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납골당은 혐오시설 아니" vs 마을회 "종교 가장한 영리시설"

 
▲ 봉안당 건립 예정지에 대형 굴삭기가 터파기 공사를 멈추고 서 있다.

원당사(제주시 삼양동), 수정사(제주시 외도동)와 더불어 고려시대 제주의 3대 사찰로 손꼽히는 법화사(서귀포시 하원동)가 납골당 건립 문제를 놓고 주민들과 갈등이 벌어지는 등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지난 10월 7일 오후 하원동 마을에는 마을회관에서 알리는 긴급 방송이 울려 퍼졌다. 법화사 내에서 납골당 건립을 위해 대형 굴삭기를 동원해서 터파기 공사를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방송을 듣고 모여든 주민 수십 명이 급히 법화사 경내로 집결했다. 현장에 모인 주민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법화사 내부로 굴삭기를 반입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주민들 중 법화사 신도들도 있었다. 그들은 "신도들도 주차장에 감히 차를 몰고 오지 않는 포행 길에 어떻게 굴삭기 바퀴자국을 남길 수 있냐"고 항변했다.

결국, 이날 현장에 파견되었던 공사 업자들은 주민들이 현장에 도착하자 공사를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주민들은 공사가 완전히 무효가 될 때까지 전면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찰 측은 "납골당 사업은 화장문화를 적극 권장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장묘문화 개선 취지로 정부가 적극 권장하는 장묘사업"이라며, 납골당 시설을 혐오 기피시설로 판단하는 마을주민들의 태도에 아쉬움을 표했다.

▲ 주민들이 납골당 건립을 반대하는 펼침막을 사찰입구에 설치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이 된 봉안당 건립이 추진된 것은 2007년 이전 서부터다. 당시 이 사찰의 주지로 시무했던 S스님은 2007년 3월에 법화사 인근(하원동 1053 번지 외 3필지)에 연면적 1,990.07㎡에 3만기 정도의 봉안을 안치할 수 있는 규모의 미타원(봉안당 혹은 납골당)을 건립하겠다며 서귀포시청에 설치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그해 3월 20일에 설치신고는 수리되었다.

그런데 2007년 6월에 법화사 주지가 S스님에서 상좌(제자)인 D스님으로 바뀌었다. 당시 주지 S스님이 사업허가를 받아놓은 후 전남 지역 B사의 주지로 임명돼 법화사를 떠남에 따라 사업관리인도 D스님으로 변경 등록되었다. 

그런데 금년 8월에 '(주)제주 법화사 미타원'이라는 이름의 법인이 등장하여 전 법화사 주지였던 S스님으로부터 법화사 봉안당의 건립과 관련된 일체의 의무와 책임을 양수받았다. 법인체가 양수받은 업무 범위는 봉안당 건립과 관련된 토지의 소유권 일체, 하도급 업자들과 맺은 계약 일체, 착공과 분양에 관련된 업무 등을 모두 포함한다. (주)제주 법화사 미타원은 S스님과 S모씨가 공동으로 대표를 맡고 있다.

▲ 당초 계획했던 사업 예정지의 그림이다.

주민들은 법화가의 봉안당이 허가를 받을 당시에는 주지스님의 명의로 받아놓고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새로운 법인체로 주체를 변경한 것을 두고, 사업허가를 취소할 사유에 해당한다고 지적한다.

하원마을회 강용필 회장은 "납골당 업자들이 종교단체의 명의를 사용하면 사업 허가를 쉽게 받을 수 있는 점을 악용하여 법화사 명의를 사업에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며, "종교단체와 법인체에 적용하는 기준이 다른 만큼 사업 주체가 법화사에서 법인체로 바뀐 것은 사업허가를 취소할 만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관련법인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은 봉안당을 설립하는 주체를 가족 및 문중, 종교단체, 재단법인 등으로 구분하고 각각에 서로 다른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사업을 관할하는 서귀포시청도 관련 내용을 검토하는 중이다. 서귀포시청 사회복지과 관계자는 전화통화에서 "우리도 이 사안이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검토 중에 있다. 원점에서 재검토할 지, 중재가 가능한 사안인지, 사찰 측의 입장과 주민들의 입장을 모두 듣고 합리적 방안을 만들겠다"고 전했다. 

하원마을 주민들에게 법화사는 뿌리와도 같은 사찰이다. 조선시대 까지만 해도 이 마을의 이름이 하원리(下院理)였는데, '원(院)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院)이란 16세기 이전에 이 사찰 인근에서 행인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법화원(法華院)을 이르는 말이다. 하원(下院)이 하원(河源)으로 개칭된 것은 19세기 이후다.  

고려시대 법화사는 노비 280명을 거느리는 대가람으로 그 규모가 왕실에 버금가는 규모였고, 사찰 내에는 원나라 양공이 제작한 아미타삼존불상이란 거대 불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법화사는 조선초기에 폐원되었다가, 1914년 비구니 안봉려관과 도월선사의 노력으로 다시 건립되었다. 그러다가 4.3사건을 거치면서 다시 소실되는 아픔을 겪은 후 전 주지인 S스님이 30여년간 복원사업을 이끌어왔다.  

▲ 법화사가 납골당 건립 문제로 마을주민들과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주민 A씨는 "법화사에 봉안당을 건립하려는 일을 두고, 법화사의 신도 중 상당수가 하원마을 주민들이기 때문에 진정 사찰이 필요로 해서 짓는 거라면 주민들도 양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신도 2천명 남짓한 사찰에 3만기를 봉안할 대형 납골당을 건립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장묘문화가 바뀌고 있는 요즘, 전국 곳곳에서 납골당 시설 문제로 잡음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유골을 봉안하는 납골당에 대해 아직도 '혐오시설'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장묘사업 추진과 관련, 사찰측과 마을측의 갈등이 어떤 타협점을 찾을수 있을지 주목된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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