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33) 신화가 살아 숨쉬는 곳 - 온평리 혼인지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혼인지 전경 ⓒ김은희

온평리는 제주도의 삼성신화의 주인공인 고, 양, 부 삼신인과 벽랑국 삼공주가 혼인했다는 연못이 있는 마을로 유명하다. 삼성혈과 혼인지는 초등학교 수학여행의 필수 코스였다.

나는 초등학교 때 아무 생각 없이 혼인지를 처음 접했고, 대학생 때 역사학도로서 두번째 접했다. 대학생 때(20년이 넘었다) 본 혼인지는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당시는 제주도 기념물 17호로 지정만 되었지, 탐라국의 세 왕자가 결혼했던 곳이라고 믿을 수가 없을 만큼 초라하기 그지없는 연못이었다. 그때 많이 실망하고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관리와 보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도에서 본격적인 성역화 사업을 시작하여 지금은 관광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혼인지 주변과 신방굴을 정비하고, 전통혼례관, 삼공주 추원각, 사모정, 탐라생활사료관 등을 건립하여 제주도 창조신화를 구체화하고 있다.

혼인지의 전설은『영주지瀛洲誌』에 의하면,

“영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는데 홀연히 삼신인(三神人)이 땅으로 솟아 났으니 진산(鎭山) 북록(北麓)이 있는 모흥(毛興)이라는 지혈이 그 유적이다. 맏이는 고을나(高乙那)요 다음은 양을나(梁乙那)요 그 다음은 부을나(夫乙那)이다.

얼굴 생김새가 비범하고 도량이 활달하여 인간 세상에는 전혀 없는 자태였다. 짐승의 가죽으로 의복을 만들고 고기를 먹으며 항상 수렵으로 일을 삼으니 가업(家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자니(紫泥)로 봉한 목함(木函)이 동해로 부터 떠와서 해안에 머무르므로 것을 보고, 삼인이 내려와 목함을 열어 보니 그 안에는 알 모양으로 된 둥근 옥함(玉函)이 있었으며, 관대(冠帶)하고 자의(紫衣)를 입은 한 사자(使者)가 나와 옥함을 열은 즉, 청의(靑衣)를 입은 처녀 삼인이 있어 15∼16세가 되고 자색(姿色)이 출중하여 품질(稟質)이 단아(端雅)하였다.

좌석을 정제하여 같이 앉았고, 또 우마와 오곡의 종자르 가지고 금당(金塘)의 언덕에 내놓으니 삼신(三神)이 자축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하였다.

사자가 재배(再拜)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나는 동해 벽랑국(東海碧浪國)의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 삼녀를 낳아 장성하였으나 배필을 구하지 못하여 주야로 한탄한지 일 년 남짓 되었습니다. 저번에 우리 임금께서 자소각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시니 자기(紫氣)가 하늘에 연하고 서색(瑞色)이 영롱한 가운데 명산이 있는데 삼신이 강림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므로 이에 신에게 명하여 삼녀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항려(伉儷)에 예식을 갖추어 큰 국업(國業)을 성취하시옵서서.”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올라가 간곳이 없었다.”
- 『탐라국 사료집』(고창석 편저, 1995)

이에 따라 삼신인은 나이 순서에 따라 각각 배필을 맞이 하여 혼인지에서 혼례를 올리고 신방굴에서 떨리는 첫날밤을 보냈다.

김순이( 『제주여성문화』, 2001)에서는 세 명의 공주를 제주도 문화의 영웅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외국에서 들어온 선진화 된 옷감의 직조기술, 농사기술, 가축의 활용 등 그 시대로선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문물과 문화를 제주도에 전파시켜 줌으로써 수렵시대에서 농경시대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온평리 바닷가에는 혼인지와 연결된 곳으로 화성개와 황날이 있다. 당시 세 공주가 담긴 목함을 발견된 곳이 ‘화성개’로 황날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꽃상자가 떠오는 것을 발견한 바다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공주들이 도착한 해안을 ‘황날’이라 하는데, 세 공주가 육지로 올라오면서 끌고 온 말발굽 자국이 지금도 썰물 때면 나타난다. 온평리는 삼성신화와 관계한 유적들이 산재해 있어 이런 콘텐츠와 당 문화를 연결한 기행코스를 개발하면 좋을 듯하다. / 김은희

*찾아가는 길 : 성산리 → 혼인지 안내판이 있는 온평리 네거리 북쪽 4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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