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해방직후의 재일동포

▲ 1948년 재일동포들이 세운 민족학교를 일본 정부가 강제로 폐쇄하면서 이에 저항한 재일동포 사이에 이른바 '한신교육투쟁'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16세 한일 청소년이 일본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으로 확산된다. 사진출처=위키백과
1945년8월15일, 일본은 전쟁에 졌다고 양손을 들고 말았다. 무조건 항복을 한 것이다. 무조건 항복이란 조건 없이 승전국의 말을 잘 듣겠다는 것이다. 일본이 전쟁에서 지면서 바로 GHQ(General Headquarters, 連合國軍最高司令官總司令部)가 들어섰다. 連合國이란 승전국을 말하지만, 미국이 중심이었다.
 
미국, 즉 GHQ가 패전국 일본을 통치 한다. GHQ가 직접 일본 구석구석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가 일본을 통치하게 하고, GHQ가 일본정부를 통치하는 형식, 간접통치 형식을 취한다. 전쟁에 패전한 일본정부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GHQ가 있어서, 사사건건 GHQ가 간섭 지도를 하는 형식이다.
 
이 GHQ는 1952년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와 함께 활동정지를 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가 실질적 일본의 독립을 의미하며, GHQ시절은 미국의 점령지였고, 미국의 식민지 였다.
 
초대 GHQ 사령관은 맥아더 원수이다. 맥아더 장군은 일본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다. 동상까지 있다. GHQ 사령관으로 일본을 통치하면서, 오늘 일본의 기초를 만들었다. 무장 포기로 유명한 지금의 전쟁 후 헌법을 제정하고 각종 봉건적인 제도를 서구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평화의 나라를 만들어 지금의 세계 제2위의 경제 번영국의 기초를 만든 은인이란 의미이다.
 
일본은 또 일본 국민은 이상하다고 느낄 때가 가끔씩 있다. 일본은 전쟁에 지기는 했지만, 며칠 전까지 미국과 죽이고 죽는 전쟁을 한 철벽 원수지간이었다. 그런데 미국 GHQ는 일본에서 활동하는데 어떤 지장도 받지 않는다. 감정이 격한 일본 국민 한 사람이 점령군 미군과 싸움이라도 할 것 같지만, 그런 기록은 별로 없고 국민들이 협조를 하는 것이다. 거기에 미군 병사들을 위한 위안소를 설치하는데도 국민들이 순조롭게 협조하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당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 2대 진영이 서로 세력 확대에 박차를 가하는 시대, 또 양 진영은 냉전 대립에 돌입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손을 잡고 전쟁을 같이 한 소련, 또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가 서서히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소련의 남하와 공산주의의 확대를 미국이 막아야 하는 것이다. 마침 그때 중국은 모택동의 공산국 중국을 건국하고, 우리 한반도에서는 6·25전쟁까지 발발하게 된다. 다급 해진 미국은 소련 공산주의를 막는 교두보로서 일본을 이용하는 것이다.
 
일본을 소련을 막는 방파제로서, 미국 말을 잘 듣는 나라를 만들어야 결국은 미국도 안전한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자기의 부하의 나라로 만들어 충실한 부하의 노릇을 하게 하고, 그 대신 여러가지 혜택도 주는. 그런 나라를 만들었다. 가장 큰 혜택은 천황제의 존속이고, 무장을 시키지 않고 미국이 대신 국방을 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일본 국내에는 700개에 달하는 미군 기지가 있는 나라가 되었다. 미군이 마음먹은 데로 일본국내를 쓸 수 있는 나라가 되버린 것이다.
 
국방을 미군이 해 주는 대신, 국방비는 절약이 되는 것이다. 그 절약된 돈으로 경제 발전에 돈을 쓸 수가 있어, 결과 지금과 같은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 국민은 행복한 나라가 된 것이다.
 
한국 중국으로부터 지금도 문제가 되는 있는 식민지시대의 여러 가지 문제들, 일본 패망 후 미국이 앞장서서 그런 문제들을 처리했었다면 이런 문제는 해결이 다 되고도 남을 문제였다. 그러나 미국은 자기들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일본의 요구도 들어주는 식의 통치를 했기에 지금까지 남아있어, 일본이 발뺌을 하려 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일본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결을 게을리하거나 알면서도 넘어간 미국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될 문제들인 것이다.
 
8월15일 우리는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이했다. 대다수의 우리 동포들은 귀국을 선택했다. 1945년 일본에 있었던 동포는 약210만명(1944년까지는 일본 국내에서 정확한 통계자료가 발표가 되지만, 1945년은 추정자료, 240만명이란 추정도 있다). 1946년3월 일본에 있는 동포는 64만7천명. 1945년8월15일부터 다음해 1946년3월까지 3분의2 이상의 동포, 약 150만명이 귀국을 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일본에는 남은 동포는 64만7천명인 것이다. (98%가 남한(한국) 출신. 북한 출신은 2% 이하) 그 64만7천명중에 약80%에 해당하는 51만4천명도 귀국을 희망했다. 그러나 1950년에 일본에 남아 있는 동포는 55만4천명이다. 대다수가 귀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대다수의 동포들이 귀국을 하지 않았을까?
1948년 제주도 4.3사건, 1950년 6.25전쟁. 등의 정세 불안. 귀국 후 생활이 막연, 한국 내 식량사정의 악화, 또 콜레라 등 전염병도 유행하고 만다. 정세불안으로 인한 생명불안, 생활불안의 이유 때문에 대다수의 동포들은 조금 더 기다려 보지만,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한국 사정은 더 나빠져 간다.
 
오히려 제주도와 한국은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한국으로 귀국한 동포들이 일본으로 되돌아오는 역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되돌아오는 것은 또 쉬 운 일이 아니었다. 밀항 길이었다. 남아있는 동포들이 이런 조국의 현상을 보게 된다.
 
특히 제주도는 4·3사건으로 수 만명이 희생되는 대전란이었다. 이때 약3천 명이 일본으로 밀항을 오게 된다.(朝日新聞에서) 해방과 함께 귀국선을 탈 수 있는 사람들은 몸 움직이기가 쉬운 사람들이 었다. 자식이 있고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그 만큼 몸이 무겁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생활 기반이 일본에 있는 사람들이다.
 
반출금지령이 있었다. 현찰로 1천엔, 물건으로 250파운드(약110Kg)까지만 가지고 배를 타라는 것이다. 맨몸 하나에 옷가지 몇 개만 가지고 배를 타 고 가라는 것이다. 당시 현찰 천 엔은 쌀 한 가마도 안 되는 돈이었다. 이런 것들, 당시의 GHQ의 지도에 의한 것이다.
 
그래도 자기가 운영했던 기계를 가지고 간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가미가제 비행기용 엔진도 만들었다는 큰 기업의 12주주 중 한사람으로 있던 중 28세되던 해에 해방을 맞자, 귀국을 결심하고 아예 배 한 척을 사서, 공장이 폭격을 맞고도 쓸만한 기계를 몇 대 싣고, 주주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가까운 지인들을 태우고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제주시 이호항으로 돌아 온 예도 있었다.
 
또 일본 자재를 가지고, 향리에 학교를 세운 유지들도 있었다. 1946년 오사카에 있는 제주시 신촌 출신 유지들이 모여서 향리 교육을 위해서 돈을 기부하고 힘을 모았다. 향리에 중학교를 세운다는 높은 의지로, 설계도를 본에서 그리고 그에 필요한 건축자재도 전부 배에 싣고서 제주도에 간다. 이렇게 해서 세운 학교가 '조천중학교' 이다.

일본에 남은 동포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나라 빼앗기고, 우리 말 못쓰고, 자기 이름 간데 온데 없고, 일본사람들 밑에서 개나 소 취급을 당하면서, 숨 한번 크게 못 쉬면서 일본에 살아온 사람이 해방을 맞은 기분은 과연 어떠했을까? 어제까지 사람 잡아먹을 것처럼 으스대던 일본사람, 전쟁에 지고 나니 쥐구멍을 찾아야 된다.
 
해방이 되자 곧 우리 민족 단체부터 만들었다. 1945년10월에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連盟, 조련 朝連)을 결성한다. 일본에서 우리 민족에 의한 우리 민족을 위한 최초의 민족 단체이다. 처음은 공산주의자도 민족주의자도 협화회 간부였든 사람도 다 모이는 범국민적 단체를 하자는 것이었다. 강령으로는 조국 건설에 헌신 노력, 체류동포의 생활안정, 귀국 동포의 편의 제공 등이었다. 우리 글로 만든 신문도 발행하기 시작했다.
 
1946년 임시대회 때부터 좌경화로 기울어져 가며, 협화회 간부를 했던 사람들을 추방한다. 좌경화를 우려한 사람들도 이 단체를 떠나기 시작한다.
 
1947년 전국대회에서는 체류동포의 생활권 옹호가 추가 되면서, 서서히 재일동포의 정착운동으로 활동이 변한다. 또 북한 정권 지지로 완전히 방침도 변하면서, 행사가 있을 때 북한 국기를 계양하고, 북한 정부의 선전활동에 들어간다. 그러나 GHQ및 일본정부는 북한 정부를 적대국으로 간주, 강력히 대응하게 된다. 1949년9월8일, 일본정부 및 GHQ는 '재일본조선인연맹'에 해산명령을 내리고, 재산을 몰수하고 만다. 해산 당시의 구성원수는 36만5천명이었다.
 
단체만 만들었는가? 아니다. 민족교육에도 매진했다.
우리 민족이 세계 어느 민족보다 우수한 것이 하나 있다. 교육이다. 교육에 관해서는 우리 한국도 또 북한도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들도 다 한마음 한 뜻이다.
 
해방과 동시에 민족 학교를 만들어, 제일 먼저 우리말 교육부터 시작한다. 당시의 동포의 관심사는 귀국이었다. 자식을 데리고 귀국하려고 하니, 자식이 우리말을 모른다. 해방 전 일본에서는 우리 동포 자제에게 우리말 교육 및 민족 교육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고, 만약 한다하면 목이 도망 갈 일이었다. 귀국할 자제에게 우리말 교육이 가장 시급한 문제여서 국어 교육부터 시작한다.
 
몇 개월이 지나고 1년 2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이젠 동포들이 일본에 남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이젠 국어교육만이 아니라, 일본에 남아있어도 우리민족으로서 살아가는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민족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한다. 설립된 학교는 가장 많을 때(1947년) 초등학교 541교 학생수 5만7천명, 중등학교 7교 학생수 2761명, 고등학교 8교 학생수 358명에 달한다.(在日コリアンの 史、明石書店、72페이지)
 
그러나 일본정부에서 보면 민족학교는 '눈에 가시'인 것이다. 일본정부는 한국사람 자녀들을 일본학교로 보내 일본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으로 밀고 갈려고 한 것이다.
 
일본정부 및 GHQ는 민족학교를 '치안문제'로 까지 몰아, 민족 교육 및 민족 학교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서 민족학교를 자주 운영하려는 동포들과 민족학교를 폐쇄 하려는 일본정부와의 충돌이 생기게 된다.
 
가장 정점이 1948년4월에 오사카와 고베를 중심으로 일어난 '한신교육투쟁(阪神敎育鬪爭)'이다. 이 투쟁과정에서 고베가 있는 효고(兵庫)현은 전후 처음으로 비상사태(계엄령)이 선포되고, GHQ 미8군 사령관이 요코하마에서 군용기로 날라 와 진압을 진두지휘 한다.
 
다수의 부상자와 검거자가 생기면서, 오사카에서는 16살의 김태일(金太一) 소년이 일본경찰의 총에 사살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
 
이 투쟁의 주체는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이었다. 조련은 이미 좌경화 노선으로 들어섰고 북한 김일성 정권을 지지한다. 일본정부 및 GHQ에서 보면 적대국 지지 외국인 세력이 일본 국내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산 명령을 받는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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