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 (17) 밀항... 어떻게 밀항을 했을까?

밀항은 어떻게 했을까?

1950년대 밀항과 1960년대와 70년대 밀항은 사뭇 다름을 인터뷰를 통해서 알수 있다. 1950년대 밀항은 제주도 산지항에서 배를 탔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1960년대 70년대에 제주도에서 배를 탔다는 사람은 없었다. 주로 부산에서 배를 탔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밀항배를 탈때는 부산 영도도 한몫을 한다. 부산 영도는 제주도 밖에 있는 작은 제주도이다. 많은 제주도 출신들이 부산 영도에 살고 있었고 지금도 살고있다. 밀항배에 대한 정보가 영도를 통해서 제주도로 들어오거나, 영도에 머물면서 브로커들을 만나게 된다.

밀항배를 타기위해 부산으로 나간다. 지금처럼 비행기 타고 부산으로 나간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당시의 부산배는 평택호, 이리호, 제주호였다. 평택호, 이리호 다음으로 나온 배가 아리랑호, 도라지호 였다. 목선인 제주호는 평택호 이리호 시절부터 아라랑호 도라지호 시절까지 오래 다녔다. 제주호는 목선이라서 영도다리 밑을 통과할 수 있었기에 영도 태종대를 도는 시간을 벌수가 있어서 다른배보다 빨리 목적지(제주항, 부산항)에 도착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배가 작아서(약 2백톤) 파도에 잘 흔들려 배 멀미가 대단했다.

저녁 5시에 부산에서도 제주도에서도 배는 출항했다. 정시 도착은 다음날 아침 8시, 15시간의 뱃길이었다. 3등 객실에 들어가면, 그 꾀꾀한 냄새, 여기저기에 있는 바께쓰(양동이), 비니루 장판이 깔려있는 마루가 전부이다. 그 마루위에 너것 내것이 없이 누워서 하루밤을 고생하게 된다. 배가 크게 흔들리면 사람 몸이 이리저리 마음대로 움직인다. 여기저기서 토하는 사람이 그 바께쓰에 '우엑' 하는 소리를 내면서 토하고 만다. '우엑' 하는 소리가 나오면, 토하는 것은 조절도 못한다. 내 몸 내 마음대로 조절 못하는 것이 배멀미이다. 쌀밥을 먹었는지 보리밥을 먹었는지 먹은 것까지 알수 있다. 처음에는 먹은 음식이 나오지만 음식이 다 나와버리면 위액 같은 쓰디쓴 물만 나오게 된다. 내 자신이 토하는 것은 그래도 좋다.
남들이 토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건 고통이 아니라 고문이다. 남이 토해 놓은 것은 똥보다 더 더럽게 느껴지고 냄새도 더 고약하다. 그러다가 내가 또 토하고 만다. 배 멀미는 안해본 사람은 모른다. 배에서 내릴때까지 죽고싶을 정도의 고통이다. 배가 작을수록 배는 더 흔들리고 배멀미는 더 빨리 오고 심하다.

파도가 심한 날, 배가 아주 많이 흔들리면 선원들이 객실 문을 밖에서 잠그고 만다. 밖에 나와서 어중어중대다 거친 파도에 바다에 빠지는 안전사고를 없게 하기 위함이다. 이쯤되면 그날 밤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왔다갔다 하다가 도착하게 된다. 배에서 내리고 나면 완전 파김치가 되지만, 배멀미에서 해방이 되고 한잠 자고 일어나면 말끔해 진다. 이런 모습으로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제주도에서 부산을 갔다왔다 했다.

이렇게 해서 부산에 나왔다. 밀항배를 타게 된다. 밀항배는 크게 2종류가 있다. 고깃배 어선에 고기를 넣는 배 밑창에 수십명을 구겨 놓고 출항하는 밀항선이 있고 또 다른 방법은 무역선을 타는 방법이다.

▲1890년대 산지 포구 산지천 하루에 돛배들이 포구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다. 해안가로 초가집이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다. 출처=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제주의소리

무역선 밀항

무역선을 타는 것이 성공률이 높았다. 또 목적지 가까운 항구까지 와서 배를 내리게 되고, 또 밀항을 시키는 선원들은 일본 현지 브로커들과 결탁이 되여 있었다. 무역선은 외항선이다. 선원들이 아르바이트로 밀항을 시키는 것이다. 만약 밀항하는 것을 잡히게 되는 날에는 선원들은 선원수첩 압수는 물론이요, 경찰행에 재판까지 받아야 되는, 또 다시 배를 탈수 있을런지도 모를 위험천만한 알바이다. 그래도 돈이 좋았기에 알바를 하는 것이다.

무역선도 선장이하 전원이 밀항에 관여를 하는 경우와, 선원 몇몇이서만 밀항을 시키는 경우가 있었다. 선장이하 전원이 밀항에 관여하는 경우는 아르바이트료를 전원이 나누어야 하기에 한사람 몫이 적다. 그러나 밀항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생명의 위험도 적고, 고생도 덜하게 된다.

선장이하 선원 전원이 알바를 하는 경우는 때때로 호텔 밀항선도 있었다. 출항할 때와 입항 할 때만 깊숙한 곳에 숨기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간 후에는 밀항자를 불러내서 배안 선원식당에서 식사도 같이 하면서 밀항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밀항자가 여자라면 이때 선원들의 작업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선원이 자기 침대에 가서 자라는등의 수작이 들어 왔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이런 호텔 밀항선은 아주 극소수 였다. 식사는 같이 못할 망정, 배가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하고 있으면, 사람들을 빼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하는 경우도 있었다.

숨기는 곳도 다양하다. 서지도 못할, 겨우 앉아있을 수도 없는 무역선 배 밑창에 사람을 집어놓고서, 죽지 말라고 빵 몇개와 물, 그리고 똥 오줌 싸라고 바께쓰를 주고서, 그위에 화물을 적재하는 것이다. 무역선은 배가 크다. 사람 집어넣은 그 위에 몇 미터, 몇십미터의 화물을 쌓아올리는 것이다. 배가 출항하기까지 며칠을 화물을 적재하기도 하고, 또 바로 목적지로 향하기만 좋으련만, 이 항구 저 항구를 경유해서 목적지(예를 들면 오사카)로 향하는 경우도 있다. 며칠이 걸릴런지 몇주가 걸릴런지를 모를 그런 밀항길. 인간으로서 이겨낼수만 있는 고생이라면 좋으련만 인간으로서 한계를 벗어난 고생으로 마치 동물이 되어야 되고, 그 동물이 그 속에서 죽고 마는 경우도 있었다.

생선을 수출하는 배, 생선을 얼리기 위한 냉동기 기계 사이에 사람을 집어 넣어서 얼어 죽을 뻔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 탱크에 사람을 집어 넣어서 물 탱크에 들어간 사람은 며칠간을 물 탱크 물에 발을 담그고 있어서, 배에서 내린 후에 피부병으로 고생한 사람도 있다. 그 물 탱크는 식수 탱크가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식수 탱크라면 그 속에서 배설한 똥 오줌이 섞인 식수를 선원들은 마셨을 것이다. 배에는 구명보트가 꼭 있어야 된다. 구명보트 속에 사람을 넣은 경우는 덜 고생한 사람이다. 출항과 입항때만 그 속에 들어가 있게하고 바다 한가운데서는 나오게 해서 선원들과 같이 놀았다고 한다.

어떤 배를 탈런지, 또 배 안에서 어떤 곳에 들어가게 될런지는 배를 타봐야 아는 것이고, 배를 탄 시점에서 나 배에서 내리겠다는 거부의 선택이나,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넣어 달다는 선택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목적지에 도착을 하게 되면, 선원들이 사람을 빼내준다. 이때 배는 보세구역 안에 있게 된다. 보세구역을 빠져 나갈수 있는 개구멍을 만들어 놓고서 사람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현지 브로커에게 넘겨진다. 현지 브로커는 밀항자들을 맨션 아파트등의 아지트에 데리고 있으면서, 밀항자가 가지고 온 연락처를 찾아서 사람을 넘겨주며 도착했을 때 나머지 반의 돈을 일본돈으로 받게된다.

여자들은 남자 머리를 하게 하고 남자 옷을 입고서 즉 남장을 하게하고 배를 타게 했다는 경우도 있었다. 배 선원들은 남자들이다. 보세구역에서 밖으로 빠져 나오는 과정이 남장을 하고 있으면 그만큼 위험이 덜하다.

이때 일본 현지에서 받을 사람과 돈과의 관계에서 사정이 있게 된다. 초청된 손님이 왔다면 돈 준비 잘하고 사람 잘 받을 것이다. 초청하지 않은 손님도 오는 경우도 있다. 어느날 갑자기 '당신의 친척 누가 밀항으로 여기에 왔으니 돈 준비해서 사람 받아가시요', 라는 말에 '사람 못 받겠으니 그 사람 한국으로 다시 데려가시오' 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밀항시키는 것보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밀항시키는 것이 더 무섭다. 당시 한국은 무역선 속에 간첩이 숨어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검열을 확실하게 했고 만약 사람이 나오게 되는 날에는 밀항자가 아니라 간첩혐의로 밀항자는 물론 선원들도 수사를 받게된다. 당시를 살아본 사람이라면 간첩혐의 수사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 것이다. 이쯤 되면 현지 브로커도 난감하다. 만약 밀항자가 여자라면 사람 팔아먹겠다고 협박이 들어간다. 흥정을 거쳐 적당한 가격으로 사람을 받거나, 또 일본에서 사람을 받는 사람이 아주 능수능란해서 돈을 깎을려는 수단이기도 하다.

▲ 서부두 상륙 작전 일반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무보트를 탄 군인들이 서부두에서 상륙작전을 벌이고 있다. 출처=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제주의소리

그나마 무역선을 탄 밀항은 선원과 현지 브로커들의 연결 플레이로 성공확률이 높았다. 현재 일본에 정착한 밀항1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무역선으로 밀항한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무역선 밀항이 그만큼 성공확률이 높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국 선원들의 배를 타는 경우는 그래도 좋았다. 비합법적이지만 선원들이 배를 태워준 것이다. 부산항 부두에서 일을 하는 부두노조 작업원들이 돈을 받고서 배를 태워 어디에 숨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 배가 한국선원들이 타고 있는 배라면 그나마 목숨은 있을수 있다. 그 배가 외국 선원들이 타고 있는 외국 배에 또 일본으로 바로 가는 배도 아니고 외국 어디로 가는 배, 혹은 외국 어디를 경유해서 일본으로 가는 배일 수도 있다.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선원들에게 항복하고 자수를 하게되면, 처리에 곤란한 선원들이 밀항자를 기항지 경찰에 넘기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과정이 번거로워 사람을 바다로 던져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돈 몇푼에 살인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 어느 항구에 내렸다고 하지만, 일본에서 목적지까지 갈 수가 없다. 말 모르고 길 모른 사람이 어디에 내렸는지도 모르는데 움직일 방도가 없다. 백발백중 잡히고 만다. 현지 브로커가 길 안내를 하면서 데리고 다니는데도 잡히는 그런 길인 것이다.

부산에 가서 수소문 한 끝에, 싼 값으로 밀항선을 탈수 있었다. 부두노조 작업원들의 하는 밀항에 걸려든 것이다. 외국선원들의 배이긴 했지만, 운 좋게 일본으로 바로 가는 무역선이어서, 일본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배는 항구로 들어갔다. 넥타이에 양복을 입고서 배를 타라는 말에 정장을 하고 있어서, 배 선원들은 일본 세관이나 경찰관등의 공무원으로 착각하고서 별로 큰 지장없이 배에게 내릴 수가 있었고, 배에서 내린 보세구역에서는 배 선원으로 착각 하고서 그냥 한참은 도망갈 궁리를 할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복 경찰이 와서는 선원수첩을 보이라고 하니, 잡힐수 밖에 없었다. 오무라 수용소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 간후, 배를 태운 부두노조 작업원을 찾아냈다. 멱살을 잡고 '돈 내놔' 했지만 돈을 못 받았다고 한다.

밀항배 밀항

어선을 타고 밀항하는 것이다. 한국 밀항 브로커가 밀항자를 모집한다. 당시 한국은 통금이 있는 시절이었다. 통금직전까지 어느 지점에 모이라는 지령을 받고서 배의 출항은 거의 한밤중 이었다. 5톤 10톤쯤되는 작은 배에 고기를 적재하는 배 밑창에 사람들을 수십명 구겨넣는 것이다. 한국 브로커는 한사람이라도 더 태울려고 한다. 한사람당 지금돈으로 1천만원 2천만원이 왔다갔다하는 것이다. 사람위에 사람없고 사람밑에 사람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위에 사람있고 사람밑에 사람있고 사람 옆에 사람있다는 표현이 적당하리만큼 사람을 구겨 넣는 것이다. 앉아있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설 자리도 없는 만원 전차같은 풍경으로 또 여자남자 구별없이 태운다. 10여톤 되는 배에 60여명이 탔다는 증언이 있으니, 어떻게 태웠는지 알 수가 없다.

배는 출항하고 출항한 배는 현해탄의 거친 파도에 뒤 흔들리면서 항해하게 된다. 제주도와 부산을 오고가는 연락선을 타도 배멀미가 심한데, 그 조그만 배로 현해탄을 건널려면 반 죽어야만 되는 것이다. 이런 배는 주로 규슈(九州 구주)를 향하거나 일본 본토의 남쪽, 또 한국과 가까운 곳을 향하게 된다. 쓰시마(대마도 對馬島)로 많이 갈 것같지만 쓰시마를 경유했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쓰시마에서 일본내부로 이동할려면 다시 배를 타야 된다. 일본 경찰의 시퍼런 눈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쓰시마보다는 규슈 혹은 일본 본토의 남쪽 어느곳 한국과 가까운 곳을 접선지로 택하는 것이 일본에 내렸을때 이동에 위험이 덜한 것이다.

▲ 가라쿳물 가는길. 오현단 아래에 위치한 '가라쿳물'은 산지물과 함께 제주시의 중요한 샘물이었다. 한 아낙네와 아이들이 '물허벅'을 지고 '가라쿳물'에서 물을 길어 나오고 있다. 멀리 신축중인 옛 영락교회가 보인다. 출처=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제주의소리

일본 현지 브로커와 접선을 하려는 지점에 정확히 도착이 되고, 브로커와 접선이 되면 밀항자들을 데리고 이동하게 된다. 한사람이라도 더 배에 실을려는 것이 이젠 짐이 되는 것이다. 수십명의 밀항자를 현지 브로커 몇명이 데리고 주로 기차를 통해서 이동하게 된다.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사람들을 이동시켰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기차로 데리고 가는 과정에서 별의 별 수단이 다 동원되는 것이다. 낚시꾼 차림으로, 또 여자들은 남자와 팔짱을 끼게해서 아베크족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기차에서 옆자리 사람이 말을 시켜도 말을 못하는 벙어리 흉내를 내게 하는등, 있는 방법 없는 방법 다 만들어 낸다. 이상하다고 생각이 되면 일본사람들이 경찰에 신고가 들어간다. 다음역에서 경찰들이 기차에 승차하게 되면 일망타진 되고 마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본사람 여행객으로 보이게 별의 별 방법들이 동원되는 것이다.

한배에 60여명을 태운 밀항선은 규슈 고마모토현 야쓰시로시(八代市)에 상륙, 일본 현지 브로커에 잘 넘겨졌고, 배는 한국으로 되돌아 갔다. 현지 브로커 몇명이 60여명을 나누어서 데리고 오사카(大阪)까지 오는 것이다. 그런데 히로시마(廣島)에서 거의 일망타진 되고 만다. 이상하다고 눈치챈 일본인의 신고가 들어간 것이다. 타고 있는 기차를 알고 있기에 다음 역에서 경찰들이 승차를 하고 나니, 상황은 끝나고 만 것이다.

밀항배로 밀항하면서 일본 현지 브로커에게 넘겨지게 되면 그래도 운이 좋은 밀항길인 것이다. 밀항배라고 탔건만 하루 이틀쯤 항해를 하다가 일본이라고 내리라고 한다. 일본인 줄 알고 내렸더니 한국 어느 섬에 와서 내려 놓고서는 배는 도망가고 만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사기를 당했다고 경찰에 가 보았던들 사기꾼도 법을 어긴 것이요, 밀항배를 탄 것도 법을 어긴 것이다. 피차 마찬가지이다. 배를 타서 일본을 향했건만, 현해탄 파도에 배가 표류하는 경우도 있었고 , 또 해도를 볼 줄 몰라 정확한 접선 지점에 가지도 못해, 적당한 곳에 내리게 하고서는 배는 멀어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현지 브로커가 없는 무식한 밀항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같이 밀항을 해서 일본 상륙후에 그 사람이 전원을 인솔해서 목적지까지 가겠다는 것이다. 거의 다 실패이다. 또 배 선장이하 선원 전원이 밀항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사람이 상륙을 하면 배는 어디로 보내버리거나 바다속에 침수시켜 밀항자들이 그 장소를 벗어날 동안의 시간을 벌게 해야 된다. 그러나 이 경우도 실패가 많았다. 일본을 너무 우습게 보고 실행을 한 것이다.

국제적 연결 플레이가 된 조직적인 밀항이 아니면 성공은 그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의 없는 무모한 밀항길도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일본 현지 브로커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겠고, 일본측 브로커를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본적이 없다. 우리 동포도 했을 것이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밀항 한 죄보다 밀항 브로커를 한 죄는 죄가 더 무겁다. 지금은 야쿠자이거나 그 관계자들이 많이 하고 있어, 그 비용이 야쿠자의 자금원이 되고 있다고 한다. 또 지금의 밀항길은 한국에서 일본이 아니라 중국에서 일본의 길이다. 최근 일본에서 경악할 만한 뉴스가 나왔다. 일본에서 중국인들 밀항을 찾아낸 것이다. 그 밀항 과정이 사람들을 경악 시켰다. 중국에서 콘테이너 속에 사람들을 집어 넣은 것이다(집어 넣은 것인지, 자기들이 들어간 것인지?). 얼마 안되는 식량과 물만을 준비해서 콘테이너 속에 들어갔지만 이 콘테이너는 중국에서 바로 일본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유럽 경유로 일본에 왔다는 것이다. 콘테이너를 열고 보니 몇 사람은 죽어 있고 또 몇사람은 살아 있었다는 한다. 콘테이너 속에서 몇주간을 어떻게 살아 버티었는지 사람들을 경악 시킨 것이다. 억만금을 주면서 암흑세계 속에서 하루를 버티라면 버틸수 있을까? 나는 못 버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길을 마다않고 콘테이너 속으로 들어 갔고, 사람까지 죽은 것이다. 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 뉴스, 지금은 중국 사람들이고 콘테이너 였지만, 하는 방법은 다를지언정 어제 우리들의 일이었다.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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