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 칼럼] 1950년 7월, 전주형무소 '정치범' 집단처형 사건 전말

아랫 기사는 2003년 4월 필자와 월간 '말' 기자 일행이 전주형무소 옛터와 학살터 현장을 50여년만에 찾아내어 발굴해나간 기록이다. 2003년 5월호에 실렸던 것을 다시 '제주의 소리'에 게재한다. 유족들이 오늘 전주형무소 옛터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미국에서 듣고 동참하는 뜻에서… 삼가 머리를 다시 숙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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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퍼즐 위엔 학살이 새겨져 있었다
1950년 전주형무소 정치범 집단처형

이도영.김재중

빛 바랜 흑백사진 속에 처참하게 늘어선 주검들.

사진 속 주인공들은 짚으로 짠 가마니에 덮이고 땅속에 파묻힌 채 얼굴만 내놓고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하복부에 한 삽의 모래만 얹혀진 채 땅위에 누워있다. 한 무리의 시신들은 깊게 판 구덩이에 가지런히 줄지어 누워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허연 모래 위에 핏줄기를 떨구며 힘없이 늘어져 엉켜있다.

“미국에서 찾은 사진입니다. 사진 설명에는 ‘인민군이 죽인 시신’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남측에 의한 학살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비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 발굴을 통해 6·25전쟁 중 한국 군경이 벌인 민간인 학살 자료를 국내에 폭로해온 이도영(55·미국 뉴욕거주) 박사는 최근 미국 정부문서보존소에서 입수한 새로운 사진 6장을 월간 『말』 편집국에 제공했다.

두말할 것 없이 이 박사를 포함한 공동취재단이 꾸려졌다. 일단 사진설명이 사실이거나 그렇지 않을 두 가지 가능성 모두 진실에 접근하는 취재방향으로 설정됐다.

사진 설명에 의하면 ‘인민군에 의한 우익인사 학살사건’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시신을 방치한 모습 자체로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보통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일렬로 정렬해 묻는 방식은 군경이 정치범들을 학살한 뒤 주로 사용했던 방식이었습니다.”

관련 자료를 오랫동안 수집하고 보아온 이 박사의 의견이었다. 물론 좌익에 의한 우익의 죽음이든, 우익에 의한 좌익의 죽음이든 무엇하나 구체적 증언이나 물증이 확보돼있지 않은 만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정황적으로는 양쪽 모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진 몇 장만으로 1950년에 벌어진 전주형무소의 비극으로 접근해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50년 9월 30일. 전주에서 적들에게 살해된 한국인들. 그들은 날카로운 둔기로 머리를 가격 당했다.’

이와 같은 사진과 사진설명은 기자 일행에게 몇 가지 단서만을 제공했을 뿐이다. 사진속에 보이는 높고 긴 담장, 그 앞에 쌓여 있는 벽돌더미, 반팔과 긴팔이 혼용된 옷차림, 미군에 의해 ‘9월 30일 전주’라고 적혀진 사진 설명.

▲ 약간의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진, 수형인들의 애환이 담긴 전주형무소 축벽.
추측컨대 높고 긴 담장은 형무소 담장이며, 그 주변에서 학살이 일어났다면 분명 그 사건을 기억하는 증언자가 있을 것이다. 일단 첫 번째 목적지를 옛 전주형무소로 정했다. 사전취재를 통해 옛 전주형무소의 주소가 전주시 진북동 322번지라는 사실, 교도소는 시가지 확장으로 인해 1972년 시 외곽의 평화동으로 이전했다는 정보 정도가 부가됐다.

피로 얼룩진 진북동 322번지

4월 7일 오전, 기자 일행은 전주시 진북동 옛 형무소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지나는 노인들에게 두서없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혹시 이 동네에 오래 사셨어요?”

실마리는 예상보다 쉽게 풀렸다. 동네 노인 몇 명을 만난 뒤에 정확한 옛 형무소 자리를 확인했고, 줄곧 이 동네에 살았다는 터줏대감 한 사람을 소개받았다. 서노송동 새마을금고 전 이사장 노태석(84)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응 ‘반대미’ 말하는구만, 바로 여그여.”

노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옛 형무소 자리는 과거엔 소반처럼 펑퍼짐하게 생겼다는 의미로 ‘반대미, 혹은 반촌(盤村)’이라고 불렸다. 그 자리엔 교회와 빌라 등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자리가 정문이 있던 자리여. 여그 이쪽으로 죽 담장이 있었지. 아마 한 30자 높이는 됐었재. 쩌 쪽은 벽돌공장이 있던 자리고.”

아귀가 하나둘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형무소 담장 중 15m 가량이 주택가 축대로 남아있는 것 이외엔 그 어디에서도 이 곳이 엄청난 참상의 무대였다는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그 축대가 사라져버린 형무소 담장의 일부라는 것도 몇몇 노인들만 알고 있는 사실일 뿐이었다.

“어르신, 혹시 전쟁 때 그 벽돌공장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데 혹시 직접 보지 못하셨어요?”

“말두 마. 한 3백 명은 죽었드랬지. 아마 전쟁이 터지고 그해 가을 무렵이었는데. 증말 끔찍시려웠지.”

조심스럽게 사진을 꺼내 보였다. 노인은 너무 오래 전 일이어서 인지 한참 동안이나 사진을 주시하며 기억을 더듬고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응 이랬구만. 전주형무소가 틀림없구만. 여그 담장하며…. 근디 이런 사진이 워디서 났댜? 참 들 많이 죽어 부렀어.”

노인은 한 숨을 쏟아냈다.

“직접 보셨어요?”

“보든 못했지. 나두 잠시 피난 갔다가 돌아와 보니 이렇게 시체가 널려 있었당께.”

“전쟁이 터지자마자 수도 없이 사람을 끌어다 죽이더만. 좌든 우든 사람을 많이들 죽였재. 허 참.”

노인은 사진 속 장소와 주검들에 대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이야기가 툭 튀어 나왔다. 사진의 내용과 연결성이 없는 1950년 여름의 또 다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전쟁 전부터 내가 형무소 앞에서 쬐깐한 술장사를 했는디, 형무관들도 오구가고 해서 형무소 내막은 잘 알재. 전쟁 터지구 얼마 안되서 죄수들을 트럭에 실어다가 많이들 죽였다는 구먼.”

“누가요? 인민군이 죽였다는 말씀이신 가요?”

“아니. 그때는 인민군이 내려오기 전이었재. 전쟁터지구 막바룬께.”

사진 속, 엉켜진 죽음의 비밀을 풀기 위해 찾아왔던 옛 전주형무소 자리에서 1950년에 벌어졌던 엄청난 참상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반세기 넘게 언급 자체가 금기시 됐었던 ‘정치범 집단처형’에 대한 증언이었다. 물론 노인이 장사를 하며 보았고 전해들었다는 이야기만으로 ‘전주형무소 정치범 집단처형’이라는 빛 바랜 역사의 퍼즐을 맞추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생존해 있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생생한 기억이 필요했던 것이다. 알음알음 연락이 돼 옛 형무소까지 찾아온 김영금(85) 할머니의 증언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형무소를 서성거리는 노파의 한(恨)

해방직후 전라남도 완도 신지면에 살았던 이기동(1950년 사망추정)씨는 동경상고를 졸업한 당시로서는 엘리트였다. 면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그는 좌우대립이 심해지자 직장을 그만두고 칩거하게 된다. 시대의 격동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은 지극히 본능적인 결단이었다. 그러나 배울만큼 배운 그를 아깝게 여긴 신지면 초등학교 교장은 그에게 교사직을 제안했고 이를 수락한 순간부터 그와 그 가족의 비극이 싹트게 됐다.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남로당 관계자가 그가 근무하던 초등학교에 정치연설을 위해 찾아온 일이 있었는데, 이 학교 교장은 이 교사에게 손님을 접대하도록 권유했다. 이후 좌익이 불법화되자 이 교사는 ‘손님 접대에 대한 대갗로 20년형을 언도받고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1948년 10월의 일이었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지만 모든 법률체계가 허술했던 당시로서는 이런 일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그 양반 빼낼라구 시골에서 논 두마지기를 팔아서 그때 돈으루 7만원인가 8만원인가를 챙겨가지구 전주로 올라왔당께요.”

김영금 할머니는 전재산과 다름없는 이 돈을 형무소 소장과 부장들에게 건넸다. 형무소에서 목회일을 보던 강 목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강 목사’라는 사람은 동네 터줏대감 노태석씨도 기억하고 있었다. 노씨를 비롯해 기자 일행이 만났던 다른 증언자들은 당시에는 여러 가지 편법으로 형무소를 출옥한 사례가 많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어쨌든 남편이 출옥할 것으로 믿고 완도로 내려가 모내기를 마친 김 할머니는 뜻밖에도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닥칠 비극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부랴부랴 전주로 다시 올라왔던 것이다.

“형무소 정문에서 본께, 군인들이 트럭에다 죄수들을 싣고 쩌어기 공동묘지 너머로 가더랑게요. 그리구 쬐끔 있다가 ‘우당탕탕’ 총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올라오더랑게요.”

할머니는 비극을 직감하고 문제의 장소로 찾아갔다. 비가 한차례 쏟아지고 난 뒤, 그 다음 날의 일이었다.

“구덩이에 사람들이 죽어 널부러져 있는디….”

할머니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주름진 눈가엔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휴, 사람을 그 모양으로 맹그러 놓았는디, 흙은 덮다가 말구 기름을 찌그려 불을 꼬실렀는지 눈 뜨고는 못 보겠더랑게요. 며칠 지난 시체도 있는지 발싸 구데기가 꼬이기 시작했드라구요.”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할머니는 끝내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겹겹이 쌓여있는 시신을 일일이 뒤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더구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그을린 시신을 보고는 남편을 찾는 일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내 그날로 죽을라구 했지요. 시어무니가 보통분이 아닌게라 남편 빼내들 못하면 들어오지두 말라구 했응께요.”

우여곡절 끝에 할머니는 완도로 돌아가 자식들을 키웠고, 오늘날까지도 남편의 유골만이라도 찾아보겠다는 일념을 버리지 않아 전주로 먼 걸음을 했던 것이다. 물론 할머니는 기자 일행이 옛 전주형무소의 비극을 캐고있는 것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죽은 자와 그 가족의 ‘한’은 아직도 옛 전주형무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비극에 대한 종군기자의 기록

“6월 26일부터 애국적 인사들에 대한 대량적인 소위 예비검속을 실시하는 한편, 6월 27일에는 전주형무소 뒤에 있는 공동묘지에 굴을 파게 한 다음 이날 밤 늦게부터 6월 28일 새벽까지에 걸쳐 동장소에서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3년 이상의 처형을 받은 애국 투사들을 미군 감시 입회 하에 총살하였다. …(중략)”
“놈들은 곧 구금자들을 전부 전주시 교외에 있는 ‘솔개재’ 부근과 ‘황방산’ 골짝이에다 굴을 판 다음 매일같이 처참하게 학살하였다. 이러한 야수적 대량학살은 전주가 해방되기 이틀전인 7월 18일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 걸쳐 계속 감행되었으며 마지막에는 놈들이 도망치기 바쁘게 되자 경찰과 헌병대에 검속되었던 사람들을 유치장에 감금한 채로 그냥 기관총 사격을 감행하여 학살하고 말았다” (1950년 8월 21일 『민주조선』전주학살 관련 보도 중)

한국전쟁 당시 북한측 종군기자의 취재내용을 바탕으로 「조선 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살림터) 이라는 책을 펴낸 경상대 신경득 교수의 연구 내용 속엔 ‘전주형무소의 비극’에 대한 간략한 기술이 포함돼 있다. 물론 일각에서는 ‘북한측 종군기자의 시각이 얼마만큼 신빙성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지만 국내 관련 사료가 전무한 점을 감안할 때, 신 교수의 자료는 무시할 수 없는 준거가 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에 밝혀지고 있는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 학살’사건에 대한 증언이 북한 종군기자의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비밀 해제된 미군 문서를 봐도 미군 스스로 ‘북한언론의 보도내용이 사실과 많이 다르지 않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이런 측면에서 당시 북한 언론의 보도 내용은 이념적 가치를 떠나 진실에 접근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신 교수는 자신의 연구기록에 “전쟁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부터 전주함락 시점인 7월 20일까지 전주에서 정치범과 보도연맹원 등 4천 5백여 명에 대한 4차례의 대량학살이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6월 27일과 28일 전주형무소 인근 공동묘지에서 1차, 7월 4일부터 14일 사이에 2차, 7월 20일경 솔개재와 황방산 부근에서 3차, 마지막 4차로 후퇴 직전 경찰과 헌병대 유치장에 구금된 예비검속자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자일행이 추적한 내용은 신 교수의 연구기록과 정확히 궤를 같이 하고 있었다. 증언과 자료 등 입수된 작은 퍼즐 조각들이 신 교수가 그려놓은 밑그림 위에 정확하게 맞추어져 커다란 그림으로 완성되어 갔다.

53년만에 입을 연 형무관들의 증언

비극에 대한 믿을 만한 증언을 내놓은 사람들은 다름아니라 1950년 당시, 전주형무소에 근무했던 교도관들이었다. 교도소가 아닌 형무소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때인 만큼 형무관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사람들이다. 종전 반세기를 넘긴 지금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불과 몇 명만이 살아남아 그 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 오래된 이야그를 지금 혀서 무엇하나?”

나이 여든에 가까운 노인들은 말문을 쉽게 열려하지 않았다. 기자 일행이 추적해 그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망각 저편으로 잊은 듯했던 껄끄러운 기억을 건드리지만 않았다 하더라도 그 해 여름의 기억을 무덤까지 가지고 갈 요량이었던 셈이다.

“맞어. 그랬드랬지. 바로 이 장면이여. 틀림없는 사실이랑께.”

이 도영 박사가 입수해 폭로한 바 있었던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 사진을 쓱 훑어본 이겸준(78) 전 형무관은 그 사진의 내용을 대전이 아닌 전주로 착각했다. 정치범 처형이 그 만큼 대전의 그것과 흡사하게 이뤄졌다는 방증이었다.

“하루는 헌병대 관계자가 와서는 교도관들도 와서 봐야 한다고 하길래 형무소 차를 타고 그곳에 따라 갔었지요. 두 눈뜨고 바라보지두 못할만큼 끔찍했습니다. 당시 교도소장은 죄수들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시국이 어수선한지라….”

1946년 12월 17일, 전주형무소의 행정업무 담당인 서무계로 근무를 시작한 이 형무관은 전쟁발발 직후,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다짜고짜 형무소에 들이닥친 헌병대는 수형인 명단도 없이 중형자부터 불러내 트럭에 싣더니 어디론가 끌고 가곤 했다. 그리고 형무소로 돌아오는 건 항상 빈 트럭뿐이었다. 물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치채지 못할 형무관은 없었다.

“한 차에 20여 명씩 공동묘지 근처로 태우고가 말뚝을 세우고 붙들어 맺지요. 가슴엔 검정색 타게트를 붙이고 곧바로 총살했습니다.”

군인들은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시신을 질질 끌고가 밀어넣고 휘발류를 뿌린 뒤 불을 붙였다고 한다. 완도에 살고있는 김영금 할머니의 남편이 이 형무관이 목격했던 살육의 현장에서 운명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시차를 둔 두 노인의 경험이 정확히 한 가지 사건의 현장으로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기자 일행이 만났던 형무관 출신 노인 중 기억이 가장 또렷한 사람은 이순기(78) 전 형무관이었다. 자신이 목격했던 사건의 시간과 장소, 전해들은 이야기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치 신경득 교수의 연구기록을 그대로 외운 것처럼 상당부분 그와 일치하는 증언을 내 놓았다.

▲ ˝여그야, 여그...˝ 50여년전 비참했던 그 현장을 아직도 가슴에 묻고 있던 이순기씨.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였다.

“전쟁이 나구 며칠 지나지 않아서 서울서 장기수 1백 50명이 이송돼 왔지. 그 다음날부터 처형이 시작된 거구먼. 비번인 날 호기심에 따라가서 딱 한번 처형 장면을 봤재. 거 끔찍하드만.”

학살은 이겸준 형무관이 목격했던 장면과는 또 다른 형태로 벌어졌다.

“미리 네모나게 구뎅이를 파놓구는 너댓 명씩 엮어서 구뎅이 둔덕에 앉히고 한 20미터 떨어져서 경기관총으로 갈기드라구.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당게.”

한 차례의 기관총 소사 후 헌병들은 구덩이에 들어가 확인 사살을 벌였다. 현장 헌병 지휘관은 잔인하게도 “형무관들도 쏘고 싶으면 쏘라”며 사냥(?)을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순기 형무관은 후방으로 후퇴하는 선발대가 되어 목포로 떠나던 7월 16일까지 헌병대 트럭이 매일 두어 차례씩 형무소와 인근 야산을 오가며 죄수를 실어다 죽였다고 증언했다. 그 숫자까지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계호(戒護)과에서 일혀서 정확히 알어. 당시 형무소에 1천 9백명 정도의 죄수가 있었는디, 내가 아는 거슨 1천 2백명, 낭중에 들은 숫자가 4백명, 도합 1천 6백명이 처형 당했당께. 나머지는 경제범이여. 그 때 4·3이니 여순반란이니 해서 붙들려온 정치범들은 다 죽었다고 보면 되는 거시여. 마지막엔 1년 짜리들도 다 죽었슨게. 그 사람들은 참 억울한 사람들이여.”

북한 종군기자가 기록한 옛 공동묘지, 솔개재, 황방산, 건지산 등 학살장소의 이름들이 노인의 입에서 그대로 거론되기도 했다.

“이거 시끄러워지면 안되는디. 누가 오라가라 하면 곤란혀.”

노인은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전혀 없는 증언요구에 다소 망설이기도 했지만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기자일행의 설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용기였다.

완성된 학살의 퍼즐

1950년 6월 말부터 20여 일 동안 벌어진 전주형무소 정치범 학살 사건은 이렇게 세상에 드러났다. 두 명의 유가족, 세 명의 교도관, 그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취재원 20여 명, 전주 시지와 비밀 해제된 미군 문서 등의 관련 자료, 그리고 전쟁 당시 종군기자의 기록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완성된 것이다. 역사의 퍼즐을 따라 그 날, 비극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한국전쟁 직전, 엉성한 국가체계 속에서 4·3사건, 여순 사건 등 굵직한 사건뿐만 아니라 지방의 소규모 조작용공(?) 사건으로 전주형무소 재소자 수는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7백 명이 적정 수용 인원임에도 형무소는 그 세배에 가까운 1천 9백여 명의 재소자로 가득 찼다. 이들 중 대다수는 공산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기본적인 상식마저 뛰어 넘는 ‘정치적 격동의 시대’에 잘못 태어났다는 죄 아닌 죄를 가진 사람들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6·25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서울이 인민군들에게 점령되던 1950년 6월 28일경부터 전주형무소에는 저승사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저승사자는 다름 아닌 헌병대였다. 그들은 명단도 없이 일단 장기수부터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형무소장은 법무부 등 상급기관의 명을 받고 재소자들을 저승사자에게 넘겨버리게 된다. 이때부터 광란의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학살은 총 4차례에 걸쳐 진행됐으며, 학살 장소로는 사람들의 눈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형무소에서 남쪽 방향인 시내를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동,서,북 방향의 옛 공동묘지, 건지산, 황방산, 소리개재 등이 선택됐다. 학살 초기엔 헌병들도 말뚝을 세우고 재소자의 가슴에 표적을 붙이는 등, 이른 바 ‘총살형’의 흉내라도 냈다. 그러나 인민군이 수원을 거쳐 남하하는 속도가 빨라지자, 이들의 마음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구덩이를 엉성하게 파고 너댓 명씩 묶어 기관총을 쏘아대는가 하면, 헌병대 영창에 갇혀있던 군 재소자까지 죽음의 광란에 동참시켜 총을 쏘게 만든다.

뒤로 묶여 트럭에 실린 뒤, 사지로 떠나던 재소자들은 억울한 죽음을 어디에 하소연하지도 못한 채 구덩이에 던져지고 휘발류를 뒤집어쓰고 불에 타들어 갔다. 인민군이 더욱 가까워지자 전주형무소 형무관들은 1진과 2진으로 나누어 목포, 광주 등으로 후퇴하게 된다. 경제사범 1백 80여명을 기차에 태우고 목포로 피난갔던 형무관 60여 명은 목포에서도 똑같은 죽음의 광란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기도 했다.

2진으로 피난을 떠난 형무관들이 데리고 나온 경제사범들까지 합하면 전주형무소에서 살아남은 재소자는 3백여 명에 그쳤다. 피난온 1진과 2진의 형무관들이 광주에서 합류했을 때 전주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던 1천 6백여 명의 모든 정치범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역사는 그들의 죽음을 외면했다. 역사의 침묵이 53년이나 계속되는 동안, 전주 시내 한 복판 또는 인근 야산에 파묻힌 주검들은 진실이 밝혀질 오늘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사무친 원혼, 하늘을 보다

2003년 4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전주시 황방산 기슭.

가장 많은 정치범들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옛 공동묘지 터는 이미 아스팔트가 깔리고 높은 빌딩들이 들어서 버렸다. 유골 발굴이 가능할 것으로 추측되는 다른 곳은 건지산, 소리개재, 황방산 등 개발이 덜 된 전주시 외곽 지역이다. 다행히도 형무관을 지냈던 이순기씨가 황방산의 학살 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여긴데 건물이 들어서 버렸구만.”

노인이 기억하고 있는 학살 터, 바로 그 지점 위에는 육중한 납골당이 들어서 있었다. 역사의 마지막 퍼즐을 맞출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희망이 낙담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납골당 뒤쪽 야산 기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마 이 건물을 지으면서 뼈가 쏟아져 나왔다해도 그냥 묻어버리거나 모아서 어딘가에 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여.”

일행이 낙담에 빠져 납골당 건물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잡풀 속에서 햇살에 반짝이는 하얗고 긴 물체가 언뜻 기자의 눈 속으로 들어왔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풀숲을 헤치고 그 물체를 꺼내들었다. 긴 시간을 추적해온 전주형무소의 진실에 관한 마지막 퍼즐을 맞추는 순간이었다.

▲ 감자를 캐듯 쏟아져 나온 유골들. 우리가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자 처형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이도영 박사와 아버지가 전주형무소에 수감 중 처형된 조병권씨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친의 것과 다름없는 유골을 막상 보게되니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잘 모셔드릴께요. 편히 쉬세요.”

황방산 인근 주민들에게 학살 터의 존재는 비밀스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흙으로 쌓아올린 폭 1m 길이 20m 정도의 긴 흙 두둑은 10개 가까이 있었는데 그것이 모두 유골이 묻힌 자리라는 사실도 전해 들었다.

기자 일행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중장비를 동원해 두둑을 걷어내고 호미로 조심스럽게 남은 흙을 긁어 낸 결과 학살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누워있는 유골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알기론, 여기 묻힌 죄수들은 3년 이하의 단기범들 이었당께. 대부분 무고한 사람들이었다구 봐야지.”

이번 역사 발굴의 일등 공신인 이순기 전 형무관의 기막힌 증언이었다. 초법적 국가권력에 의한 살인, 그 것도 불과 1년형을 받은 정치범까지 처형됐다는 사실. 이 땅에 이 만큼 크게 사무친 원혼이 떠도는 곳도 없을 터였다. 53년 만에 하늘을 바라본 원혼들은 항아리에 고이 모셔져 다시 어둠의 세계로 잠들어 버렸다. 그 자리에는 아직도 엎드린 채로, 혹은 쪼그려 앉은 채로 억울한 죽음의 원인이 시원스레 밝혀지길 기다리는 원혼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황방산 기슭에 어린 원혼의 외침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남겨진 미스테리, 사진 속 주검들

그렇다면 이도영 박사가 미국 정부문서보관소에서 찾은 6장의 사진은 무엇일까? 1950년 여름에 일어난 전주형무소의 비극적 퍼즐을 다 맞추고 난 뒤에도 6개의 퍼즐 조각이 남은 셈이었다. 전주형무소에 얽힌 또 다른 비극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장담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가장 쉽게 들려온 이야기는 ‘우익의 잔인한 학살에 대한 좌익의 복수였다’라는 증언이었다.

“이건 인민군이 죽인 거랑게.”

기자 일행이 만난 형무관들은 대체로 사진 속 죽음을 인민군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전해들은 이야기에 불과할 뿐, 누구하나 직접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정치범 처형을 직접 목격했던 것과는 달리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10월 중순이나 돼서야 한국군에 의해 수복된 비어있는 전주형무소로 돌아왔다.

사진 설명에 보이는 ‘1950년 9월 27일’ 혹은 ‘9월 30일’ 이라는 글씨. 이 기간은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하는 기간이었다. 대량 학살에 대한 정황은 충분한 셈이다. 그러나 최근에 밝혀진 경기도 고양시 금정굴 학살 사건의 예를 보면 서울 수복 기간에 북에 부역했던 사람들을 대량으로 학살했던 당사자는 다름 아닌 한국의 우익 청년단체였다. 한국군이 도착하기 전에 일을 벌였던 것이다. 전혀 다른 방향의 가능성이 여타의 장소에서는 실재로 존재했다. 물론 사진 속 죽음이 우익청년단체의 소행이라는 증거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그 사진에 대한 미스터리는 풀어야 할 과제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것이 ‘좌익에 의한 우익의 죽음’이든 그 반대의 경우든 사진 속 주검들은 황방산 기슭의 원혼들과 좌나 우를 가르지 않은 채 이렇게 속삭일 것이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너희의 몫이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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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 | 이도영 「죽음의 예비검속」 저자
글 | 김재중 기자 jjkim@digitalmal.com
사진 | 김희수 프리랜서 ironshutter@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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