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그 공존과 융합 그리고 다양성
이스탄불, 그 공존과 융합 그리고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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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 길을 묻다] (4) 문화유산의 길, 이스탄불(Istanbul)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이슬람과 기독교, 그 공존과 융합 그리고 다양성

  이스탄불을 선택한 것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나누어지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접합과 융합의 다양성을 직접 보고 느끼기 위해서였다. 이스탄불을 걷다보면 이웃과 섞여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되지 않는 통합'보다는 차라리 '될 수 있는 포용’을 배워야 하는 제주로서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이스탄불에서 집어낸 것은 뜻밖에 ‘또레랑스’ 관용이었다. 2천년의 세월을 때로는 기독교의 본거지로, 때로는 이슬람의 맹주로 거대종교 지배민족 서양과 동양을 바꾸어 가면서 세계의 중심이었던 도시. 그 지배와 피지배, 중심과 주변을 문명의 종말없이 이어낸 것은, 그래서 오늘 가장 빛나는 세계유산으로 우뚝 서있게 한 힘은 바로 ‘인내하고 서로 인정하고 그래서 용서할 수 있는 투르크인의 ‘관용하는 마음’이었다.

▲ 이스탄불 성 소피아 대성당 ⓒ송재호
  평평한 대지가 움푹 꺼지고 올라올 만큼 기나긴 세월을 문화와 종교와 민족을 바꾸어 살아오면서 죽음과 죽임, 파괴와 학대, 설움과 눈물, 그 한이 참으로 깊고 컷을 터인데 그것을 다 녹아내리게 껴안는 ‘포용의 정치’가 보스포러스 해협을 지나가는 물길처럼 한결같이 거대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에 쳐져 좀 못산다고 해서, 유럽에도 잘 끼지 못하고 아시아에서도 제대로 행세를 못한다고 하여 ‘별 볼 일 없을 거’라는 이스탄불, 터키에 대한 편견이 내내 부끄러웠다.

  나폴레옹이 이스탄불을 두고 만일 세상이 하나의 나라였다면, 그 수도는 이스탄불이 되었을 것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길목 문명사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이스탄불은 세계 최초의 철기문명 히타이트로부터 이오니아, 비잔티움이라는 그리이스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로마의 도시, 이스탄불의 오스만 투르크 도시에 이르기까지 한 도시 안에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모두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문명과 역사가 명멸하고 교차한 곳이다.

▲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 움푹 볼록한 길의 모양이 길고 긴 세월의 연륜을 말하고 있다.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멀리 동양과 서양을 잇는 보스포러스 대교가 보인다. ⓒ송재호
  이스탄불의 융합과 다양성의 흔적은 교회와 사원, 궁전 속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이스탄불을 걷는 것은 아직도 이스탄불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찬란한 역사의 체취를 호흡하는 것이고, 클레오파트라가 석양을 바라보며 걸었다는 아름다운 해변을 현대적 의미로 맛보는 것이다.

  이스탄불의 길은 무엇보다 문화유산의 길이다. 그것은 이스탄불 옛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트램(노면전차로 트램봐이라 함)을 따라가는 것이 편리하다.

  그 시작은 베이야지트(Beyazit) 역에 있는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 다음이 이스탄불의 3대 백미 아야 소피아(Hagia Sophia) 성당과 술탄아흐메드 모스크, 그리고 톱카프(Topkapi) 궁전이 있는 술탄아흐메드(Sultanahmet)역이다. 다음 역은 프랑스 파리를 출발해 유럽의 여러 도시를 거쳐 터키 이스탄불까지 운행되던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종착역 시르케지((Sirkeci),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살인’의 무대이기도 하다. 운행은1977년부터 정지되었고 지금은 평범한 전철역일 뿐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 다음이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나가는 배를 탈 수 있는 선착장 에미뇨뉴(Eminonu)역. 건립도중 술탄이 세상을 떠나 56년이나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다시 지은 예니자미(새 사원이란 뜻)와 스파이스 바자르(Spice Bazaar), 그리고 고등어 케밥 발륵 에크멕으로 유명하다. 에미뇨뉴항에서 갈라타(Galata) 2층 다리를 건너면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누어지고 카라쿄이(Karakoy)역 갈라타 타워로 이어진다. 갈라타 타워를 뒤로하고 트램의 종점인 카바타스(Kabatas) 역에 내리면 돌마바흐체(Dolmabahce) 궁전이다. 궁전을 나와 이스탄불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이스틱클랄 거리를 지나면 신시가지 탁심(Taksim)에 이르고 여기서 문화유산걷기는 일단락된다. 짧은 듯하지만 군데군데 뒷길도 보고 기다리는 시간도 고려하면 꼬박 이틀은 잡아야 한다. 

▲ 이스탄불 시내 트램봐이 ⓒ송재호
  바자르는 이슬람 세계의 경제활동 장소, 큰 시장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랜드 바자르와 스파이스 바자르는 유적지를 걷는 밋밋함을 눈 쇼핑의 재미로 메꾸어 준다. 이곳에서는 터키의 특산물 양탄자를 비롯해 금과 사파이어, 루비, 에메랄드 등 보석과 가죽제품, 골동품, 시계, 의류, 물 담배용 파이프 등 수천 가지의 상품이 판매된다. 정찰제가 기본이기는 하나 에누리 없는 장사는 없는 법.

▲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 입구 ⓒ송재호
▲ 이스탄불 스파이스(이집티안) 바자르 입구 ⓒ송재호
▲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 ⓒ송재호
▲ 이스탄불 스파이스 바자르 ⓒ송재호

▲ 이스탄불 스파이스 바자르 ⓒ송재호

▲ 이스탄불 스파이스 바자르 ⓒ송재호

▲ 이스탄불 스파이스 바자르4 ⓒ송재호

▲ 이스탄불 스파이스 바자르 ⓒ송재호

▲ 이스탄불 스파이스 바자르 ⓒ송재호

▲ 이스탄불 스파이스 바자르 ⓒ송재호

  그랜드 바자르를 나와 20여분을 걸으면 술탄아흐메드 모스크, 햇살을 비추면 형형색색의 빛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블루 모스크. 내부 벽과 기둥이 99가지 푸른색의 타일로 장식돼 있어 블루모스크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고. 이 푸른색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서 건너온 이즈믹 스타일이라고 하니 동서문화의 융합 현장을 보는 셈이다. 블루 모스크를 나와 길거리에서 구운 옥수수와 밤을 파는 니어카 노점에서 더욱 동양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아야 소피아 성당이나 톱카프 궁전은 입장료를 받지만(유산보전 기금을 관람객에게 받아서 조성한다고, 입장료가 우리돈으로 1만6천원쯤) 술탄아흐메드 모스크는 사원이라서 그런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대신 기부금을 낼 수 있고, 기부금을 내면 0.5리라당 한 장씩 영수증을 준다.

  사원 내부는 흡사 시장통, 도무지 기도하는 사원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참으로 다양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다양한 언어를 쏟아내고 있었다. 사람구경을 하러 들어온 건지, 사원을 보러 온 건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

  술탄 아흐메드 1세가 아야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모스크를 세워, 가울어져가는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했으나, 통치자의 바램에 그치고 말았다. 큰 건물 하나 세운다고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막아낼 수는 없는 것.

▲ 이스탄불 블루 모스크 ⓒ송재호

▲ 이스탄불 블루 모스크 천장, 은은한 저 푸른 빛이 동양에서 왔다고. ⓒ송재호

▲ 이스탄불 시내 군밤과 옥수수를 파는 니어카 노점상, 영락없이 우리의 모습이다. ⓒ송재호

▲ 이스탄불 블루 모스크에 모인 인간상들. 기도와 구경, 천국와 속세가 한곳에서 하나로! ⓒ송재호
▲ 이스탄불 블루 모스크 기부금 영수증 ⓒ송재호
  사람이 만든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라는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블루 모스크 바로 앞에 우아하게 서 있다.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술탄아흐메드 모스크보다 훨씬 오래 전인 53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천5백년 전쯤 세워진 건축물이다.

▲ 이스탄불 성 소피아 대성당2 ⓒ송재호
  이 성당은 세 번이나 세워진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처음 지어진 것은 320년이고 두 번째 건립은 415년, 두 번 다 성난 군중들의 반란으로 불 타 없어졌다고 한다. 성당 건물 밖 여기저기 돌덩어리들이 흩어져 있다. 반란 때 불타고 남은 성당의 잔해라는데, 이 돌덩어리들에 새겨진 흔적들이 반란 군중들의 분노인 듯 했다.

  반란이 진압된 뒤, 황제는 수도를 재건하면서 그 위세의 상징으로 대성당을 다시 짓고자 했을 터. 그 웅장하면서 화려한 성당이 바로 지금의 소피아 대성당인 것이다. 천장과 벽을 장식한 모자이크 그림은 어찌나 섬세하던지, 사람이 그린 것 같지 않았다. 장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 능력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역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정복자 메흐메드 2세는 이 성당을 모스크로 바꾸고 이슬람에 봉헌하라 명령한다. 이제 성당은 성당이 아니라 술탄의 소유물로 전락한 것. 대성당 안에 이슬람 문양과 코란의 구절이 채워진 것은 그 때문이다. 성화에는 회 반죽을 덧칠해 버렸고 성당은 이후 5백년 가량 모스크로 운명지워졌다. 성당이 다시 성당의 모습을 찾은 것은 ‘터키의 아타튀르크(아버지)’ 카말이 술탄 시대를 끝내고 공화정을 시작하면서 박물관으로 바꾼 후 부터다. 회 반죽은 벗겨지고, 성화는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버린 기독교와 이슬람의 운명적인 만남과 결합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 이스탄불 성 소피아 대성당 천장 ⓒ송재호
▲ 이스탄불 성 소피아 대성당 ⓒ송재호
▲ 이스탄불 성 소피아 대성당 ⓒ송재호

  아야 소피아 대성당을 나와 오른 쪽 편 길로 다시 20여분 걸어가면 톱카프 궁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통치자 술탄시대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술탄 메흐메드 2세 때인 1467년에 세워진 이 궁전은 4백년간 술탄들의 거주지였다가 돌마바흐체 궁전이 지어지면서 그 역할을 다했다고 전해진다.  

▲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송재호
  톱카프 궁전에는 오스만투르크 시대 절대권력을 지닌 역대 술탄들의 생활상이 남아있다. 술탄이 살던 궁정과 술탄의 여인들이 기거하는 하렘, 그리고 궁전 안의 보석들과 다양한 수집품들은 화려하고  번성했던 오스만제국의 모습을 가늠케 해준다. 바티칸의 두배, 모나코 왕국의 절반 정도 21만평에 이르는 궁전에는 술탄과 가족 이외에도 5만명이 넘는 시중과 군사, 관료들이 거주했었다고 한다. 톱카프 궁전은 3개의 문과 4개의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다.

  술탄의 여인들이 살았던 하렘은 제3의 문에 있는데 약 2백50개 정도의 방이 있고 남성출입금지 구역이다. 전성기때 하렘에 사는 여인들의 수만도 1천명이 넘었다고 하고 군주가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비밀통로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곳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대의 각종 보석과 보물을 전시한 보석관이 있다. 특히 도자기관에 중국산 자기 1만2천여점, 일본산 자기 8백여점을 소장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송재호

▲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송재호

  시르케지 역에서 걸어서 이십 분, 에미뇨뉴 부두가 나온다. 이스탄불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갈라타 다리가 이곳에서 시작된다. 다리를 건너면 카라쿄이 부두다.

  에미뇨뉴항은 시내교통의 요지. 보스포러스 해협투어와 갈라타 다리, 에니자미와 배 위에서 직접 구어 파는 고등어 케밥으로도 유명하다.

  제우스와 바람을 피운 이오가 헤라의 질투를 피해 암소로 변장해 도망쳤다는 곳, 보스포러스.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보스포러스는 '암소가 건너다'라는 뜻이다. 궁전과 성곽, 부유한 별장과 화려한 요트, 이스탄불에서 내노라하는 부자들이 다 보스포러스 해협 양편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앞에서 고기를 잡아 생업을 잇고 있는 이스탄불 어부들, 평일임에도 4백80m 갈라타 다리를 한치의 틈도없이 죽 늘어선 강태공들(할 일이 없는 실업자라고)의 모습이 오늘 이스탄불이 처한 상황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때마침 버려진 드럼통에 몸을 싣고 보스포러스 조류를 따라 지중해로 떠내려가는 이름 모를 흑조의 모습이 이스탄불의 쉽지 않은 현실을, 장면을 바꿔 다시 밝지만은 않은 제주의 미래와 오버랩되어 다가왔다. 그래도 이스탄불은 하루 다섯 차례의 기도와 금주, 일년에 한달은 화내지 않고 욕하지도 않고 불행한 이웃을 도와주는 이슬람의 율법, 그 정신적 기둥이라도 있어 버티어내겠지만, 제주는 ….

  카라쿄이에서 다시 위쪽으로 길을 재촉하면 갈라타 타워. 탑에 오르면 이스탄불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밤에 바라보는 야경은 더 아름답다.

▲ 이스탄불 에미뇨뉴항 ⓒ송재호


▲ 이스탄불 에미뇨뉴 부두 고등어 케밥 ⓒ송재호

▲ 이스탄불 에미뇨뉴 부두 고등어 케밥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낚시로 생업에 종사하는 어부들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강태공들, 매일실업(?) ⓒ송재호

▲ 40이스탄불 갈라타 다리위 빽빽이 들어선 낚시인들, 여기도 매일실업(?)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깡통에 실려 떠내려가는 흑조 ⓒ송재호

▲ 이스탄불 갈라타 타워 올라가는 입구 ⓒ송재호

▲ 갈라타 타워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전경 ⓒ송재호

▲ 갈라타 타워에서 바라본 해질녘 이스탄불 야경 ⓒ송재호

▲ 이스탄불 갈라타 타워 야경 ⓒ송재호

  갈라타 타워를 나와서 다시 좁은 골목길 오르기를 계속하면(길 양옆으로 옷가게 과일가게 커피숍 공예품가게 등이 늘어서 있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이스틱클랄 거리에 이른다. ‘이 사람들이 대체 어디서 순식간에 쏟아졌을까’,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거리의 역동성을 들여다 보면서 앞으로 계속 걸어나가면 탁심광장이다.

▲ 이스탄불 탁심광장으로 가는 이스틱클랄 거리 사람의 물결 ⓒ송재호
  이스탄불 탁심광장에서의 역동성

  이스탄불 탁심광장과 공화정 기념비

  트램의 종점 카바타스 역, 돌마바흐체 사원이 눈에 들어오고 오른쪽으로 시계탑을 거느리고 돌마바흐체(Dolmabahce) 궁전이 서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이 세워진 것은 1856년. 오스만투르크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고, 술탄은 웅장한 궁전을 새로 지어서 국가의 번영을 상징하고자 했다. 화려한 궁전 하나 세운다고 기울어가는 나라가 다시 일어날까, 오히려 궁전을 짓느라 막대한 국고를 탕진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편을 드는 어리석은 선택까지 보태 결국 제국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운명을 감내해야만 했다.

  하마터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한 터키를 구한 것은 청년 장교들을 이끌고 혁명을 일으킨 무스타파 케말 장군. 1922년 터키 공화국을 세웠다.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케말 장군은 지금까지  '터키의 아버지 아타튀르크’라 불리우며 터키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 케말 아타튀르크는 1938년, 이곳 돌마바흐체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가 숨을 거둔 시간은 9시 5분, 궁전의 모든 시계들이 여기에 맞춰져 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국민의 마음일 것이다.

  오스만투르크의 마지막 황태자 마흐메드 오르한. 무스타파 케말이 쿠데타를 일으켜 오스만투루크 제국을 무너뜨리고 터키 공화국을 세우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술탄의 자리에 올랐으리라. 하지만 황태자의 운명은 가혹했다.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오르한이 터키에서 추방당한 것은 그의 나이 15세 때. 68년간을 택시기사 배달부 등 잡직에 종사하면서 국제낭인으로 유랑하던 그가 꿈에 그리던 조국 터키로 돌아가 돌마바흐체 궁전에 다시 들른 것이 그의 나이 83세 때라고 하니가, 그 비운의 깊이와 길이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평생을 산 그가 터키에 돌아가 머문 기간은 고작 5박6일,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황태자는 날이면 날마다 공항 라운지에 나가 터키 커피를 마시면서 조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이 세상을 떴다고 하니 ….

▲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 ⓒ송재호

▲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의 사원 ⓒ송재호

▲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 입구 ⓒ송재호

▲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 내부 ⓒ송재호

  역동적인 도시 현대도시로서의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 정비된 해안길을 걸으면서 느낄 수 있다. 이 길은 사리예르(Sariyer)에서부터 시작하여 타라브야(Tarabya)와 예니코이(Yenikoy), 루메리 히사리(Rumeri Hisari), 베벡(Bebek), 코레즈(Kolej)를 거쳐 오르타쿄이(Ortakoy)까지 아름다운 해변을 따라 25Km 정도 이어진다.

  사리예르에는 터키의 서정적인 어촌풍경이 가득하고, 에니코이에서는 탁트인 아름다운 전망을 담을 수 있다. 베벡에서는 현대적이지만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오르타쿄이는 젊음의 거리답게 활력이 넘쳐난다. 오르타쿄이에서 먹어본, 구운감자 속에 야채와 생크림을 담은 쿰피르(Kumpir)와 독특한 오르타쿄이 와플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맛으로 남았다. 걷고 그러다가 둘러보고 쉬고 또 걷고, 지루하면 한구간 쯤 마을버스를 타고 그러다보면 하루가 지난다. 이스탄불의 버스에는 차비를 받는 남자 차장이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해 보였다.

  한 도시 안에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3 대륙을 만나는 것, 고대와 현대를 두루 경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말한대로 이스탄불은 ‘살아있는 박물관’,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극과 극이 공존하고 융합하면서 새로운 역사로 이어져가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였다.


▲ 이스탄불 사내(에미뇨뉴항)에서 교외 사리예르 가는 정기여객선 ⓒ송재호

▲ 이스탄불 사리예르 선착장 ⓒ송재호

▲ 이스탄불 사리예르 전통적 어촌 모습 ⓒ송재호

▲ 이스탄불 사리예르 시내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해안길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해안길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해안길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해안길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해안길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해안길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해안길 도중 베벡 커피숍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해안길 중 공원길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해안길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해안길 ⓒ송재호

▲ 사리예르에서 출발한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해안길의 종점 오르타쿄이 시내 ⓒ송재호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해안길, 항상 젊은이들로 붐비는 오르타쿄이 ⓒ송재호

▲ 이스탄불 오르타쿄이 ⓒ송재호

▲ 이스탄불 오르타쿄이 ⓒ송재호

▲ 이스탄불 오르타쿄이 쿰피르와 와플 ⓒ송재호

▲ 이스탄불 오르타쿄이 쿰피르와 와플 ⓒ송재호

▲ 이스탄불 오르타쿄이 쿰피르와 와플 ⓒ송재호

  인류가 살았던 유적시대로부터 최초의 철기문명 히타이트,  비잔틴 제국과 동로마 제국, 그리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이르기까지 2천년을 이어가면서 세계를 제패한 땅, 그 동력은 무엇인가?

  스탠포드 대학의 폴 데이비드 교수는 ‘역사는 한번 틀이 박히면 그 경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다음 시대 이스탄불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까?

  수없이 많은 문화와 문명, 국가와 종교, 지역과 시대가 다중 다층으로 융합된 모자이크 도시. 가장 신성하면서도 가장 세속적인 것, 최첨단의 인테리젠트 건물과 떠들썩한 재래시장을 함께 그러나 혼합되지 않고 존재하는 도시.

  이 도시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분명한 힘은 진화는 하되 흡수되지는 않는 것,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체성과 도덕성, 다시말해 건강한 토종을 지키면서 기꺼이 서로 다름을 수용하고 용해하는 그 땅의 ‘또레랑스’ 관용 정신일 것이다.

  천년의 시선으로 보면 중국 한반도 일본으로 둘러싸인 동아지중해를 누볐던 옛 탐라의 기상과 영화가 역사의 경로의존성을 따라 다시 부활할 때를 맞고 있는 이즈음, 제주가 다시하번 다짐하고 각오해야 할 것은 우선 더 이상 다툼과 증오는 그만두고 우리부터 끌어안고 포용하자는 것이며, 외부의 문화와 경제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토종은 더욱 지키고 가꿔야 한다는 것이고, 4·3을 대표로 하는 우리 고난과 질곡의 역사는 진실은 그것으로서 기록하되 관용하고 오히려 축제의 신명, 큰 웃음으로 승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가 외부세계와 융합하지 않고 홀로 자립하고 자존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자원, 문화, 경제가 위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스탄불의 걸음걸음이 제주에 던지는 의미였다. 왕래와 혼합을 담은 그들의 얼굴에는 그것이 새겨진 듯했다.
 

▲ 터키에서 만난 다양한 표정들 ⓒ송재호

▲ 터키에서 만난 다양한 표정들 ⓒ송재호

▲ 터키에서 만난 다양한 표정들 ⓒ송재호

▲ 터키에서 만난 다양한 표정들 ⓒ송재호

▲ 터키에서 만난 다양한 표정들 ⓒ송재호

▲ 터키에서 만난 다양한 표정들 ⓒ송재호

 

   

송재호 교수는 서귀포시 표선면 출신으로 제주제일고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학고 경기대에서 경영학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현재 제주대 교수(관광개발학과)로 재직중이다. 현실정치에도 관심을 둬 민주당 열린우리당내 개혁세력으로 활동해 왔으며 참여정부에 발탁돼 국책연구원장인 한국문화관광연구원장으로 2년6개월동안 재임하면서 ‘섬UN’ 창설과 ‘한-중-일 크루즈관광’ 활성화를 제안하는 등 제주관광국제화를 다지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해 왔다. 제주글로벌상공인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아 국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제주상공인을 하나로 묶고, 미래 제주발전을 위한 원동력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경제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에 전력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송재호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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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2011-01-30 22:53:45
무작정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드네요.. 잘읽고 갑니다..
앞으로도 좋은기사...부탁드립니다...
112.***.***.105

길에서 2011-01-30 14:30:26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아시아와 유럽,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요충지였던 터키를 봅니다. 흉족(흉노족), 말갈족, 돌궐족등의 오랜세월 우리와 함께 했던 역사를 다시 한 번 생각 해 봅니다. 잘 읽고 갑니다.
121.***.***.30

제주시민 2011-01-28 12:54:02
이 연재기사, 원래 길을 주제로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근데 길은 없고 여행기사로 흘러가네요.
시중에 넘치는 게 여행기고, EBS의 여행프로그램도 있는데 굳이 여행기를 연재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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