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람 30명중 1명은 '오무라 수용소'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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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 '불량 외국인'과 '밀항자'들의 집합소

▲ 쯔바기마루(椿丸) 라는 배의 사진. 1961년7월부터 1968년3월까지 25회에 걸쳐 오무라수용소에서 한국으로 강제송환할 때 사용한 배.

필자는 1955년생이다. 필자가 '오무라 수용소' 라는 단어를 들은 것은 초등학교 때, 1960년대이다. 밀항 갔다가 잡히면 오무라 수용소에 보내지고, 그곳에 좀 있다가 한국으로 강제송환 되기까지 수용되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오무라 수용소' 라는 단어는 그후부터 지금까지 어떤 단어보다 더 내 머리속에 확실히 남아있다. 나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이전에 태어난 제주도 사람에게는 오무라 수용소란 단어가 아주 친숙한 단어로서 기억되고 있다. 또 오무라 수용소를 경험한 제주도사람들도 1만5천명이상 있었다. 그후 사망 등으로 자연 감소를 반영해도, 아직도 약 1만명은 지금도 제주도에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오무라 수용소' 는 제주도 사람에게 아주 친숙한 단어이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약 30만명, 그중 1만명 이상이 오무라 수용소를 경험했다면, 제주도 사람 30명 중 한사람은 오무라 수용소 출신이라고 말할수 있다. 오무라 수용소에는, 밀항해서 일본에서 잡혀서 한국으로 강제송환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본에 있는 교포들도 있었다.

일본국내에서 형사처벌을 받아서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친 후, 불량외국인으로 찍혀서 강제 퇴거명령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형사재판에서 7년이상의 형을 받아, 일본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쳐 출소 된 교포들이 이젠 강제퇴거명령을 받아, 오무라 수용소에 다시 수용되여, 한국으로 강제송환 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들 형벌위반 강제퇴거의 교포들은, 1952년 5월 제8차 송환때 송환자 410명중 형벌위반자 125명이 포함되지만, 형벌위반자 125명은 한국에서 인수를 거부해서 다시 오무라 수용소로 돌아오게 된다. 한국정부에서는 밀항을 갔다가 강제송환 되는 사람은 한국에서 받을 수 있지만, 교포로서 일본 국내에서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일본국내의 문제라는 해석에서 인수를 거부한 것이다. 그후 형벌위반자는 계속 한국정부에서 인수를 거부해서, 형벌위반자의 한국으로의 송환은 실제로 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7년이상의 형벌자는 교도소 출소후에 강제퇴거명령을 내려, 오무라 수용소 생활을 시켜, 1년∼2년정도 수용소 생활을 시키다가 석방했다.

피수용자 중 밀항자와 형벌위반자(교포)의 비율은 1962년 통계로서 밀항자 78%, 형벌위반자 22%였다.

▲ 朴正功 저, 『大村收容所』京都大學出版會, 1969년8월. 오무라수용소.

오무라(大村)수용소는 어디에 있는가?

오무라(大村)시에 있다. 오무라시는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현에 있으며, 나가사키시(長崎市)의 북쪽에 붙어있는 도시이다. 나가사키(長崎)현은 제주도에서 바로 동쪽이고 제주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이 '나가사키'이다. 나가사키는 2차세계대전때 원자폭탄이 투하된 도시이고, 또 세계적으로 아름답기로 유명한 항구(美港) 이다. 또 나가사키(長崎)는 일본 굴지의 관광지이며, 일본 유행가에 '나가사키' 를 주제로 하는 노래도 상당히 많다.

이 '나가사키'의 관문인 나가사키 공항(長崎空港)은 모무라만(灣)의 기존에 있던 섬을 매립해서 만든 해상공항이다(1975년 완성). 공항에서 바다를 건너면(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무라시(大村市)이다. 이 공항은 일본 국내선은 물론이요, 한국 서울과도 국제선으로 연결돼 있다. 이 공항섬에서 시내로 나오려면 길이 약 2Km의 다리를 건너야 육지로 나올수 있다. 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육지쪽에 비행장이 하나 더 있다. 불과 2Km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활주로 2개가 나란히 있는, 아주 보기 드문 비행장이다. 바다 공항섬 비행장은 민간 나가사키 공항(長崎空港) 이고, 육지쪽 비행장은 군용비행장 日本 海上自衛隊의 비행장 이다.

이 공항섬에서 육지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바로 왼쪽에 한많은 '오무라 수용소' 가 있다. 육지쪽 군용 오무라 비행장 울타리에 동쪽으로 붙어있다. 나가사키 공항을 이용하는 일본 사람들도, 또 서울로 향하고 서울에서 오는 우리 한국 사람들도 바로 코 앞에 있는 한 많은 '오무라 수용소'를 모르고 그저 관광기분에 들떠서 비행기를 타고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코앞에 있는 한많은 '오무라 수용소' 속에는 관광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인간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먹느냐 못먹느냐를 직면해 있는 사람들을, 법이라는 강제의 힘으로 모아놓은 곳이 이 수용소였던 것이다.
지금은 수용소 건물은 없고, 오무라 입국관리센터(大村入国管理センター)로 이름도 바뀌었고 새 건물이 들어서 있다.

소속은 일본 법무성 입국관리국 소속이다. 당시는 요코하마(横浜) 수용소 서양인과 중국인을 수용)과 오무라 수용소(한국사람 수용)의 2개 수용소였으나, 1993년부터 동경(東京)에는 동일본(東日本) 입국관리 센터, 오사카에 서일본(西日本) 입국관리센터, 오무라에 오무라 입국관리 센터, 3개 수용소 체제로 하고 있다. 지금은 오사카에서 밀입국으로 걸려도 오무라 수용소에 가지않고 오사카에 있는 입국관리센터에 수용 되었다가, 일반 비행기로 한국으로 강제송환 된다.

▲ 法務省大村入國者收容所 『大村入國者收容所20年史』1970년10월.

내부는 어떤 형태?

수용소는 1950년 구 일본 해군의 건물을 인수받아 수용소로 사용하게 된다. 1950년 이후 여러차례 개수와 보수를 하며, 내부 형태가 변하게 된다. 1970년 수용소가 발행한 『大村入國者收容所20年史』를 보면서 어떤 형태로 수용되었는지를 알아보자.

총면적 1만4천평 수용소는 주변을 높이 약5m의 철근 콩크리트의 벽으로, 또 벽의 사각에는 도망 감시를 위한 망루가 있어서, 밤에는 2천촉의 감시 등으로 도망을 감시 한다. 수용소 안에는 9개의 건물이 있으나, 일반 수용동은 1동(여자용), (2동은 1968년 해체), 3동, 4동, 5동이며, 특별히 6동(수용소안의 감옥, 독거동), 과 7동(병동) 이 있었다. 각 동은 2층이었고, 1층에 10명 정원의 방이 10개, 2층에 10명 정원의 방
이 10개, 즉 20개 방이 있어서, 각 방에는 화장실, 세면장이 있었다. 1개동에 200명, 5개 동이므로 수용인원은 1천명이었다. 수용소 안에 감옥에 해당하는 6동은 수용소 규칙을 위반한 사람들을 격리 감금하는 곳이며, 1층과 2층에 독방 50실이 있었다.

7동은 병동으로 1층은 독방, 2층은 일반 잡거실 방과 같은 구조를 하고 있었다. 7동 병동과 바로 붙어 있는 진료동에는, 약국 의무실 진료실 수술실 X선실 병리검사실등이 있었으나, 이름 뿐만의 진료실이었다고 경험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또 강당이 있으나, 처음에는 영화등 강당의 기능을 했지만, 1958년부터는 일반 수용자들의 사용은 원칙적으로 금하고, 출국 수속시 세관 검사를 하거나, 한국 국책영화의 단체관람시 때만 사용되었다. 평상시는 경비관들의 무도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

각 동마다 약150평의 마당(운동장)이 있는데, 아침7시부터 저녁5시까지는 각동에 부속된 마당까지 나오는 것은 허용 되지만, 다른 동의 마당에 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즉 이쪽 동에 있는 사람이 저쪽 동에 있는 사람과의 접촉은 허용되지 않는다.

피수용자는 아침7시 기상, 7시30분 청소, 8시 아침식사, 8시30분 아침점호, 12시 점심식사, 4시30분 저녁식사, 5시 밤 점호, 10시 취침, 으로 하루를 마감하게 된다.

밤 10시 취침부터 아침 7시 기상까지는 각자는 자기방에서 들어가야 되며, 간수는 각 방의 문을 걸어잠가 출입을 못하게 한다. 낮에는 각 방에서 나올수 있지만 허용되는 범위는 각 동의 마당까지 이다.

▲ 쯔바기마루(椿丸).
식사는 식당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식사때 당번이 자기 방의 인원수 분을 받아와서 방에서 식사를 하게 했다. 식사는 보리와 쌀이 썩인 잡곡밥이었다. 제주도 출신은 보리밥에 익숙해져 있기에 쌀이 섞인 보리밥을 먹는 데 큰 고통이 없었지만, 육지부 출신들이나 교포출신들은 잡곡밥을 먹는데 고통이 많았다고 경험자들이 말하고 있다. 식사가 부족해서 고통을 받았다는 증언이 없는 것을 보면 식사양은 그런대로 충분한 것 같다. 밥이 남으면 남은 밥을 이용해서 술을 빚어 마셨다다고 한다. 당연히 술을 만드는
것은 소용소 규칙에 위반되는 행위였다.

수용소측은 한국사람들 입맛에 맞는 식사를 제공할려고 노력했다고 하지만, 경험자들은 그것도 식사였냐고 반문하고 있다. 담배는 지정된 장소에서는 허용이 되었다. 지정된 장소에는 라이터가 있어서 그곳에서 담배를 피울수 있었다. 목욕은 일주일에 2번은 허용되었다고 한다.

편지 왕래는 보안상의 지장이 없는한 할수 있다, 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수용소장의 경유해야만 했다. 수용소장의 경유란, 내용은 검열 한다는 것이다. 피수용자에게 오는 편지가 수용소의 보안상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편지는, 내용 일부를 삭제할 수 있으며, 또 편지 자체를 본인에게 배달이 않될 수도 있으며, 배달이 않된 편지는 퇴소 할 때 본인에게 지급될 수도 있고, 혹은 본인에게 지급을 않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수용소에서 밖으로 나가는 편지는 내용을 체크해서 삭제 혹은 다시 쓰게 했고, 만약 이 규정에 따르지 않을 경우는 편지를 외부로 발송하지 않게 했다.

수용소측에서 본다면, 얌전히 말 잘듣고 있다가 한국으로 강제송환되는 배를 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는 오무라 수용소의 존재 그 자체를 탐탁하게 보고 있지 않은 조직들이 있었다. 조총련을 비롯해서 다른 혁신적인 조직들인 것이다. 이 조직들과 수용소 내부와의 연락은 필히 막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내부의 그들의 수용 실태가 외부로 유출되기도 했다.

면회는 4촌 이내의 친척에게, 혹은 변호사 등에게만 허용되었다. 밀항자중에는 장기간 일본에 살다가 걸린 사람들도 많다. 이런 경우는 자식도 있는 경우도 있다. 가족의 경우라도 부인은 여자 수용동인 1동, 남편은 남자동으로, 또 어린애들은 엄마의 동에 수용된다. 가족으로서 한 울타리 안에 있지만, 서로 만난수가 없는 것이다. 겨우 면회를 통해서 만난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 면회는 1개월에 2회로 제한 했다.

▲ 쯔바기마루(椿丸).
자치회가 있었다. 자치회는 각동의 1층에 1개 자치회, 2층에 1개 자치회, 각동에 2개 자치회를 조직하게 했다. 1개동 한층에 정원이 100명이므로 100명단위당 1개 자치회가 있는 것이다. 피수용자는 전원은 입회금 최저 200엔의 입회금을 납부해서 자치회의 회원의 되어야 하며, 자치회의 임원 임기는 6개월이었다. 자치회 임원으로는 회장1명, 총무 후생 문화 지도부이며, 자유투표에 의해서 결정되도록 했다. 이 자치회는 수용소측과 피수용자측의 다리 역할을 하며, 수용소측에서 피수용자 관리를 편리하게 해주는 역할도 했다. 문화부는 피수용자의 편지를 받아서 수용소측에 올리며, 수용소로부터 편지를 받아서 각 개인에게 전한다.

이 과정에서 편지 내용을 자연히 읽을수 있다. 피수용자가 쓴 편지를 읽어서 검열에 통하기 쉬운 내용으로 지도하기도 하고, 피수용자에게 오는 편지를 먼저 읽어서 건네줄 수도 있다. 보내는 편지를 자치회 문화부에서 먼저 읽어서 체크를 해주니, 편지의 내용은 피수용자 자율적으로 하고 있다라고 수용소는 발뺌을 할수도 있다.

각 자치회는 매점을 경영했다. 매점에는 술 이외에 피수용자의 요구하는 물건을 주문할 수가 있다. 당연히 수용소측의 허가가 있어야 됨은 물론이다, 매점의 판매담당도 밀항자 피수용자가 담당을 했다. 성실한 판매당당이 한국으로 강제송환 될때 수고했다고는 큰 선물을 받은 사람까지 있다.

피수용자는 수용소 내부에서 용돈이 필요했다. 잠자고 먹는 것은 수용소에서 해결이 되었지만 담배 구입, 이발비등은 개인의 돈이 필요로 했다. 당시 수용소측에서도 한달에 1인당 최저 3천엔정도의 돈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용돈은 가지고 있는 사람, 혹은 용돈을 외부에서 보내줄수 있는 사람은 그런대로 해결이 가능했지만, 돈을 못가진 사람은 그 수용소 안에서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돈이 없어서 남에게 빈대를 붙어야 되는 사람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더러운 일의 당번등을 도맡아서, 담배한대 얻어피는 거지행세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제주의소리>

<신재경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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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김진웅 2010-12-17 02:11:02
제 할아버지의 둘째부인( 할머니)에게서 난 작은아버지가 일본 오무라수용소에 잡혀, 저의 아버지가 직접 가서 나올 수 있도록 애쓴 적이 있지요...저도 어릴적부터 익히 들었던 곳이구요..잘 읽었습니다^^
112.***.***.42

장태욱 2010-12-16 19:26:31
'오무라수용소' 교포들의 한이 서려 있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19.***.***.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