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안나선다면 도의회가 결심할 수밖에

 자공이 정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것, 군비를 넉넉히 하는 것, 백성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어서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대를 버린다.“
 "어쩔 수 없어서 또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식량을 버린다. 예로부터 모두에게 죽음은 있는 것이지만, 백성들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는 존립하지 못한다."

 백성들의 믿음이 있어야 경제도 있고, 안보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부는 제주도 최대 현안 중 하나인 해군기지와 관련해 입과 귀를 닫고 약속마저 지키지 않음으로써 제주도민의 믿음을 잃었다.

 정부가 중요한 국책사업을 시행하려면 최소한 왜 이 사업이 그렇게 중요한지, 그 일로 입을 수 있는 해당지역 주민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 정도는 얘기를 하는 법이다. 여지껏 주민들의 절규에 이렇게 철저히 귀를 닫고, 정작 국가적인 사업이라고 하면서도 뒷짐을 진 채 만만한 도지사에게만 총대를 메게 하는 예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지난해 10월 제주도가 의회와 합의한 대로 국방부와 해군에 공식적으로 ‘공사 및 행정절차 중지’ 협조공문을 발송한 데 이어, 도의회는 지난 연말 중앙정부 차원의 명확한 입장표명과 지원 대책 수립을 요구하면서 공사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지난 9일에는 “도민 합의 없이 추진되는 공사의 무기 연기”를 요구했지만 정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뿐 아니다. 총리가 문서로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김황식 총리는 해군참모총장이 적절한 시기에 강정마을을 직접 방문해 적절하게 유감 표명을 한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참모총장이 제주를 방문했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

 지난 8일 도의회가 국무총리실을 방문해 정부 차원의 전향적인 자세 변화를 요구했을 때도 “제주도에서 발전계획안을 수립해 요청하면 특별법 통과 이전에라도 현실성 있는 수준에서 지원하겠다”고 원론적 수준의 답변을 들었을 뿐이다. 더욱 기막힌 일은 바로 다음날 해군이 현장사무소 개소식을 가진 뒤 본격적인 기지 공사에 나선 것이다.

 강정 앞바다에 부표를 설치해 민간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가 하면, 화순항에서는 거대한 구조물을 세워놓고 해군기지에 설치할 방파제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다. 이미 강정해안 일부에는 공사에 대비한 트라이포트가 적재돼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정부가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사이 해군은 막무가내로 공사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2년 동안 공사를 진행하지 못해왔기 때문에 공사를 서두를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제주도에서 해군기지 문제를 두고 논란이 시작된 것은 이미 18년이나 된 일이 아닌가.

 해군기지와 관련해 도민합의를 이끌어내기는 커녕, 도민사회의 갈등을 부채질한 것은 지난 3년여 동안 진행된 행정절차라는 것들이 탈법과 무리수로 얼룩져있다는 점이다. 법과 조례를 어겨가며 무리한 여론조사를 통해 해군기지 후보지를 결정한 것이나, 환경영향평가도 받지 않고 국방부 장관이 사업승인을 했다가 법원으로부터 절차상 무효 판결을 받았던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거기다 지난 8대 도의회는 절대보전지역 해제 동의안을 날치기로 처리해 정부의 꼭두각시 노릇으로 갈등을 증폭시켰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정의의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는 황당한 판결로 주민들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강정주민들의 절대보전지역 변경처분 무효 등 확인소송에서 법원은 주민들이 소송을 제기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원고 부적격’을 이유로 본안심의조차 회피하고 말았다.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한 앞선 소송에서는 주민들에게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기도 했던 법원이었다. 그런데 해군기지 절차문제와 관련해 최대 쟁점이 되고 있는 이번 소송에 대해서는 유독 원고의 자격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한 것은 법원 스스로 앞뒤가 맞지 않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제주도정은 “공사중단 요구가 명분도 없고 대안도 되지 않는다”면서 중앙정부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다. 강정주민들의 항소로 소송이 진행중이고, 도의회마저 공사중단을 요구하고 있는데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난해 지방선거 과정에서, 그리고 도지사로 당선된 뒤에도 ‘윈윈 해법’이 있다고 호언장담해 오던 우근민 지사는 어떤 해법을 갖고 있었길래 이 지경이 되도록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지난해 우 지사는 화순리와 사계리, 위미1리, 2리에 각각 해군기지 유치 여부를 물은 바 있다. 이들 마을이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할지 여부를 물으려면 확실한 지원대책을 제시하면서 구체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어야 옳다. 그러나 그 과정은 매우 형식적이었고, 유치를 제안하는 근거로 제주도가 내세운 대책이라는 것도 고작 지난 도정 때 서귀포시장이 마련한 발전계획 수준 이상이 아니었다.
 이들 마을의 주민들이 주민투표나 총회 등의 주민합의 절차를 제대로 갖추어 이뤄진 결정이 ‘부결’로 결론이 난다면, 그 때는 해군기지 건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던 강정주민들도 전제조건인 마을총회나 주민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들어 제안을 취소했다. 도정이 성의를 갖고 임했다면 이런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남은 길은 하나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 그렇게 안보상 중요한 국책사업이라면 정부가 직접 나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제주도에만 맡길 일이 아니다. 이제라도 해군기지 사업이 왜 필요한지 소상히 밝히고 도민을 직접 설득하라. 지금까지의 무성의를 사과하고, 도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지원책을 제시하라. 민의를 대변하는 도의회가 수도 없이 요구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 고희범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정부가 나서지 않는다면 다른 길이 있다. 도의회가 절대보전지역 해제 동의안의 취소를 의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마침 도의회가 23일 긴급 전체의원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난 8대 도의회가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의 주도로 이 동의안을 날치기 처리한 것은 해군기지 건설의 절차적 왜곡을 드러낸 것일 뿐 아니라, 도민의 대표기관이 ‘알아서 충성한’ 치욕의 과정이기도 했다. 지난 의회의 과오를 바로잡는 것이 실추된 도의회의 명예를 회복함은 물론, 도민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깡그리 뭉개진 제주의 자존을 찾는 마지막 길이다./고희범(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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