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46) 한남리 열녀 정씨비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열녀정씨비석(왼쪽)과 『효열록』(제주교육박물관, 1996. 오른쪽) ⓒ문순덕

'남조로’길을 달려 남원읍 남원리로 가기 전 한남리에는 열녀(烈女) 정씨비(鄭氏碑)가 있다. 고문서를 보면 정의(旌義)사람 직원(職員)석아보리개(石阿甫里介)는 합적의 난(고려 공민왕 23년) 때 죽었고, 그의 아내 정씨는 스무 살의 젊은 여자였다. 남편이 죽고 부모와 자식도 없이 홀로 남겨지자 주변 남성들의 유혹이 많았지만, 이를 물리치고 한 지아비만을 연모하면서 한 평생을 보냈다. 정씨의 이런 행동을 높게 사서 조선조 세종 10년(1428)에 열녀로 정려되었다. 이런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 1834년 한남리 1번지에 세워졌고,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열녀 정씨 비석’이라 불렀다.

그런데 제주 최초의 열녀로 성이 같은 정씨(鄭氏)가 있지만 이 여성의 비석은 지금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안무사 윤임(尹臨)이 열녀로 정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남리 열녀 정씨 이야기는 조선조 세종 대에 등장하지만 고려시대의 여성이므로 제주 최초의 열녀이다. 원래 정씨의 열녀비는 남원2리와 한남리 경계에 세워졌다. 비석에는 지명이 석곡리로 표기되어 있어서, 이를 해석하는 데 의견이 분분하다. 두 마을에서 한참동안 소유권 논쟁을 벌이다 2006년에 한남리사무소 마당 서쪽 별채에 보관했다.

그런데 2009년에 이 건물을 보수하면서 다른 곳에 임시 보관하고 있다. 2007년부터 마을사람들은 이를 역사적인 자료로 인식해서 리사무소 마당 공덕비터에 세우기로 협의했다.

제주의 과거 여성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근거가 아주 부족한 형편에서 이런 비석과 비문이 남아 있어서 역사적 의미를 더해준다.

이 열녀비는 당시 시대상을 알려주는 역사자료이므로 훼손되지 않도록 특정 공간을 마련해서 보존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 문순덕

* 찾아가는 길 - 남원읍 한남리사무소 → 열녀정씨비석 『효열록』(제주교육박물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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