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보다도 못한 우리시대‘기록문화’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정치 문화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기록정치’이다. 국가 정책 과정을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기록 문화의 극치’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국가의 기록이라는 것은 정치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보증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투명하지 아니하거나 정당하지 못한 행위 일수록 기록으로 남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소멸시켜 버렸다.

요즈음 우리나라 정치에서는 흔히 ‘獨對’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주요 정책 결정과정에 계셨던 분들이 대통령과의 독대에서 있었던 일들을 후일 회고록에 담음으로써 세상에 알리기도 하지만 사실 진위에 대한 논란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조선 시대의 경우에는 獨對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항상 사관 2명이 배석하여 왕과 신하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였는데 국정 전반은 물론 천재지변, 지방에서 일어나는 일까지도 기록하였다. “왕이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 “왕이 사냥을 나가서 낙마하였는데 사관이 모르게 하라”. 심지어 세종 때에는 여자 사관을 두어 왕과 왕비의 대화까지 기록 하였는데 오래가지 못하여 폐지되었다. 그것은 오직 外戚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史草들은 왕이 죽으면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자료들과 함께 실록으로 편찬 되었다. 기록의 엄정성과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史草는 왕의 생전에 불 수 없음은 물론이고, 왕이 先代왕의 실록을 보는 것도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기록 유산은 세계적으로 매우 드믄 것이다. 중국의 明, 淸 실록과 일본의 3대 실록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 방대함이나 내용에 있어서는 도저히 조선 왕조 실록에 미치지 못한다. 국가 기록원 부산 서고에 보존되어 있는 朝鮮王朝實錄 884책은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이와 같이 글로 된 기록 외에도 왕이 행차나 국가 행사를 상세하게 그림으로 그려 보존 하였던 의괘도 있었다. 지금 영상 기록으로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의괘는 임금이 직접 보는 어람용 등 5부를 만들어 각각 다른 史庫에 보관하였다. 예를 보면 정조 대왕이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출궁하여 수원으로 갈 때 의궤 기록을 보면 수행원의 숫자, 식단, 각종 재료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행차 중 지금 서울 금천구 시홍동 부근에서 1박을 하는데 왕이 받은 조수라(아침상)의 메뉴와 재료까지도 상세히 기록 되어있다.

밥 1그릇 :팥물로 지은 밥
국 : 어장 탕
구이 :쇠고기, 돼지고기, 우족, 숭어, 꿩
채 1그릇 : 미나리, 도라지, 무순, 죽순이, 오이
장 3그릇 : 간장, 중 감장, 수장

 최근에 프랑스로부터 임대 형식으로 들어오는 의괘는 강화도에 보관하였던 어람용 의궤로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문화재다. 경부고속철도사업 입찰시 부터  ‘돌려준다’ ‘다른 문화재와 교환하자’ 하다 가 20여년 만에야 임대 형식으로 우리나라로 돌아오고 있다.
 
 이와 같이 찬란한 기록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제주의 기록은 얼마나 있을까 ?

우리는 탐라왕국의 1천년 역사를 말하고 있지만 왕의 연대표는 물론, 궁터, 무덤 어느 것 하나 알 길이 없다. 오래전 오키나와 류쿠 왕국 왕의 연대표와 잘 보존된 수리성을 보고 큰 부끄럼을 느꼈다. 이러한 기록의 부재는 일제 강점기, 해방 정국과 군정시대도 마찬 가지다. 더구나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중 하나인 제주 4·3사건에 대한 기록도 미흡하여 미국, 러시아까지 가서 찾아오는 현실이다. 더구나 지방자치가 부활하면서 50년대 도의회 속기록을 찾았으나 그것마저 찾을 수 없었다. 

왜 탐라 왕국 기록이 없는가 ?
왜 우리는 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 하는가? 오늘도 외국에 가서 그들의 눈치를 보며 우리 제주의 기록을 찾아야만 하는가?

늦었지만 도에서는 몇 년 전 기록관리 부서를 만들어 기록물 정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에서도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기록물을 수집 정리하고 있다.

오래전 제주 출신 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기금을 지원하여 제주사 정립사업 추진 협의회를 구성 제주사 연표를 만들었으나 아직은 도민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도에서는 먼저 타 시도와 차별화된 ‘기록물 관련 조례’를 만들어 탐라 왕국의 역사에서부터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야 한다. 

둘째는 수집된 자료를 정리 보관하는 완벽한 시설(항온, 항습)을 갖추고 종이 문서는 보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전산화, 필름으로 만들어 각각 보관하고 전산화된 기록물은 언제 어디서나 도민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셋째는 정부에서는 2005년 정부기록 보존소를 국가 기록원으로 확대 개편하고 원장의 직급도 상향 시켰으며 빠른 시일 내 국가 기록청으로 승격시킬 예정이다. 우리 도에서도 담당(係) 차원의 기구를 독립된 기구로 확대 개편하고 문헌정보, 역사학자, 향토 사학자 등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수집 관리 하여야 한다.

▲ 김한욱 전 제주도행정부지사
우리는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그리고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경제 논리와 개발 정책에 밀려 너무 등한시 하는 것은 아닌가?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것은 물론 행정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를 위해서라도 기록의 중요성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행정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리 모두 반성하고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김한욱 전 제주도행정부지사 <제주의소리>

<제주의 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