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몽골을 만나다] (2) 남송-일본-고려 대몽전선 형성 요지

▲ 강화산성 ⓒ김일우·문소연

무신정권 말기, 제주는 고려의 서울 후보지로 떠올랐던 곳입니다. 이 역시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정부의 제주 재천이 거론되던 당시 고려정부는 강화도에 있었습니다. 고려가 개경에 있던 정부를 강화도로 옮긴 것은 몽골의 첫 침략이 있고 난 다음해인 1232년(고종 19)이었습니다. 무신집정자 최우가 강화도 천도를 위압적으로 몰아붙였고, 몽골과의 항쟁은 장기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몽골침략이 가장 극성을 부리던 고종 18년(1231)부터 46년까지 제주지역은 군사적 침략을 직접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육지부 지역은 6차례에 걸친 11회의 몽골침략을 받아 유린당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민생은 도탄에 빠져들었고 국가 재정은 극도로 악화되기에 이릅니다. 그 사이 고려백성들도 달라져버립니다. 대몽항쟁의 초창기에는 항몽전에 적극적이었지만, 몽골에 투항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국토는 피폐해졌는데 무신정권과 그 지배층은 강화도에 웅거한 채 정권의 안위에만 집착하고 제대로 된 항쟁 방책이나 민생구제책을 시행하지 않았으니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겠지요. 

무신정권의 집권력은 점차 약화되어 갔고, 고종 40년(1253) 무렵 조정의 논의는 몽골과의 강화(講和)론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고종 41년, 몽골군의 적극적인 연안 섬 공세에 위기감을 느낀 무신집정자는 강화도를 버리고 개경에서 더 멀리 떨어진 다른 섬으로 정부를 옮기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 유력한 후보지가 바로 제주였던 것이지요.

무신정권 말기에 제주는 세 차례나 정부 재천 후보지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는 무신집정자의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남송과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의 요지에 있는 제주에 근거지를 잡은 뒤, 이들 두 나라와 대몽연합전선을 형성하려했던 것이었습니다.

1270년(원종 11), 무신집정자 임유무가 삼별초의 거사로 제거됩니다. 그로써 무신정변이 일어난 1170년부터 시작된 무신정권은 딱 100년 만에 무너집니다. 그리고 고려정부는 다시 개경으로 환도해 몽골과 강화를 맺고 몽골과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관련유적 돌아보기>

삼별초와 고려 개경정부 관군의 싸움터
동제원과 송담천

▲ 동제원과 송담천 ⓒ김일우·문소연

▲ 동제원 터 ⓒ김일우·문소연

동제원 터는 현재 제주시 화북동 오현고등학교 정문 앞에 있는 거리 일대를 일컫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동제원은 주 동쪽 9리에 있다. 남은 터가 있는데 곧 이문경이 군사를 진 쳤던 곳이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진도삼별초가 보낸 이문경 부대가 진을 쳤던 이곳에 조선시대에는 제주를 오가는 관리들이 묵었던 숙박소인 ‘동제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 송담천 ⓒ김일우·문소연

송담천은 지금의 제주시 화북1동 화북주공아파트 동쪽에 있는 하천을 일컫습니다. 1270년(원종 11) 명월포를 통해 제주에 들어와 동제원 터에 진을 친 진도삼별초의 이문경 부대와 화북 해안지대를 방비하던 고려 개경정부 관군이 전투를 벌인 곳이지요. 송담천 전투로 관군은 전몰했고 삼별초군의 희생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피가 강처럼 흘렀고, 송담천의 바위들은 피에 젖어 지금도 붉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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