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경술국치와 제주성 2

돌하르방의 슬픈 유랑

돌하르방은 제주를 대표하는 아이콘 중의 하나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제주하면 돌하르방이 떠오를 정도로 유명세를 타는 이 석상의 명칭이 국내·외로 널리 통용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71년 8월 26일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여러 명칭으로 쓰이던 것을 돌하르방(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널리 불리던 것이라고 현용준은 보고했다.)으로 등록하면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돌하르방으로 고착된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돌하르방은 무엇이라 불렸을까. 사실 돌하르방이란 명칭이 대표성을 띠고 사용되기 이전에는 다양하게 불려 제주도에서 전반적으로 통용되던 명칭은 확실치 않다. 우석목, 무석목, 벅수머리, 돌영감, 수문장, 장군석, 옹중석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다. 이 명칭들은 삼읍이 다 달라 각기 다르게 사용되었다. 그중에서도 우석목은 제주목에서, 무석목은 대정현과 정의현에서, 벅수머리는 정의현에서만 불렸다. 옹중석은 문헌에서만 확인된다. 이 중 우석목이 가장 널리 쓰이는 명칭이었다.

돌하르방의 다양한 명칭만큼이나 이 석상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그 역사적 유래에 관해서도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김석익(金錫翼)의 《탐라기년(耽羅紀年)》(1918)에 “영조 30년(1754)에 목사 김몽규가 옹중성(翁仲石)을 성문 밖에 세웠다.”는 기록과 1953년 담수계(淡水契)에서 펴낸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에 “제주읍성의 동문·서문·남문 등의 3개 문 밖에 있었다. 1754년(영조 30)에 목사 김몽규가 창건한 것인데, 3문을 헐어 치워버리게 됨에 따라 2기는 관덕정 앞, 2기는 삼성동(三姓洞) 입구로 옮겨 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이 기록만으로 이때에 이르러서야 세워졌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제주성은 조선 태종 때인 1416년에 구축되었는데, 이 시기에 와서 세워졌다는 특별한 이유나 배경 서술이 없다는 점, 또한 성문에 도달하기 이전에 금표의 기능이나 민가의 정낭과 같은 기능을 겸했다는 것 등으로 보아 반드시 그 시기에 세워졌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돌하르방을 제주를 상징하는 돌조각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돌하르방은 원래 제주섬의 읍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즉, 읍성의 성문이 있을 때, 그 존재의미가 확연히 드러나는 석조형물이라는 것이다.

문화는 불과 한두 세대만 지나도 일단 전수가 끊기면 그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다. 즉, 역사가 신화가 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처럼 돌하르방의 기능과 유래도 역시 지금에 와서는 알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돌하르방의 기능과 원형에 대해서는 다행히 실제 원위치에 현존했던 시기의 기록과 조사가 있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바로 현용준 박사의 연구에 의해서인데, 1963년에 이루어진 그의 조사 당시 원위치인 옛 제주성 동문으로 통하던 골목길의 돌하르방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의 조사에 따라 당시의 위치를 보면 성문이 있었던 동성문터의 밖으로 S자형의 길이 나 있었는데, 그 구부러진 두 지점의  굽이에 각각 2기씩 8기가 세워져 있었다. 즉, 성문터에서 35m 떨어진 곳에서 길이 한 번 굽이돌고, 그 길 굽이의 좌우에 2기씩 돌하르방이 마주 세워져 있고, 다시 약 50m 거리에서 길이 다시 한 번 굽이도는데, 이 굽이의 좌우에 2기씩 마주 세워져 있었다.

▲1914년 제주성 동문 밖 돌하르방. 일제가 토지측량을 실시할 표본지구로 제주도를 선정하면서 남긴 기록사진임. 동문 밖에서 마주보는 돌하르방 사진으로 이때까지만 해도 제주성의 경관이 잘 남아 있음. ⓒ제주의소리

어찌되었든 돌하르방은 이제 제주도의 대표이미지이자 상징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돌하르방이 복원된 것도 아니고 실물 그대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고 있다. 아예 멸실되어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제주목관아마저 복원되어 그나마 전통시대의 공간으로 구도심에 새롭게 둥지를 텄건만, 복원 모사품도 아닌 돌하르방들은 제 집도 아닌 곳에서 망을 서고 있으니, 그 모양이 처량하기 이를 데 없다. 거기에 더하여 돌하르방은 원래부터 두 기가 한 쌍이 되어 남의 집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였던 것처럼 제주를 찾는 이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제자리를 찾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오해까지 불러일으키는 상황은 미안함을 넘어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제주성에 세워졌던 돌하르방은 모두 24기였다. 남문의 돌하르방은 현재 제주공항·삼성혈·관덕정(뒤에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으로 이동) 앞에 각 2기씩, 그리고 목석원에 있다가 제주돌문화공원으로 옮겨간 1기가 그것이며, 1기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서문의 돌하르방들은 관덕정 4기, 동문로터리 근처의 구 명승호텔 2기, 구 삼천서당 2기 등으로 나누어 배치되었다가, 동문로터리 부근의 4기는 삼성혈 건시문 앞과 제주대박물관 앞으로 각각 2기씩 옮겨 간다. 동문 앞의 돌하르방은 1960대 초까지 제자리에 있었으나, 현재는 서울의 국립민속박물관에 2기가 출향했고, 구 제주대를 거쳐 현재는 제주대 정문에 2기, 제주시청에 2기가 있으며, KBS제주방송총국 정문에 2기가 서 있다.(강문규, 《경술국치 100년, 제주의 원풍경》) 이와는 별도로 장승연구로 유명했던 민속학자 고 김두하(金斗河)는 북수구 밖에 4기가 더 있어서 총 28기가 있었다고 한다. 

▲제자리를 잃고 떠도는 제주성의 수문장이었던 돌하르방들. 좌로부터 KBS제주방송총국 정문, 제주대학교 정문,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정문 앞에 2기씩 서 있는 돌하르방들. ⓒ제주의소리

어쨌든 제주도의 가장 상징적인 문화유산인 돌하르방의 원형적인 배치를 볼 수 없다는 것은 현재 제주도의 문화재 당국이나, 문화재위원들 모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대목이다. 필자 역시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필자는 2008년부터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사라진 것도 복원하는 판에 온전하게 있는 것도 제자리에 갖다 놓지 못하는 현실은 우리들의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의 부재와 위원으로서의 임무방기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전시실 내에는 과거 제주성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제주성의 전모는 대충 알 수 있게 만들어 놓았지만, 돌하르방이 있어야 할 위치와 석상의 모형은 빠져 있다. 또한 제주돌문화를 콘텐츠로 전시한 곳들, 예를 들어 <제주돌문화공원>이나 <제주돌하르방공원> 등에서도 돌하르방을 수없이 복각해 놓기는 하였지만 돌하르방의 원래 쓰임새를 알 수 있도록 원형대로 복원된 전시는 볼 수가 없다. 대부분 돌하르방의 조형적 활용가치만 우선시하고 이런 문화사적 의미들은 간과해 버린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제주성 남문터의 훼손과 문화재위원의 입장

한때 지자체 시절의 제주시가 제주성의 남문인 정원루를 복원할 구상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남문이 복원되었더라면, 지금쯤 앞에 얘기한 돌하르방의 원위치 복원의 꿈이 일부라도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멸실된 제주성의 삼문 중 문루만 복원한다면 가장 유력한 곳이 남문이었다. 남문은 사진자료까지 남아 있고 장소 또한 주도로에서 비켜나 있는 상태여서 복원 1순위의 대상지였다.

▲1910년대의 제주성 남문 전경. 제주성 3문 중 유일하게 사진이 남아 있다. 남문터에 들어선 빌라의 모습, 그나마 보이던 제주바다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제주의소리

하지만 그 남문 복원 이야기가 피어오르던 시점인 2007년 10층짜리 아파트가 솟아올랐다. 가뜩이나 남문 복원의 꿈을 기대하던 사람들은 그 실망감을 이루 감출 수가 없었다. 이 남문은 결국 복원되지 못했고, 시민회관에서 중앙로로 향하는 도중에 바라보는 쪽빛 제주바다의 원경과 스카이라인마저 삼켜버린 이 건축물은 지금도 당당히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분명 이곳은 유물 산포지이기도 하고, 제주성의 유지인 것은 누구나 알기 때문에 반드시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얻어야 건축행위가 가능했던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축허가가 났다는 것은 제주도문화재위원회에서 이를 승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2006년 2월 10일자 신문기사다. “제주시 관계자와 제주도문화재위원 등은 9일 현장을 방문, 제주시 삼도2동 184의 9 일대(남문로터리 북서쪽 방향)가 옛 제주성벽인 것으로 확인했다. 이들은 현장을 살펴본 후 이 일대가 제주성 중 남문성벽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고 나와 있고, 향후 추가 발굴의 필요성까지 강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곳에 신축허가는 떨어졌다. 그때 현장방문에 나섰던 위원 중에는 신축빌라의 건축허가에 동의했던 분도 있었다.

당시 문화재위원들이 이 신축을 동의해준 것은 현재까지도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아니 앞으로도 이 아쉬움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물론 당시 위원들은 주민의 삶과 관련된 민원으로서의 문화재 보존의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보존이냐 주민 편의냐의 문제는 항상 도시개발 등과 관련하여 긴장관계에 놓이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재위원은 문화재 보존에 대해 가장 보수적인 가치와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문화재위원들은 문화재보존에 관한 한 도시개발이나 기타 주민들의 삶의 편리함에 대한 요구가 아무리 거세다 하여도 문화재보존을 중심에 둔 가치를 옹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도시개발이 난개발로 이루어지는 상황과 문화재발굴비용마저 개발자에게 물리게 하는 현실에서는 문화재 보존의 보루는 결국 문화재위원들뿐이기 때문이다. 문화재위원들의 권한과 입장은 위원 개인의 것이 아니라, 제주역사와 문화의 오랜 통시적 연속성 위에 제주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제도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권한은 위탁된 권한이며 이 권한의 귀속성은 당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후세대, 즉 미래의 가치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국가에서 법으로 정하여 그 권한을 위임한 것 아닌가? 

행정과 문화재위원들의 이해는 가끔 상충할 수 있다. 왜냐하면 행정은 주민들의 편리한 삶을 영위하게 해야 할 서비스기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정은 현재의 필요성과 주민들의 요구를 중시하게 되어 있고, 문화재위원들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문화재의 가치를 중심에 두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는 지속적으로 긴장관계일 수밖에 없으며, 행정의 입장 역시 시대적으로 그 가치를 달리하면서 바뀔 수 있다. 즉, 주민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 주민들의 욕구 역시 이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긴장관계의 한 축인 문화재위원회의 입장은 보수성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민인식의 변화와 행정태도의 변화의 가늠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러한 원칙과 입장이 종종 무너지기도 했는데, 제주시 남문복원대상지 내에 떡 하니 들어선 이 건축물의 경우가 그런 결과이기도 하다.

잘 못하면 천년 고도(古都)의 마지막 흔적을 날려버릴 <구도심 재정비 촉진사업>

최근 들어 구도심을 살리자는 이야기는 도민 다수의 공감대를 얻고 있다. 하지만 이 공감대의 형성이 주로 제주시 구도심의 활성화, 즉 경제적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우려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 경제는 단순히 산업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6·70년대 학생들의 포스터에 나오는 굴뚝이 높이 솟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업근대화의 모습이 산업활성화와 경제발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경제는 문화의 경제라는 화두가 대세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근에 시도된 구도심의 경제활성화와 도심공동화문제의 해결책으로 등장하는 것들은 그림만 다를 뿐 높이 솟은 아파트와 상가가 즐비한 경제적 사고에서 비롯된 상상력이 가동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발표된 구도심 관련 보고서들은 3종이 있다. 이 중 가장 먼저 나온 것은 필자도 참여했던 2007년의 제주시가 발주했던 <제주시구도심경제활성화보고서>와 2008년 주택공사에서 추진했던 <제주시구도심도시재생사업보고서> 그리고 현재도 진행 중인 <제주시 구도심 지역에 대한 재정비 촉진계획안>이 그것이다. 그러나 앞의 보고서는 도시재개발이 아닌 도시재생의 차원에서 제주성 복원과 문화관광 활성화를 통한 구도심권역의 경제활성화를 제안하고 있으나, 뒤의 두 보고서와 계획안에 따르면 다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제주성을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경관이 형성되어 온 도시의 역사는 간데없고 구도심권을 두부 자르듯이 2분할한 상태로 구상되고 있다. 이는 개발의 편의를 위한 촉진지구 지정에 따른 발주처의 요구에 의한 것이겠지만, 제주시의 경관을 완전히 갈아엎는 시도인 것이다. 최근 이 계획이 LH공사의 내부사정으로 인해 표류할 것이라는 예고가 나오는 중에도 주민공람을 통한 주민들의 요구는 대부분 이번 기회에 재개발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대부분이다. 개인의 사적 재산권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수긍이 가지만, 애초부터 구도심이 자기 땅이었던 사람은 없다. 그것은 모두 시대적 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 구도심의 토지 소유주라 할지라도 한시적 소유자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시 구도심처럼 어느 한 세대에만 머무르지 않는 유구한 역사전통을 지닌 도심권의 재개발은 특히 어떤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지 신중한 도시발전철학의 문제가 제기된다.

▲주택공사에서 추진했던 <제주시구도심도시재생사업보고서>에 표현된 구도심개발 구상도. 동·서문로를 잇는 도로의 북측구역만 따로 떼어내 원도심의 기억을 지우고 신기루 같은 고층빌딩과 아파트를 세우는 전형적인 뉴타운 구상이다. ⓒ제주의소리

▲현재도 진행 중인 <제주시 구도심 지역에 대한 재정비 촉진계획안>에 나타난 구도심도시개발 구상도. 위의 계획발표 후 많은 논란과 의견개진에 의해 제주성 유지부분은 살렸으나, 여전히 고층아파트와 제주성을 양분하는 기본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제주의소리

제주시 구도심은 원래 일도·이도·삼도리와 산지천 북단의 건입포를 낀 원동들이 하나로 묶이면서 대촌(칠성대촌)으로 확장되었고, 또한 이를 기반으로 조선시대에는 제주성이 들어서면서 전통경관을 구성해왔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제주시 구도심은 복원된 목관아를 중심으로 동·서문로를 잇는 주도로의 양측으로 경관이 형성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구도심은 한 덩어리인 셈이다. 그런 한 덩어리의 경관과 공간을 두 도막 내어 일부만 개발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또한 구도심의 활성화를 인구의 유입을 통해 이루겠다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못하다.

그동안 제주시의 확장은 뉴타운 개발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 방식의 문제점은 인구유입이 한정적인 제주도의 경우 뉴타운개발 이후 필연적으로 구도심의 공동화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현재 제주시 삼양에서 노형권까지 확장된 도시개발은 대부분 아파트 개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다시 이곳에 아파트를 조성한다는 것은 인구증가가 급격하게 일어나지 않는 이상 타 지역의 또 다른 공동화를 불러온다는 계산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 공동화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신임 제주시장은 향후 도시확장은 더 이상 추진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현재 신축 중인 삼화지구, 일도지구와 향후 추진예정인 노형 2차지구까지 마무리되면, 구도심의 건축수요는 공급이 수요를 앞지를 것이며, 구도심지역의 수요는 그만큼 약화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제출된 계획안에 따르면 여전히 구도심 활성화를 인구유입을 통해 꾀하겠다는 구태의연한 사고와 토건적 재개발 방법으로 접근하는 한계가 있다. 이는 미래지향적이지 못함은 물론이요, 구도심의 역사성을 담보하지도 못하고 또다시 타 도심권의 공동화를 몰고 올 신도시 구상에 다름 아니다.

제주시를 제외한 도내의 타 지역, 특히 서귀포시의 경우는 인구감소로 인한 도시의 전반적인 침체를 가져오고 있다. 물론 도내에서 제주시로의 인구집중의 배경은 2세 교육·편리한 생활여건(?)·문화적 환경 등 다양할 것이나, 무엇보다도 인구유입이 가능한 건축개발이 계속되면서 인구유입의 환경이 지속적으로 보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탐라 천년의 고도 구도심의 역사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프로젝트,
제주성 복원과 고도(古都) 복원사업

개념으로서의 공간은 시간이 배제된 3차원의 세계다. 또한 이 공간에는 내러티브가 없다. 하지만 장소는 그저 기하학적이고 물리학적인 차원의 텅 빈 공간이 아니라 그 안에 축적되고 중첩된 시간의 내러티브, 즉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즉 시간이 남긴 흔적-문화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시 구도심지역은 단순히 재개발의 대상인 도면과 지표 위의 무장소성의 공간이 아니라 누대에 걸쳐 축적되어 온, 제주인들이 환경에 조응하면서 역사와 문화를 진전시켜 온 정체성을 지닌 ‘장소’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도심의 재생전략은 철저하게 이 구도심의 장소적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져야 하며, 이 장소적 정체성 자체를 도시재생의 핵심요소 또는 특성으로 발현시켜야 할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현재 제주시 구도심 재생에 대한 대부분의 인식적 결함은 경제활성화라는 ‘죽은 상권을 살린다’는 입장에서 검토되고 있는 점이다. 구도심의 도시재생은 좀 더 다양한 관점과 가치들에 의해 재담론화되어야 한다. 구도심의 문제가 상권침체에 따른 공동화문제뿐인지 그 문제를 치유하는 방법만으로 구도심의 모든 가치를 살려낼 수 있을 것인지 성숙한 토론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따라야 할 것이다. 그동안 행정에서는 다분히 토지주와의 문제만으로 이 부분을 접근한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구도심이 역사적 장소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다양한 차원에서의 소유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구축되어온 장소인 구도심은 기실 당대의 토지소유주나 건축주의 소유개념을 넘어서는 제주공동체 사회구성원 다수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문화적·역사적이고 공공적인 가치가 이미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주의 옛터(제주시 발간)》에 조사된 문헌상에 나타난 조선시대말의 제주성과 그 외곽의 유형문화유산의 분포도. 현재 이 유적들의 유구와 기단들은 구도심지역의 지표 아래 묻혀 있다. 시간이 중첩된 도시는 사실 문화의 지층을 쌓은 박물관이다. ⓒ제주의소리

어떤 도시재생전략을 취하느냐에 따라 구도심의 장소적 정체성의 가치는 활용되거나 사장될 것이다. 또한 구도심의 장소적 정체성을 활용하지 않은 재생전략의 경우, 즉 현재처럼 고층아파트단지를 건설하거나 전혀 새로운 신세계로서의 구도심을 재생(아니, 이때는 재개발이다.)한다고 해도 별로 성공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구도심지를 제외한 타 도심권과 외곽에 과거 구도심의 핵심적인 도시구성요소였던 학교·관공서·식당가·대규모 주거단지 등이 이미 입지해 있기 때문에 구도심이 과거와 같은 영화를 누릴 기회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도심의 도시재생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즉, 제주특별자치도의 핵심산업인 관광, 그중에서도 역사문화관광과 접목시킨 경제활성화전략, 저밀도의 친환경적인 주거시설의 도입을 통해 삶의 질을 보장하는 친환경도시전략, 그리고 탐라 천년 고도의 경관을 살린 역사문화공간의 재생을 통한 전통경관재생전략이 그것이다.

이는 인위적인 인구유입에 의한 경제활성화나, 부동산가치의 수요에 기댄 재개발전략과는 차별성을 두는 것으로 향후 100년을 결정할 중요한 전략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는 철저하게 구도심의 타입캡슐 안에 담겨 있는 오래된 미래를 도시발전전략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일이기도 하다.

관광과 관련하여 구도심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 최근 스토리텔링이 유행이다. 또한 스토리텔링은 관광의 새로운 영역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모든 문화관광은 스토리텔링관광이기도 하다. 즉, ‘이야기하기’라고 번역되는 이 문화트렌드는 사실 구도심의 또 다른 재생전략으로도 읽힌다. 왜냐하면 시간이 중첩된 이야기가 있는 장소로서의 구도심만큼 스토리텔링 기법을 다양하게 접목시킬 곳도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억을 담보한 구도심의 지층은 스토리의 보고이다. 이제 그것들을 꺼내어 거주주민이나 방문객들에게 다양하게 방법으로 이야기한다면,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관광객들이나 많은 도민들의 발걸음이 하나 둘 구도심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꿰는 중심에는 제주성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제주성은 그 모든 이야기를 담은 그릇이기 때문이다.

제주성 복원, 100년의 밑돌을 다시 놓은 새로운 역사(役事)
 
필자가 여기까지 장황하게 제주시 구도심과 제주성의 복원에 대해 이야기를 이끌어 온 것은 마치 재현의 진정성, 시간이 삭제된 유물의 복원에만 혈안이 된 테마파크의 업자처럼 오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이처럼 제주성의 복원을 싸고도는 것은 최근 건축학계의 기억의 해법, 장소의 재인, 도시재생 등에 대한 코드를 몰라서가 아니다. 문제는 제주 섬이 겪어 온 기나긴 시간의 기억을 담은 역사적 정체성, 장소적 정체성을 어떻게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가이다. 이는 우리가 어떤 그리고 무엇으로 과거를 기억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제주성의 복원은 결국 식민도(植民刀)에 난자당해버린 문화전통의 파편을 모으는 일이다. 결국 제주문화의 단절의 간극을 잇는 일은 그 파편 하나하나에 서린 기억의 회생을 통해 우리가 입버릇처럼 외치는 제주문화정체성을 경관적·촉각적으로 공유하자는 데 있다. 

생각해보자 전편(제주담론3-경술국치와 제주성1)에 소개한 100년 전 제주성과 북수구가 담긴 색 바랜 사진 한 장을 보는 이들은 그 사진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다면, 그곳이 지금의 산지천변이나 측후소 부근이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관이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흑백의 사진 한 장만으로도 우리의 문화적 전통, 기억 속의 경관은 재조직되기 시작한다. 일제에 의해 삭제된 100년 전의 경관이 다시 우리의 기억에 들어오는 것이다. 즉 기억은 인식의 재영토화를 통해 다시 한 공동체의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을 재구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주성의 복원이 설령 용인민속촌과 같은 테마파크에 함몰된 상업적인 도발로 오해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경관적·촉각적으로 역사적 기억의 장소를 회생시키는 존재가치를 적어도 부여받게 되지 않을까?

이러한 불가결한 필요성은 식민지를 거치면서 구축되어온 건축적 공간과 경관에 대해 인문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지금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과거 제국주의 종주국의 도시는 잘 보존된 전통경관과 문화적인 풍요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근대 제국주의 패권국들의 도시계획의 역사는 전통과 미래를 적절하게 고려하면서 그들 식의 경관과 건축을 세련되게 축조해 온 역사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의 신작로와 산지항은 식민지배의 효율성만을 우선으로 해서 축조되어진 것들로, 이로 인해 전통적인 마을과 성곽, 누대에 걸친 생활문화공간은 일거에 파괴됐고, 시각적으로 삭제 당했다. 그리고 다음 세대들의 기억에서도 누락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제주성 복원은 식민지 근대에 대한 응전의 역사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그것은 문화전통이 스며있는 장소에 대한 기억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성의 복원은 적어도 이러한 점을 공유하면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올해는 ‘경술국치(庚戌國恥)’ 혹은 ‘일한병탄(日韓倂呑)’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00년의 시간은 오늘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전제이기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제주도지역의 지식인 사회에서나 일반도민사회에서도 이 경술국치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분위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경술국치를 성찰한다는 것은 곧 오늘의 기원을 사유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과거의 성찰이 곧 미래의 모색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현재 우리의 삶을 가장 극명하게 규정했던 과거의 한 시기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는 곧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식민의 경험은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바람직하지 않았던 역사이다. 이로 비롯된 정치·군사·경제적 침탈의 결과가 오늘의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바가 크다. 가장 가까이는 이 지면을 통해 이야기하는 제주시 구도심의 사라져버린 제주성이 그러하며, 저 알뜨르 평야에 영원한 불청객으로 붙박인 일본군군사유적이 그러하며, 제주섬 곳곳을 구멍 낸 진지갱도들이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주성이 삭제되어 버린 천년 고도 제주시 구도심의 경관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되물어야 할 것이다. 저 사라져 버린 돌무더기와 함께 우리의 무엇이 사라져 버렸는지 그리고 그 구도심에 다시 살려내야 할 경관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이제 그 기회의 끝에 우리는 와 있다. 90년대 아름다운 탑동의 먹돌바당을 메워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지, 후손까지 생각하는 긴 안목은 무엇이고 단견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하고 천박한 것인지를.

가끔 세상에는 황당한 감동이 인간의 긍정적 가능성을 넓히기도 한다. 인간이기에 가능한 감동을 연출하는 판타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느 시대에도 존재했다. 우근민 새 도정이 이 경술년이 채 가시기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제주의소리
전에 산지항 바닥에 일제에 의해 수장된(?) 저 제주성의 밑돌을 다시 끄집어내는 퍼포먼스를 벌일 수는 없을까? 최근 탐라문화권사업을 공약사업으로 확정한 우 도정에서 그 사업의 핵심프로젝트의 하나일 수밖에 없는 제주성 사업을 상징하는 문화이벤트를 벌일 수는 없을까? 이를 통해 제주도민들에게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키고 저 유장했던 제주성의 복원을 함께 꿈꿀 수는 없을까? 

기대해 본다. 100년 전에 수장된 제주인의 자존심, 침탈당한 우리 전통문화의 편린들을 건져 올려 도래할 향후 100년의 밑돌을 다시 놓는 멋진 도지사를. /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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