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62) 동광리 큰넙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큰 넓궤 ⓒ김은희

제주4·3사건을 몸으로 절실히 느끼는 곳, 4·3유적지를 추천하라면 큰넙궤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가볍게 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전문가의 안내가 반드시 필요하다. 큰넙궤는 안덕면 동광리 마을 목장 안에 위치해 있는 굴이다.

역사를 거슬러 60여년 전 제주도에는 4·3사건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 되어 이젠 평화로운 세상,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나 보다 했는데, 한반도가 동강나고 좌니 우니, 통일이니 분단이니 하는 흑백논리들이 세상을 뒤덮자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제주도를 본보기로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

안덕면 동광리 마을은 무등이왓, 삼밧구석, 간장동, 조수궤 등의 자연마을들로 이루어졌다. 1948년 10월부터 마을 분위기가 살벌해졌고, 잡혀가서 초죽음이 되어 돌아오는 사람, 곶자왈로 피하는 사람, 해안마을로 미리 내려가는 사람들로 어느 길이 사는 길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11월 15일 군인들은 마을을 포위하고 들어와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은 다음, 마을 유지 10명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3일 후에 마을은 불태워졌다. 극심한 공포에 질려 있던 마을사람들은 해안마을로 내려가는 것을 더 무서웠다. 살 길은 산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다. 목장 안에 있는 큰넙궤가 숨을 만하다고 알려지면서 알음알음 찾아온 사람들이 굴이 발각될 때까지 ‘큰넙궤 공
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보초 서기, 식량준비하기, 물 길어 오기 등의 역할들이 각자에게 주어졌다. 그렇게 큰넙궤에서 120여 명이 50일 동안 살았다.

굴 입구는 한 사람만 기어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좁다. 입구에서 5m 정도 가면, 3~4m의 절벽이 나온다. 남성 두 명이 도와야 내려갈 수 있다. 절벽을 내려가면 넓은 공간이 나오며 방호벽과 깨진 항아리 파편들이 많이 보인다. 굴속까지 가져가지 못한 항아리들이 굴 양옆으로 줄 지어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사는 공간까지 들어가려면 포복으로 30m를 더 들어가야 한다. 임산부도 있었다는데 이곳을 지나 가기가 그리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굴은 이층으로 처음 온 사람들은 1층, 나중에 온 사람들은 2층에 자리 잡고 살았다.

다행히 이 굴에선 희생자가 없었다. 군인들에게 굴이 발각 되자 굴 안에서 이불들을 모아 고춧가루와 함께 불을 지펴 굴 밖으로 연기를 나가게 하여 군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군인들은 밖에서 총만 난사하다 어두워지자 철수했다. 굴 안에 있던 사람들의 지혜와 용기로 죽음에서 사람들을 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굴에서 나온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한라산을 헤매다가 하나둘씩 토벌대에게 잡혀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큰넙궤에선 불을 끄고 5분 동안 있기 체험을 한다. 너무 무섭다, 눈이 있어도 없는 것 같다, 사는 게 너무 처절했다, 옆에 누가 있어서 덜 무섭다,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기타 등등 참가자들은 느낌들을 말한다. 이곳을 다녀오면 몸은 힘 들어도 왠지 보람되고 뿌듯함을 느낀다. / 김은희

*찾아가는 길 - 동광리 검문소 서쪽으로 600m → 목장 안 2.5km 시멘트길 → 도너리오름 앞 서쪽 200m → 남쪽 50m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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