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무라 수용소의 외침 "하느님 부처님 법무대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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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 (20) 미성년자 수용자 김양숙 사건

오무라 수용소를 보면, 일본 정부는 우리 동포들을 얼마나 미워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52년부터 7년이상 징역형을 받은 형법위반자 동포들을 실질적으로 한국으로 강제송환 시킬 수 없었지만, 계속 한국으로 송환시킬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 최근에 공개된 1970년대의 한국과 일본의 외교문서에는 만약 한국정부에서 인수를 거부한다면 북한으로 보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또 1980년4월23일자의 일본 국회의 의사록에는 협정영주자 9명를 강제송환 시켰다고 보고하고 있다. 협정영주자이므로 한국으로 송환시킨 것이다. 1982년7월29일 일본 국회의 의사록에는 오무라 소용소에는 53명이 수용되고 있으나, 그중 45명이 한국적, 8명이 조선적이라고 하고 있다. 이때는 약 1주일 전에 한국으로 강제송환 시킨 바로 직후여서, 한국으로 송환시킬 사람들은 다 송환이 되고 난후, 텅빈 상태의 수용소였기에, 형벌위반자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일본 정부는 형벌위반자 동포들을,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게 한 후, 다시 형기없는 감옥에서 2년 3년을 더 못살게 굴다가 법무대신의 은혜(?)로 석방시키는 처사를 마음대로 행한 것이다.

▲ 오무라 수용소 (동아일보, 1985년 1월 12일자)

특재(特在, 在留特別許可)가 있었다. 밀항자들에게 특별히 재류허가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법무대신이 은혜(?)를 베풀어 특별히 재류허가를 하고, 석방을 시킨다는 것이다. 당연히 '하늘의 별'이었다. 또 법무대신의 은혜에 해당되므로 재판을 제기할 수도 없고 오로지 목 타게 법무대신님의 은혜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50년 전에는 한국 또 제주도에서 대단한 운동이 벌어졌다. (1968년7월및 8월, 동아일보및 경향신문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보도) 김양숙 양(金良淑, 남제주군 서귀포읍 출신, 1968년 당시 13세), 어머니(吳良子, 36세, 오사카 거주)가 있는 일본으로 밀항을 가다가 걸려, 오무라 수용소에 억류되고 말았다. 한국에서 김양숙 양 어머니 품에 돌려보내기 위한 10만명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이 서명운동에 대한 부인회 부산시지부, 제주 청년회의소, 제주도내 여자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앞장섰다.

또 한국 외무장관이 일본 법무대신에게 선처를 바라는 서한을 보내는가 하면,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일본 사또 수상 부인에게 부탁의 편지를 보내는 등, 한국을 움직인 대 운동이었다. 한국 정부및 한국 국민 전체가 일본 법무대신의 은혜를 호소 한 것이다. 1968년 8월21일, 13세 밀항소녀 김양숙은 드디어 은혜을 입어, 오무라 수용소 문을 나와, 어머니 품으로 안겨, 오사카 어머니집으로 가게된다. 그 곳에서 아버지가 다른 4남매와 처음으로 재회 했다.

김양숙 양은 생후 1년3개월만에 어머니와 헤어져 숙모와 함께 살아왔다. 한국에서 32명(미성년자 12명 포함)과 같이 일본으로 밀항, 1968년6월23일 일본 상륙 직후 후쿠오카(福岡)현 무네조郡 켄까이町에서 전원 검거되고 만다.

▲ 김양숙 관련 기사 (동아일보, 1968년 8월 20일)

당시 제주도에는 TV가 없고 라디오 뉴스로만 전해 들어야 될 때였다. 매시간 뉴스에 김양숙 양의 사사건건을 생중계로 제주도 사람들을 흥분시켜고, 석방되었다는 뉴스에는 박수를 치는가 하면, 나이든 어머니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이런 거국적인 호소로 김양숙 양은 억류 59일만에 오무라 수용소에서 가석방 되었지만, 같은 날 나머지 일행 전원(물론 미성년자 전원 포함)은 한국으로 강제송환되는 비극을 맛보아야만 했다.

밀항자가 미성년자로서 부모가 재일동포인 경우는 아주 어렵게 특별재류허가 나와 석방되는 경우가 있어서, 지금 재일동포가 되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오사카에 있는 니시하라(西原)인쇄의 '한일년' 사장도 오현고등학교를 다니다 17살때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에 상륙하자마자 경찰에 검거되여, 오무라 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그는 미성년자였기에 미성년자 기간중에 한국으로 송환되는 것을 면할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가 동포로서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어서 탄원의 결실이 있어서, 수용소 생활 13개월만에 특별재류허가로서 석방하게 된다.

필자가 인터뷰를 한 高씨도 미성년자로서 밀항을 했다. 제주도에 어머니와 누나 또 본인 高씨가 있었고, 아버지가 일본 오사카에 교포로 있었다. 일본에 있는 아버지가 재혼을 했다는 소식에 제주도에 있는 어머니도 재혼을 하게 된다. 가난했기에 제주도에 있으면 중학교 진학도 어렵게 된 와중에, 아들만은 일본으로 보내라는 아버지의 전갈로 부산 영도에서 밀항배를 타게 된다(1960년). 초등학교를 이제 막 졸업한 어린 아들을 밀항배 태우는 어머니, 밤에 모이라는 곳까지는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갔다. 저쪽으로 가면 사람이 있으니까 그리로 가라, 가면서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 라며 어머니는 아들을 밀항배 타는 곳으로 보냈다. 아들 高씨는 어머니 말을 어기고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 본다.

▲ 김양숙 관련 기사 (동아일보, 1968년 8월 22일자)

깜깜한 어둠속의 어머니 모습을 한참을 서서 서로가 보고만 있다가, 빨리 가라는 어머니의 손짓에 눈물을 흘리며 배를 탔다. 이런 모습을 생이별이라 하는 것인가?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아들을 일본으로 밀항시키는 어머니 마음, 13세 소년은 일본이 무엇인지 알고서 밀항배를 탔을까? 무엇이 13살 소년을 목숨 건 밀항배를 타게 했을까?

高씨 소년은 일본에는 무사히 상륙해서 기차로 이동하는 도중에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래서 오무라 수용소이다. 高씨 역시 미성년자였기에 한국으로 송환이 미루어졌고 일본에 있는 아버지의 운동으로 특별재류허가를 받고 석방되었다. 高씨는 2008년 50년만에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를 부산에서 상봉하게 된다. 어머니는 80을 넘긴 나이에 아들은 60을 넘긴 나이가 되어서야 만난 것이다.

소년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1965년6월1일밤 文五映소년(당시 16세)는 자살을 했다(수용소 당국이 발행한 『大村入國者收容所20年史』에는 金文五(16세,가명)으로 기록). 당시 文五映소년은 환자들이 수용되는 제7동(병동)에 수용되 있었다. 당시의 오무라 수용소는 각 동과 동 사이에도 수용자 출입은 물론 서로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금지 되어 있었다.

일반동(3동)의 젊은 사람들은 아침산책을 나왔을때, 병동(7동)에 있는 소년과 철책이 쳐진 유리창 너머로 서로 얼굴을 보며,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할 수 있었다. 6월2일날 아침, 아침산책을 나온 일반동의 수용자들이 병동을 바라보며, 文소년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려고 했으나, 그날은 소년의 모습이 없었다. 일반동도 아닌 병동에 수용된 소년이 보이질 않으니 서로들 걱정해 가며,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경비관에게 질문을 했다. 경비관의 대답은 어제밤 소년은 목을 메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자살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경비관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일반동의 수용자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병동과 제일 가까운 3동에는 200명이 수용되 있었다. 200명중 약30여명은 20대 초반의 밀항자로서 한국에서 대학생이었다고 한다. 이들 학생들은 한국에서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하다가 경찰에 쫓겨서 피신, 일본으로 밀항을 했다가 잡혀서 수용된 학생들이며, 대학은 서울대, 한양공대, 경희대, 건국대, 동국대, 부산대, 경북대, 해양대, 동아대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朴正功저 『오무라 수용소(大村
收容所)』)

▲ 김양숙 관련 기사 (동아일보, 1969년 3월 6일자)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文五暎소년 사인규명 투쟁 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자살한 원인을 밝히라며 수용자 전원이 실력 투쟁으로 들어갔다. 실력투쟁이란 수백명이 애국가를 제창하며 농성을 벌이고 단식투쟁을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수용소측은 자살원인을 규명하여 설명하겠다는 다짐과 또 수용소측이 거행한 장례식에 투쟁위원회 집행부를 참가시켰고, 집행부 간부 金正男(24세, 경북대학 대학원생, 한일회담 반대투쟁 경북대 성명문 초안위원)이 추도문을 낭독하고, 참석한 집행부 간부 5명은 화장장까지 동행하여 화장하는 순간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文五暎소년은 경상남도 거제도 출신으로 한국에서 고등학교2학년(16세)이었다. 1965년 4월 1일 일본 시마네(島根)현 사가이(境)해안에 밀항자 18명과 함께 상륙했으나 검거되여, 히로시마(廣島) 입국자수용소에 수용, 4월26일 오무라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소년은 히로시마에서 밀항 일행들로부터 나병(문둥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게 된다. 오무라 수용소로 이송된 후 수용소측은 시민병원에 의뢰, 2일간 정밀검진을 받았으나, 나병이 아니라 가벼운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소년은 진단결과를 믿을려하지 않고, 나병이라는 의심속의 미궁으로 빠져 든 것이다.

일반 동으로 옮기려고 해도 일반 동의 다른 수용자들이 나병 환자라며 같이 있기를 거부, 병동에 수용된 상태였다. 고교 2학년의 어린나이에 그 무서운 문둥병이라는 소리를 들은 소년은 대단한 쇼크를 받았을 것이다. 말이 잘 통하고 자유스러운 분위기에 부모가 있는 한국병원이라면 그 쇼크를 풀어줄 수도 있었건만, 낯 설고 물 선 외국, 또 감옥의 수용소 병동에서 하루하루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16살 소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하루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文五暎소년의 장례식날 동포로 있는 사촌형님이 왔었다고 한다. 사촌형님이 일본에 있었다는 것은 삼촌이 있었기에 일본으로 밀항을 하게 된 동기가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文五暎소년 사인규명투쟁위원회」는, 소년의 장례식을 끝났으나, 수용소측에 다음과 같은 처우개선를 수용소측에 요구한다. 이 처우개선 요구안을 보면 1965년 당시의 수용소 내부 사정을 어느정도는 알수 있다.

一, 식사개선: 수용소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한 식사 메뉴의 결정이 아니라, 수용자와 당국이 공동으로 급식위원회의 설치(일반 감옥인 교도소는 급식위원회가 있었다)
二, 침구및 위생: 모가 없는 모포 10장을 교도소 수준의 모포로 바꾸어 줄것. 소독약과 구충제를 자치회앞으로 지급해 줄것.
三, 의료진찰: 자비로 진찰의료를 원하는 자는 자유롭게 의사를 선택할 수 있게 한다. 또 진단결과는 자치회로 서류로서 통보한다.
四, 면회: 가족이 수용소에 수용된 가족간의 면회는 2주에 1회가 아니라 수시로 할 수 있게 하고, 면회시간도 30분 이상, 또 기록도 하지 않으며, 경비관도 배석하지 않는다.
五, 편지: 편지 수신송신은 당국이 직접 행한다. 편지내용 중 사상문제는 당국이 간섭하지 않는다. 서적및 신문의 구입은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한다.

六, 빈곤자 대책: 빈곤자에게는 교도소 수준의 작업을 하게 한다.(교도소에서는 작업을 하게 하여, 그 노동비를 지급)
七, 철조망 철거: 각 동을 나누는 철조망은, 구속후 또 구속하는 2중의 구속이다. 철조망을 철거하여 빈터와 운동장을 쓸 수 있게 한다.
八, 문화활동: 수용자의 오락은 수용자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고유의 오락활동을 금지해 왔으나 그 금지를 즉시 폐지하고 간섭하지 않는다.
九, 물품구입: 물품구입은 한정된 상점에서만 할 수 있으나, 상점 선택을 자유롭게 한다.

또 수용자들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하여, 수용자들을 위한 다음과 같은 사항도 채택했다.

一, 도박행위는 금한다. 지금까지 도박으로 발생한 채권채무는 무효로 한다.
二, 상하층에 있는 매점을 개인경영이 아니라 통일 자치회가 직접 경영하며, 메점의 이익금은 전부 공개하며, 이익금으로 빈곤자대책을 하며 문화활동비로 책정한다.
三, 자치회 회칙을 새롭게 작성한다.

위의 처우개선 요구안과 정풍안은, 젊은 사람들이 주동된 「文五暎소년 사인규명투쟁위원회」가 주동이 되여 채택되고 진정하게 된다. 또 지금까지 수용소내에서 힘을 발휘해 왔던 자치회는 상대적으로 힘을 잃게 된다.

자치회의 간부는 주로 형법위반자가 많게 된다. 그들은 수용소에서 몇년씩 있었기에 내부를 잘 알고 있고, 또 가석방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가석방이 될려면 당국의 말을 잘 들어 비위를 맞추어야 된다. 수용소측의 목적은 조용히 말썽없이 수용시키고 싶고, 그래야 간부 공무원의 실적이 되어, 진급에도 유리하다.

가석방을 받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형법위반자들의 목적과, 조용히 수용시키고 싶은 수용소측의 목적이 일치, 자치회는 어용자치회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에서 간 젊은 밀항자들이 발끈하고 일어선 것이다. 주도권을 잡아가는 규명위원화와 주도권이 떨어지는 자치회간에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그 싸움에 수용소가 관여하게 되며, 또 수용소의 관여는 목적이 일치한 자치회간부에서 유리하게 움직이게 된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제3동 수용자 196명 전원이 15일날 저녁식사를 안먹는 단식투쟁으로 돌입, 주모자 22명은 완전무장한 경비관에게 끌려 독방에 감금되게 된다. 또 감금된 투쟁자 중에는 1주일간이나 단식투쟁을 한 사람들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후 6월29일 일본 선박 「츠바기마루」로 한국으로 강제송환이 되었다.

● 文五映소년의 자살 및 그후의 처우개선에 관한 당국의 처신에 관해서, 일본 서적 및 당시의 일본 신문, 또 한국 신문에도 보도 되었다.

『오무라 수용소(大村收容所)』 (朴正功저, 京都大學出版會, 1969년8월)
오무라 수용소 당국이 발행한 『大村入國者收容所20年史』(1970년)
일본 신문 長崎신문(1965년6월3일), 長崎時事신문(1965년6월3일)
수용자 농성및 처벌에 관해서는, 아사히 신문(朝日신문 , 6월17일), 한국신문 國際新報(부산소재, 1965년6월17일)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제주의소리>

<신재경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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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진화 2011-01-31 18:51:17
본인에 의해 삭제 되었습니다.
116.***.***.77

나들이 2011-01-27 12:42:22
참~ㅠ.ㅠ.....이러한 자료를 올려주셔 감사합니다.
122.***.***.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