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 (21) '천태만상' 오무라 수용소 내부 생활

오무라 수용소는 한국의 대북 공작장소로써, 또 북한의 대남 공작장소로도 이용되기도 했다. 북한은 한국에 간첩을 침투시킬 목적으로 북한에서 일본으로 밀항시켜 일부러 실패를 한다. 그러면 오무라 수용소로 가게 되며, 한국에서 밀항을 왔다고 하면 한국으로 강제 송환 된다.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침투가 가능해진 것이다. 한국 정보당국은 이런 루트를 통한 간첩을 검거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62년11월30일)

일본정부는 1959년부터 재일동포들을 북한으로 보내는 북송사업을 시작한다. 총 9만3천명이 북한으로 갔다. 이때 오무라 수용소에 수용된 밀항자도 형법위반자 동포들도 북한으로 가겠다는 의사가 있으면 북한으로 보냈다. 한국정부의 반발이 있어도 일본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온 밀항자까지 북한으로 보냈다.

수용소의 발표(大村入國者收容所20年史)에 의하면, 1960년6월까지 오무라 수용소에서 직접 북송시킨 사람이 133명, 그후 1967년까지 각 입국관리국을 통해서 북송된 사람이 70명, 또 각 항구를 통해서 자비로 북송한 사람까지 다 합쳐서, 총 219명(남 184명, 여 35명)이 북송선을 탔다.(大村入國者收容所20年史 97쪽) 여기에는 밀항자와 형법위반자를 구별하여 기재하고 있지 않아서, 밀항자가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에서 밀항한 사람들도 북송선을 탔다.

당시는 베트남 파병을 할 때 였다. 군대를 탈영하거나, 혹은 군대 휴가로 귀가했다가 밀항배를 타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오무라 수용소로 가게 되어 한국으로 송환되면 군법회의로 넘어가게 된다. 조총련은 이들을 정치적 망명이고, 한국으로 보낼수 없는 사람이라며 이의를 제기 한국으로 강제송환을 거부시켜, 북한으로 보내는 공작활동을 했다. 북한으로 가게 되면 군사기밀을 그대로 가져 가게 되는 것이다.

이젠 수용소 내에서 수용자들이 남쪽 지지자들과 북쪽 지지자들이 갈라져 서로 싸움을 했다. 밀항자들은 한국으로 가게 되면 또 한번의 조사를 받게된다. 정보기관에서 일본에 있을 때 조총련계와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를 받아야 된다. 한국에 돌아온 후의 조사를 잘 통과할려면, 일본 수용소내에서 반공 대열로서 혁혁한 성과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수용소 내에서도 반공전선에 앞장서서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과 목숨 걸고 싸웠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 조사관에게 보여주어야 조사가 쉬워지는 것이다. 싸움에 지친 수용소 측은 남과 북을 나누어서 격리 수용하게 된다.

▲ 1968년 8월부터 송환에 쓰여진 배, 有保丸(유우호마루)

한국 정보당국은 일본에서 조총련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 한국으로 입국하는 것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국으로 강제송환 된 후, 밀항자들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더 앞서서 수용소에 수사요원을 파견시켜 한국으로 입국하기 전부터 조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사요원 파견이란, 일본으로 밀항시켜 걸리게 해서 오무라 수용소에서 다른 일본 밀항자들과 같이 수용되면서 동태를 파악, 한국에 왔을때 그 동태를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먹고 살기 어려워 일본으로 밀항한 같은 처지의 밀항자로만 생각하며, 옆에서 잠도 같이 자던 동료가, 한국에 강제송환 되어서 배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바로 하사관 계급장이 붙은 군복으로 갈아있고, 밀항자들을 집합시켜 대열을 호령하며 정리시키고, 몇몇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데려갔다고 한다. 당연히 그 몇몇은 큰 고통을 받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밀항은 중독증세가 있다. 당시 일본 물을 먹은 사람은 오무라 수용소를 거쳐서 한국으로 와도 또 일본 밀항길을 택한 사람들도 많았다.

1960년대 제주도. 제주시 중심가에만 전기가 들어왔다. 화장실은 어떠했는가? 돼지가 있는 변소였다. 필자의 집도 제주시였지만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돼지 변소에서 푸세식 변소로 바뀌었다. 그러나 일본은 그때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수세식 화장실을 맛 본 사람이 제주도에 들어와서 다시 돼지 변소를 사용할려면 수세식 생각이 어른어른하다. 그래서 다시 밀항길을 가게되며, 또 오무라 수용소이다.

지난번 오무라 수용소에서 경험을 최대한 살려, 한국에 갔을때 그 무시무시한 조사를 조금이라도 쉽게 빠져 나갈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는, 학습효과가 자연히 나오게 된다. 그래서 북한 추종자들과 싸우는 반공대열이 있다면, 아주 철저히 그 대열의 앞에 서서 싸우는 일만이 한국에 갔을때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다.

탈출에 성공한 사람도 있었다. 지급된 면담요를 이용한 것이다. 면담요 10장을 찢어 꼬아서 밧줄을 만든 것이다. 밥통을 옮기는 고리를 변형시켜, 벽을 탈수 있는 등산용 고리를 만든 것이다. 오후5시가 되면 전원 자기방으로 들어가야 된다. 이 사람은 자기방에 들어 가지 않고 하수도 뚜껑을 열고서 숨었다가, 어두운 밤에 밧줄을 걸고서 등산용 고리로 높은 벽을 찍어서 올라가서 벽을 넘는데 성공,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결국 이 탈출의 성공으로 수용소장은 좌천되고 말았다.

▲ 오무라 소용소에서 부산으로 나오는 뱃길

술도 있었다. 수용소 규칙에 의해서 술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밀주를 만들어 마시는 것이다. 발각이 되면 규칙위반으로 수용소 감옥에 가야 될 일이다. 1970년전후때는 수용소에서 토요일날 점심식사는 식빵과 치킨이었다. 식빵에서 둘레의 딱딱한 부분은 떼어내고 중간의 흰부분만 남긴다. 그 흰부분에 소화제를 넣고서 시간을 경과시키면, 곰팡이 즉 누룩이 되는 것이다. 일본의 온방은 온돌이 아니다. 밀폐 되는 통에 뜨거운 물을 넣고서 이불속에 넣고서 잠을 잔다. 그 통을 유딴포(湯暖房) 라 부른다. 이 누룩에 식사때 남겨진 밥을, 유딴포에 넣어, 방에 있는 간이 화장실 위편 햇빛이 잘들고, 교도관들의 눈에 안보이는 곳에 신문지위에 놓고서 적당히 시간을 넘기면 아주 맛있는 술이 되여, 이 술에 사이다를 타서 마시면, 기가 막히는 막걸리가 되는 것이다. 회식때가 되면 각방마다 술 한통씩을 내여 놓아 멋진 회식을 했단다.

한규천(제주도 구좌면 행원리 출신,1944년생)씨는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걸려서 오무라 수용소로 가게되여(1964년), 수용소에서 1년간 있다가 법무대신의 은혜로 가석방 된다. 한규천씨의 증언에 의하면, 외부에서 술을 안으로 들여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일요일날은 수용소 울타리 건너로 어린이들이 모인단다. 아르바이트를 위해서 어린이들이 모이는 것이다. 수용소 2층에서 보면 울타리 밖의 어린이들이 보인다. 당시 돈 천엔짜리를 돌맹이와 종이에 싸서 던진다. 종이에는 이 돈의 반은 너가 가지고 나머지 반으로 술을 사서 깨지지 않게 포장한 다음 울타리 안으로 던져라, 라는 메모를 쓰고서 던지면, 어린이들은 그 돈을 받아서, 메모대로 던진 돈의 반으로 술을 사서, 술병이 깨지지 않게 포장을 해서 수용소 울타리를 넘겨서 안으로 던져 주는 것이다. 안에서는 밖을 믿고 밖에서는 다음 주 일요일날 아르바이트를 위해서 서로 신용거래를 한 것이다. 울타리를 지키는
경비관들은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마도 알았어도 모른척 했었겠지, 라고 말하고 있다.

한규천씨는 그때 고등학생. 밤이면 밤마다 여자 수용동에서 남자 수용동을 향해서 '밥만 먹엉은 못살쿠다...' 라는 아우성을 들었다고 한다. 어린 때라서 그 아우성이 무슨 의미였는지 몰랐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수용소에서 금지된 도박도 있다. 화투를 만드는 것이다. 책받침을 화투장 크기로 오린다. 그 뒷면은 앞면이 보이지 않도록 테이프를 붙치고, 앞면은 화투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Made in 오무라수용소' 화투장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Made in 오무라수용소' 가 장기이다. 밥을 굳친다. 사각으로 잘 굳쳐 딱딱해 지면, 車 包등을 그려 놓는다. 멋진 장기가 되어서 장기판이 벌어진다.

도박은 금지되었지만, 일본 화투에 해당하는 마작은 수용소측에서 빌려주는 형식으로 1개방에 한세트를 렌트할 수 있었다. 도박은 금지라고 하면서 각 방마다 마작을 빌려주는 모순. 돈을 걸지 않고 마작을 하는 사람 있을까? 일본의 대중오락을 수출할려는 심사인지? 오히려 바둑이나 한국 장기나 더 건전한 오락이다. 197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바둑과 한국 장기도 허용되었다.

구기 시합을 한다. 각 동 대항 배구대회. 배구대회를 한다면서 일부러 배구공을 여자 수용동으로 차 버린다. 배구공을 가져오는 척하면서 금지된 여자동 영역으로 들어갈수가 있는 것이다. 여자수용자들과 이야기도 하고, 연애편지도 교환하기도 했다고 한다. 할 일 없고 신체는 건강하니 볼을 가지고 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솜씨도 늘게 된다. 어느 실력없는 학교 팀보다 더 멋진 실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수용자중에는 스포츠에 능한 사람도 있어, 수용소 경비관들과도 시합을 가져, 멋지게 경비관들을 이긴 사람들도 있었다.

▲ 오무라 만 안으로 바다와 연결된 길은 이 뱃길 뿐이었다. 바다물이 세기로 유명하다. 물 때가 맞지 않으면 배 운항을 정지하고 이곳에서 몇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어떤 밀항자는 배를 탈 때 도망하기도 했다. 배가 출항한 다음에 적발되는 것이다. 차로 이곳까지 실려와서 다시 배에 올려서 강제 송환되기도 했다.

한국 남자는 군대 이야기를 빼면 이야기 거리가 줄어든다. 수용소 생활이라 단조롭다. 그래서 군대 이야기가 나온다. 군대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갔다온 군대가 최고라고, 육·해·공군 해병대 별로 선후배가 형성되며 각 군대별로 싸움까지 벌어진다. 이 속에서 대장 노릇을 한 군대는 역시 해병대 였다고 한다. 이들은 군대 미필자이거나 병역과 관계된 남자들을 왕따 하는 것이다. 너는 한국에 가면 일반 교도소가 아니라 군법회의이다, 군대 영창이 얼마나 무서운줄 아느냐, 등의 말로 스트레스를 주어, 완전히 주늑들게 만들고 앓고 병들게 까지 만든다고 한다. 이런 왕따 때문에 북한으로 발길을 돌린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미들급 챔피언 유제두의 복싱 타이틀 메치가 있었다. 텔레비전이 있는 곳은 오직 탁구실 뿐. 그 TV는 체널을 빼버린 텔레비였다. 오직 NHK 만을 볼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저녁5시가 되면 모두 자기가 속해 있는 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 시합은 밤 7시쯤에 했다. 그래서 특별조치로 그 시합만 보게 해달라고 절충해 보았지만, 결국은 통과되지 않았다. 그 절충의 선봉자가 유리창을 파괴하는 등의 난동을 부려, 결국 독방에 격리되어 얼마동안을 고생해야만 했다.

오무라 수용소는 감옥이 아니라 강제 작업도 없고 제복도 없다. 담배도 허용된다. 그래서 개인의 용돈이 필요로 하다. 수용소측도 최소 월 3천엔 정도의 용돈(기본적인 생활용품 구입비) 은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월 3천엔의 용돈을 만들수 있는 사람도 있고,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돈을 가지고 들어가도, 가지고 있는 돈 전액을 수용소측에 맡겨야 된다(영치). 또 외부에서 돈을 보내줄 수도 있다. 그 보내준 돈도 수요소측에 영치를 시켜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치 시킨 돈은 본인의 의사로 지급되다가 출소 때 전액 돌려주게 된다. 그래서 수용소내에서도 귀족과 하인이 존재하게 된다. 귀족이란 가진 돈이 많아서 구내 매점을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기본적인 생활용품은 커녕 거지같은 생활을 보내야 한다.

귀족이 되는 사람은 아주 소수로서, 일본에 밀항을 와서 오랫동안 일을 해서 한 재산 모은 사람들이다. 살만큼 살고 한 재산 모았으니 일본에서 밀항자 생활도 지긋지긋하니 한국으로 귀국하겠다고 자수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경우 본인이 자비로 비행기표를 구입 본인 발로 귀국하는 경우와, 자수를 해도 오무라 수용소로 가는 경우가 있었다.

오무라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경비관들도 놀랄정도로 큰돈을 영치시켜, 매점에 있는 물건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자유롭게 구입, 호화판(?) 생활을 할 수 있다. 돈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해야 무엇하나 얻을 수가 있다. 검은 것을 흰것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이다. 당분간의 기간이지만 부하를 거느리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옷도 자유여서, 입은 옷을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귀족들은 계절에 맞는 옷을 준비하고 또 깔끔한 복장을 하고 있지만, 상륙하기가 무섭게 잡힌 사람들은 작업복 복장이 대부분이고 또 잡힐때 계절의 그 옷을 언제나 입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옷만 봐도 출신 성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밀항자들은 몇개월이면 한국으로 송환된다. 가장 가련한 사람들은 7년이상 옥살이를 끝내고 오무라로 온 사람들인 것이다. 7년이상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 가족도 붕괴되는 경우가 많다. 외부에서 돈을 보내주지 않으면, 7년 전 경찰에 잡힐때 그 옷을 그냥 입고 있어야 된다. 이런 사람은 구멍난 내의(팬티)를
그래로 있고 있었다고 한다.

귀족의 큰 돈을 먹어 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7년 이상의 형을 받은 형법 위반자들은 야쿠자가 많다. 이 사람들은 또 오랜 기간(길게는 4년까지) 오무라 수용소에 있게 되어 고참이 되어있다. 야쿠자가 고참. 도박판의 명수들인 것이다. 이래서 어렵게 번 돈, 한 입에 넣어주고 배를 탄 사람도 있었다.

한국 부산으로 향하는 배 일정이 결정되면, 배를 탈 사람들의 명단이 써 붙여진다. 밀항자들은 이제 한국으로 간다 배를 탈 사람들은 서서히 수용소 생활을 정리한다. 배타기 전날 밤은 먹을 것 없는 파티가 열린다. '바께쓰'가 찌그러져 완전히 묵사발이 되도록 장단을 치며, 고향에 간다고 노래를 부르고 흥에 겨워 한다. 한국에 돌아와도 조사와 고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뻔히 보이지만 그래도 고향이 무엇인지 고향가는 기쁨이 그들을 기쁘게 하게 하는 것이다. 또 고참이라고 밀항자들을 못살게 군 형법위반자들을 반쯤 패버리고 배를 타는 경우도 있었다.

배를 탈 밀항자들은 버스 4∼5대에 분승하고서 오무라(大村) 항으로 향하게 된다. 수용소를 떠나면서, 경비관에게 수도 없이 절을 하는 사람, 경비관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 사람, 경비관 얼굴도 보지 않을려고 등을 돌리는 사람등등, 100사람이면 120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떠나게 된다.

배를 타는 곳은 수용소에서 가까운 곳이며. 수용소 2층에서 그들이 배를 타는 모습이 보인다. 서로가 정이 들어서, 건강하라고 또 잘 있으라고 서로들 열심히 손을 흔들면서 배는 떠나게 된다.

드디어 고국 부산에 들어오게 된다. 전원 괴정 수용소로 데리고 간다. 또 한번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정보 당국에 의한 조사이다. / 신재경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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