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61) 덕수리 숭물일렛당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숭물일렛당 ⓒ장혜련

제주는 다른 지방과의 교역이 불편하여 생활필수품을 거의 자급자족해 왔다. 특히 덕수리는 가정마다 쓰이는 무쇠솥, 쟁기의 보습, 낫, 호미 등 농기구와 생활용품을 주물로 만드는 불미공예가 발달하였다. 공예 기능공들이 이 마을에 들어옴으로써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부업형태로 발전하여 생활의 기반을 이루었다.

불미작업이 생업이다보니 갖은 정성을 다해야 했고 마을 여성들의 신앙심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두가지가 도체비(도깨비) 신앙과 당 신앙이다. 덕수리 사람들은 ‘도체비’를 모시는 오래된 풍습이 있었다. 덕수리의 옛 명칭인 ‘새당’에서 유래하여 ‘새당도체비’라고 불렀다. 이는 도체비를 모셔야 불미가 잘 된다는 믿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본래 덕수리 불미는 송씨 집안의 가업이었는데 바로 이 집안에서 도체비를 조상(신)으로 모셨다. 불미마당에서 불미를 시작하기 전날 밤에 도체비에게 유교식 제사를 올렸다. 이를‘참봉제’라고 불렀다. 이것이 마을로 퍼져나가 도체비신앙이 되었다.

그런데 새마을운동 당시 미신타파가 한창이던 1968년 가문회의를 거쳐 제의는 중단되었다. 근대화 바람을 타고 도체비를 모셨던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제사를 하지 않으니‘새당도체비’는 적어도 표면적으로
는 마을에서 사라진 것이다.

한편 덕수리의 여성들은 ‘숭물일렛당’에 다닌다. 앞숭물, 족은숭물, 웃숭물 등의 인근에는 각각 당들이 위치하고 있다. ‘숭물’이란 말 자체가 당이 위치한 곳에 붙여지는 지명이라고도 하고 땅이 뾰족하여 흉한 지형을 말하기도 한다.

윤춘자(1933년생, 여)에 의하면 여성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돌래떡을 만들고 누구보다 먼저 신과 대면하기 위해 새벽녘 여명이 서린 길에 나선다고 한다. 신과 만나러 갈 때는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아는 척하거나 인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신당에 가는 고(아래아)는대구덕에는 메 3기, 올레메 1기, 생선 4마리, 돌래떡 12개, 과일 등을 담고 향과 초, 술은 물론 지전, 물색, 실 등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새를 몇가닥 뽑아 함께 준비한다. 이것은 제물을 펼치기 전에 자리를 마련할 때 밑에 깔아서 제물을 올리는 데 사용된다. 그리고 메 위에도 젓가락 대신 나뭇가지를 꺾어 메 위에 꽂는다.

“집이 제사보다 더 멩심허영”일 년에 한번 정월에 7일, 17일, 27일 중 자신이 좋은 날을 정해서 간다. 가장 좋은 날은 17일인데, 아이가 없어 고민하는 사람들은 7일에 가면 더 효험이 있다. 신은 날마다 기다리는 모습이 다르다. 7일 날은 앉아서 기다리고, 17일 날은 서서 기다리고, 27일엔 누워서 기다린다고 한다.

덕수리의 주력 사업은 불미공예다. 불을 다루는 일은 인간의 노력으로만은 안 되는 일, 그러니 신에 의지하여 가업의 번창과 식구들의 안전을 기원하던 새벽녘 당에서 기도하는 이 마을 여성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 장혜련

*찾아가는 길 - 덕수리 마을회관 → 삼거리 우회전 → 100m 작은 삼거리 좌회전 → 게이트볼장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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