 않는다는 ... ‘누란’ 속의 허무성은 과거의 트라우마로 늘 현실 속에 재생되는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 한 달간의 노숙생활을 거쳐 지리산으로 떠났다. 그 곳에 좀 더 오래 전, 죽음의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보다 오래된, 다름 아닌 한국 근대 학살의 기억에 대응함으로써 결국 자신을 통해 재생되는 가까운 과거의 단절을 시도했던 것이다. 근본부터 스스로를 다시 세우기 위해 떠난 것이다.

한때 산의 냇물에 송어가 있었다. 송어가 호박빛 물속에 서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지느러미의 하얀 가장자리가 흐르는 물에 부드럽게 잔물결을 일으켰다. 손에 잡으면 이끼 냄새가 났다. 근육질에 윤기가 흘렀고 비트는 힘이 엄청났다. 등에는 벌레 먹은 자국 같은 문양이 있었다. 생성되어가는 세계의 지도였다. 지도와 미로. 되돌릴 수 없는 것, 다시는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을 그린 지도. 송어가 사는 깊은 골짜기에는 모든 것이 인간보다 오래되었으며, 그들은 콧노래로 신비를 흥얼거렸다.  -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마지막 문단

  세상이 폐허가 된 이후, 절박함으로 희망을 찾아 표류했던 어느 부자(父子)의 행보를 그린 ‘더 로드'는 철저히 세상은 한 쪽이 아님을 보여준다. 소설을 통해 나에게 다가온 그 ‘폐허’란  ‘송어가 사는 깊은 골짜기에 모든 것이 인간보다 오래된’ 것으로 새로운 지도를 비로소 생성(재생)하기 위한 것이다.

 나의 실크로드 기행은 그 길 위의 풍경과 사람을 통해 자기모순이 드러난 지금의 문명사회 안의 ‘나’를 떠올리는 과정이기도 했다. <계속>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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