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조선시장과 이쿠노구

오사카 동쪽 교통요지 츠루하시역. 이 츠루하시역에서 동쪽으로 걸어서 10여분을 가면, 히라노 가와(平野川)가 있다. 폭이 20여 미터 정도의 좁은 개천이다. 이 개천이 우리 동포들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여기에 시장이 있다. 이 시장을 조선시장(朝鮮市場, 죠센 이찌바)라고 부르기도 하고, 코리아 타운(Korea Tow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입구에서 출구까지 일직선이고 길이가 약 600m쯤 된다. 일직선 도로 양쪽으로 점포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우리 한국 식품가게가 주를 이룬다.
 
츠루하시 시장이 한국보다 더 한국맛 나는 시장이라면, 이 조선시장은 제주도보다 더 제주도 맛이 나는 시장이다. 이 시장에는 70% 이상이 제주도 사람이다. 제주시에 있는 동문시장보다 더 제주도가 남아있는 시장이며, 제주도보다 더 제주도 사투리가 남아 있는 곳이다. 이 시장을 거닐다 보면 50년전 제주도에 와 있는 느낌마저 든다.

▲ 재일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 지역.

제주에서 한참 안 보여 '어디가서 죽었나?' 생각했던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곳....‘코리아 타운’
 
제주도에서 한참 보이지 않아 어디가서 죽었나? 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이 시장에 왔더니 살아 있더라, 라는 말을 할 정도로 제주도 사람들과는 애환도 많은 곳이다. 이곳에 온 육지 사람들이 불평을 한다. “제주도도 아닌데 제주도 사람들만 바글바글…” 이라고. 옛날 제주도처럼 육지 사람이라고 ‘왕따’를 좀 당했다는 것으로 내 귀에는 들린다.
 
이 시장에는 한국에 있는 물건은 다 있다. 한국에서 정식으로 수입한 물건도 있지만, 상인이 직접 보따리에 들고 온 물건들도 즐비하다. 물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식당도 즐비하다. 한국에서 온 아줌마가 직접 하는 식당이라서 한국 맛, 제주도 맛 그대로 이다. 그런데 한국보다는 제주
도보다는 맛은 없다.
 
이 시장 주변을 보면, 여러가지 동포들을 위한 서설들도 이곳을 중심으로 모인다. 민단 사무소, 조총련 사무소, 조총련 학교, 미장원, 절, 교회, 심방 집, 점쟁이 집, 왠지 모르지만 심방 집, 점쟁이 집이 많다. 좁은 지역에 심방 집, 점쟁이 집 간판 밀도는 한국 어느 곳보다도 높을 것이다. 나이 드신 교포 할머니, 일본에서 태어난 2세 3세들, 이제 한국에서 제주도에서 온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사이 좋게 어울려져 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시장이 우리 동포들의 메카이다. 오사카에 와서 살고 있는 동포들은 1년이면 몇번은 이 시장을 와야만 된다. 명절 때도, 제사 때도 이 시장에서 쇼핑을 해야 된다. 동포들이 모이는 곳이다.

▲ 재일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 지역.

 
이쿠노구 인구 13만명 중 한국사람이 3만명...재일동포 최대 밀집지역

옛날 이곳에 경찰 파출소가 있었다. 베테랑 순경은 파출소에 가만히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발걸음 만을 본단다. 걷는 모습을 보고서 그 사람에게 가서 '등록 내놔 봐' 하면 바로 밀항자가 걸리고 만다. 1960년대 70년대는 제주도 길은 비포장 도로가 많았다. 사실 제주시 간선도로가 아스팔트로 깔끔히 포장된 것은 아마도 필자가 중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1960년대 후반). 뒷길로 들어서면 다 비포장이었다. 시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비포장도로는 걸으려면 발바닥을 높게 들고서 앞으로 내딛지 않으면 돌이 발에 걸려 넘어진다. 달도 없는 깜깜한 시골 밤길을 넘어지지 않게 걸으려면 이건 완전히 감작으로 걸어야 되는 것이다. 일본 경찰이 여기에 착목한 것이다. 발바닥 높이 올려서 조심스럽게 걷는구나, 저 녀석 밀항자, 가서 “등록 내놔봐!” 틀림없다 “갑시다. 오무라 수용소로”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 일대는 이쿠노구(生野區 생야구)이다. 일본에서 재일동포 밀도가 제일 많은 구(區)이다. 이쿠노구 인구 13만3천명에 우리 한국사람은 약 3만명이다.(2010년 구청 통계). 4.5명당 한 사람이 우리 한국사람이다. 옛날에는 4명중 한 사람은 우리 동포였는데 그 숫자가 줄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일본사람으로 귀화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지역은 오사카시 동쪽의 아주 좋은 주택지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1920년대) 논과 밭뿐인 이 지대는 물난리로 유명한 동네였다. 지금은 오사카시 이쿠노구(生野區)로서 오사카시 동쪽의 중심 행정구 이지만, 당시는 오사카시에도 편입이 안된, 오사카부 히가시나리군(大阪府 東成郡) , 오사카의 외각 시골이었다.
 
이쿠노구의 중심을 흐르는 갯천이 히라노 가와(平野川)이다. 현재의 히라노 가와(平野川)는 일직선이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개천은 일직선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일직선이다. 원래의 '히라노 가와'는 일직선이 아니라 상당히 구불어진 개천이었다. 비만 오면 빗물이 빠지지 않아서 범람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일대는 사람이 사는 주택은 물론, 공장지대 또 농토로도 적합하지 못한 토지였다.
 
1920년대 이 '히라노가와' 를 일직선으로 만드는 토목공사가 시작 되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기계가 있는 그런 시절이 아니였다. 사람이 삽과 곡괭이로 작업을 해야만 했던 시절. 이 토목공사를 위해서 우리 한반도에서 많은 사람들을 데려왔다. 당시의 오사카는 동양의 맨처스터라고 불릴 만큼 공장도시였다. 또 이곳은 오사카시(大阪市)도 아닌 오사카의 외각지대. 그러나 오사카의 중심과는 가깝다.
 
개천이 일직선이 되여 범람에서 벗어나 쓸만한 토지가 되니, 이젠 이곳에 많은 공장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곳에 사람들이 싫어하는 소위 3D산업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화학약품을 만져야 되는 고무공장 등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사람들이 싫어하는 직종이며, 주택지에서는 싫어하는 공장들이다.

▲ 이쿠노구 한 복판에 자리잡은 공화병원. 조총련계에서 세운 병원으로 재일동포들이 많이 간다. ⓒ신재경

극심한 민족차별, 오로지 돈 벌기 위해 ‘이쿠노구’;에서 일한 우리동포, 조센진.
 
해방 전 일본에서의 우리동포, 조센진(朝鮮人), 지금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차별이 있는 시대였다. 일본사람들 중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자기들은 우수한 민족, 일본 이외의 아시아 민족은 열등한 민족, 그래서 우리 한반도에서 데려온 조센진들, 우리 동포들을 사람취급 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동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이 버린 일만 할 수 밖에 없었다. 버린 일만 해야 하기에 그들이 버린 토지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는 오사카시에도 못 들어간 외각지대 지금의 이쿠노구(生野區)에 공장에서 일하면서 이곳 근처에 살 수밖에 없었다.
 
일본사람들이 싫어하는 이런 3D공장에 우리 동포들 특히 제주도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 동포들, 특별한 기술도 없고 튼튼한 신체 하나로 돈을 벌어야 하는 그런 비참한 환경에서, 좋은 일 나쁜 일 가릴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돈만 준다면 어떤 일도 해야 되는 그런 시기에 그런 신세였다.
 
그때는 제주도와 오사카를 오가는 정기연락선 군대환(기미가요마루, 君が代丸)가 취항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싫어하는 직종에, 제주도와 오사카를 정기적으로 왕래하며 노동력을 제공해 주는 연락선, 아주 좋은 조건이 맞아 떨어졌다. 이래서 이 일대에 제주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는 농사와 해녀는 있지만, 그리 좋은 현금 수입이 없었다. 군대환을 타고 오사카에 와서, 이곳에서 일을 하면 현금을 만질 수 있고, 그 현금을 제주도로 보낼 수가 있다. 제주도에서 보면 일본 오사카는 돈 떨어지는 나무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너도 나도 배를 탔다. 어떤 때는 마을의 젊은이 3분의2가 일본으로 돈 벌러 가곤 했다.

▲ 이쿠노구를 중심으로 흐르는 갯천 히라노 가와. ⓒ신재경

돈벌로 일본으로 몰려가는 청년들...프레스 ‘꽝’ 소리 한번에 ‘4엔’
 
농사일 말고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빈둥대던 아들이 일본에 갔더니 보지도 못했던 고액권 현찰을 보내왔다. 어머니는 그 현찰을 들고, 동네방네 우리 아들 자랑을 하고 다닌다. 그것 보고 배 안탈 사람 없다.
 
1930년대에 들면서 일본은 전쟁체제로 들어간다. 물자가 필요했다. 3D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제품들, 고무나 유리를 원료로 하는 제품들. 군대에서도 필요한 물자이다. 이젠 군대가 '군대협력공장' 이란 마크를 붙여 주면서 공장 및 제품들을 우대해 준다. 조센진이라고 차별은 하면서, 우리동포들이 생산한 물건은 전쟁터까지 가져가 잘만 썼다.
 
해방 후 제주도로 돌아갈 사람들은 돌아갔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은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지금도 오사카 이쿠노구(生野區)의 우리 동포들의 산업 중에서 샌들 신발 산업이 제일 많다. 전쟁전의 고무와 관련이 있는 산업으로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지금도 이쿠노구는 가내공업이 많은 곳이다. 한 집에서 공장과 주택이 같이 있는 것이다. 일 주문을 받아서 1층 공장에서 일하고, 일 끝내면 2층 주택으로 올라가는 식의 주택이 이쿠노구의 일반적인 주택 구조이다.
 
옛날 1960년 70년대는 일본이 고도성장 시대였다. 일주문이 밀리고 밀려서 하루 쉬고 싶어도 밀린 주문에 쉴 수가 없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어떤 제주도 동포, 철물 프레스 일을 하는데, 자동 프레스 기계가 상하 왕복 운동에 윗기계와 아랫기계가 맞부딛치는 소리가 '꽝' 하고 들린다. ‘꽝’ 소리 한번에 일본돈 4엔이다. ‘꽝’하는 소리가 기계소리로 들리지 않고 ‘4엔’ 이라는 돈 소리로 들리 드란다. 자동기계이니 4엔... 4엔... 4엔...은 계속 들리는 것이다. 주문이 밀려있으니 쉬고 싶지만 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돈소리 나는 풍경은 없다. 우리 동포들의 제품 대신, 중국제 제품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쿠노구 우리 동포들 경제가 옛날과는 너무 다르다. 돈을 못 만들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고령화가 가속화 되고 있다.
 
이곳 이쿠노구와 조선시장과 제주도, 한 많은 군대환, 10만명의 제주도 본적 재일동포, 다 여기에서 관련이 이어진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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