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철의 제주해안따라가기(12)] 애월곽지금성해안

▲ 멀리서 바라본 애월연대의 모습과 애월연대 위의 모습.ⓒ홍영철
애월포구에서 애월읍내로 나와서 일주도로를 따라서 간다. 애월읍내의 서쪽 끝 지점, 주유소를 지나면 은혜전복이라고 쓰인 표지판을 따라 시멘트길을 가다 보면 애월연대가 나온다.
애월연대는 제주의 방어유적 중 하나로 해안지역의 비교적 높은 구릉에 네모난 형태의 돌담으로 만들어졌다. 연대에 오르니, 주변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외적이 침입할 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침입사실을 주위의 연대에 알려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였다. 애월연대는 사람들이 왕래가 적은 곳에 위치하여 찾기가 쉽지 않다. 큰 길 입구에 표지판이라도 써 놓으면 좋을 듯 싶다.
 
▲ 배무숭이 소금밭 원경과 평평한 돌을 깔아 소금밭을 만든 모습.ⓒ홍영철
연대 앞에서 길이 나누어지는데, 왼쪽 길로 접어 들어 내려가다 보면 양식장 사이에 범상치 않은 해안이 나온다. 바닷물이 있는 곳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인데, 바닥을 보면 인위적으로 돌담을 쌓은 듯한 흔적이 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돌담을 쌓은 안쪽에는 평평하게 돌이 깔려져 있다. 이곳이 배무숭이 소금밭이다. 구엄소금빌레는 평평한 바위에다가 찰흙으로 칸을 나누어 그 위에서 소금을 생산하였는데, 이곳은 좀 다르다. 구엄소금빌레 처럼 평평한 바위가 있는 곳은 소금을 만들기에 비교적 좋은 조건이었으나, 제주도 전지역에 그런 지형이 있을 리 없다. 이 곳은 물이 많이 들어오는 때에만 바닷물이 차는 곳으로 물이 들어왔을 때 그 물을 가두어 소금을 만들었다. 소금밭은 넓적하고 평평한 돌을 촘촘히 깔고, 그 위에는 모래를 깔았다. 바닷물이 들어올 때, 소금밭에 물을 가두어 증발시킨다. 일정정도의 염도가 되면 모래가 섞인 물을 평평한 돌 위에서 흘려 소금물과 모래를 분리하고, 소금물을 솥에서 삶아 소금을 얻었다고 한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주민들이 말로는 이곳은 한사람이 운영했던 소금밭으로 면적에 비해 생산량이 적은 편이다. 이 곳을 보면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금을 얻기 위해서 어려운 조건을 감내하면서 소금을 생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이 소금밭이었다는 그 어떤 표지도 없다. 오히려 양식장으로 향하는 길을 넓히면서 소금밭은 점차 무관심속에 사라지고 있다.
  
▲ 한담해안가. 과오름의 거친 아아용암으로 이루어진 기암괴석과 그 속에서도 삶을 이어나갔던 작은 포구가 인상적이다.ⓒ홍영철
배무숭이 소금밭에서 다시 왼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가면 곽지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해안산책로가 있다. 곽지해수욕장까지의 거리는 대략 1.2km인데 애월리의 마을인 한담마을을 지나 곽지까지 이어진다. 한담마을은 해안절경이 빼어난 곳으로 해안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곽지까지 이르는 곳곳에 기암괴석이 양쪽에 늘어서있고, 작은 배 한 척이 정박할 만한 포구와 작은 하얀 모래사장이 해안가의 진주처럼 빛난다. 그리고 사시사철 산책로 주변에서 피고지는 해안가의 식물들이 좋은 말동무가 된다. 그냥 현무암으로 깔린 길의 안내에 따라 걷다보면 진모살개에 이른다.

▲ 곽지해수욕장 옆의 진모살개, 주위에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갖가지 꽃들이 피어있다. 위쪽 가운데의 갯메꽃과 오른쪽의 벌노랑이, 아래쪽 왼쪽부터 암대극꽃, 애기달맞이꽃, 추운 겨울을 이겨낸다는 인동초.ⓒ홍영철

‘진모살개’라는 의미는 긴모래포구란 뜻으로 말 그대로 모래사장 위에 있는 포구다. 포구라기 보다는 모래가 깔린 수영장 같다. 평화롭게 보이는 포구에 기대어 쉬고 있는 배 한 척이 한가롭고 편안하게 보인다. 지금이 여름철이라면 저 배처럼 한가롭게 물 속에 잠기고 싶다.
  

▲ 곽지해수욕장에 이르렀다. 곽지해수욕장의 명물인 과물남탕-여름철에는 시원한 폭포로 변한다. 과물이 중요한 생명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물허벅을 진 석상들.ⓒ홍영철

진모살개를 지나면 곽지해수욕장에 이른다. 곽지모래사장은 조개껍데기 등 패각이 부서진 모래로 순백색이다. 일부 지역의 해안사장이 급경사여서, 수영할 때는 주의를 해야 하지만, 아름다운 모래사장과 물빛을 가진 곳이다. 또한 모래사장의 서쪽에는 ‘과물’이라는 용천수가 있다. ‘과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곽지 인근에 있는 과오름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여기 백사장에 있는 용천수인 ‘과물’은 풍부한 수량으로 인근의 다른 마을에서도 물을 얻기 위해 먼 길을 걸어 왔다고 한다. 과물 입구에는 그 때의 모습인 듯 물 깃는 아낙네의 모습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여름철 해수욕을 마치고 이 용천수에서 몸을 씻는 즐거움은 여기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노천 여탕에 가까이 가서 애꿎은 의심을 받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 금성리 남당(해신당)의 모습과 재물을 올렸을 듯한 자연석, 그 가까이에 용천수인 지장샘이 있다.ⓒ홍영철

곽지해수욕장을 지나면 더 서쪽으로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절이 눈에 띠고 그래서 조금 돌아가야 한다. 절 앞으로 비포장 길이 있어 건너니, 여기서부터 ‘금성리’라고 한다.  먼저 바다와 접한 용천수가 눈에 띄여 다가가서 보니 한 할머니가 빨래를 하고 있다. 이 용천수의 이름을 물어보니 할머니는 멀리서 시집을 와서 모른다고 대답한다. 대답대신에 옆에 ‘남당(해신당)’이 있다고 귀띔해준다. 좁은 길을 더듬어 가니 시멘트로 정자처럼 만든 건물이 나온다. 해신당으로 보기에는 너무 정취가 떨어진다. 시멘트로 발라서 일까? 기대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하지만 남당 옆의 자연석위에 파놓은 사각형의 홈은 그 곳에 소박한 제물을 올려 놓았던 곳이 아닌가 생각이 되어 정감이 간다. 남당을 나와서 다시 용천수가 있는 곳으로 가던 도중, 밭 한가운데의 큰 비석이 보여서 가보니 이 곳이 예전의 묘터였다는 내용이 씌여있고, 고맙게도 그 곳의 위치를 밝히면서 지장샘 근처라고 쓰여있다. 지장샘이라는 지명은 용천수의 이름으로 꽤나 많은 이름이지만, 아까 할머니에게 물었던 그 용천수의 이름이 지장샘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묘비나 비석을 잘 살펴보면 그 곳의 옛지명을 적어놓은 곳이 많다. 하지만 너무 신뢰할 것은 못된다.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이두식으로 표기해 놓은 것 때문에 원래의 이름이 더 햇갈릴 때가 있다.

▲ 정짓내로 불리었던 금성천과 금성천 하류의 모살개. 옛 문헌에서는 곽지포로 적혀있어 금성리가 곽지리의 한 마을이었음을 말해준다.ⓒ홍영철
금성해안은 아주 짧은 것 같다. 몇 백 미터 가지않아 금성천이 나오고, 그 다음은 한림읍 귀덕리로 접어든다. 금성리는 원래 곽지리의 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 증거는 금성천 끝에 있는 작은 포구의 이름이 ‘곽지포’이고 ‘모살개’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이제 ‘정짓내’라고 불렸던 금성천을 지나면 한림읍으로 접어든다. 걸으면서 어느새 정이 든 애월의 마을들에게 인사를 하고 금성천의 다리를 넘는다.

※ 홍영철님은 제주의 새로운 관광, 자연과 생태문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대안관광을 만들어 나가는 (주)제주생태관광(www.ecojeju.net )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제주의 벗 에코가이드칼럼’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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