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점검] ① 민간 캠페인→관 주도 동원체제 '궤도이탈'
공직내부 냉소 고개...전화번호만 부각 "컨텐츠로 승부해야"

제주도가 세계7대 자연경관 선정에 '올인'하면서 예기치못한 부작용이 빚어지고 있다. 전시동원체제를 방불케하는 관(官) 주도의 운동이 실적주의 양상으로 흐르면서 자발성은 사라지고, 공직 내부에서도 냉소와 푸념이 새나오고 있다. '왜 세계7대 자연경관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설명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 도전 자체를 즐기고, 그 과정에서 제주자연이 지닌 소중한 가치를 콘텐츠로 담아내려는 노력은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세계7대 자연경관 하면 거두절미하고 어김없이 전화번호부터 등장한다. <제주의 소리>는 민간차원의 캠페인으로 출발한 운동이 점차 관 주도로 기울면서 나타나는 폐해를 짚어보고, 본래 궤도를 찾기위한 방안 등을 고민해봤다. <편집자> 

# 2011년 4월4일. 전국공무원노조 서귀포시지부가 세계7대 자연경관에 대한 토론결과를 발표했다. 조합원 28명이 참가한 토론회에선 투표방식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다. 무엇보다 관 주도의 운동이 도마에 올랐다. 한 토론자는 "관 주도로 흐르다보면 전화요금만 대략 180억원이 소요된다"며 "앞으로는 TV매체나 민간기구를 통한 활동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다른 참석자는 "관 주도로는 오래 가지 못한다. 자발적인 참여에 역점을 두지 않고 관 조직만을 동원해 세계7대 자연경관에 선정된다 한들 후손들에게 떳떳한 세계유산이라 말할 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제주도가 투표실적을 공개함으로써 공무원들이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다는 불만도 제기됐다.     

▲ 제주도가 공무원들에게 제출을 요구한 세계7대자연경관 투표 관련 개인정보 수집 서식. <제주의 소리 DB>
# 2011년 3월8~9일. 전국공무원노조 제주지역본부와 전공노 제주시.서귀포시지부가 잇따라 논평을 냈다. 공무원은 물론 그 가족에까지 개인정보 제공을 강요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넷 투표 참가자들의 메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제출하라며 전 공무원에게 문서를 보냈다고 폭로했다. 전공노는 특히 제주도가 연말 읍면동 평가항목에 지역주민의 인터넷 투표 참가 여부를 포함시켰다며, 이같은 개인 아이디와 비밀번호 수집행위를 범죄에 비유했다. 

또 헌법에 보장된 사생활의 비밀을 짓밟은 행위이자 읍면동 공직자에게 범죄행위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흥분했다.

# 2011년 2월8일. 제주시청 확대간부회의. 웬만하면 화를 안내는 김병립 시장이 이날은 작심한 듯 열을 냈다. 서귀포시보다 투표 참여가 훨씬 저조하다며 간부들을 닥달했다. 실과별로 투표실적을 점검하겠다고 으름장도 놓았다. 

◇ 공무원노조 "개인정보 강요" 발끈...전화투표 실적체크 다반사

그러면서 김 시장은 "물리적인 평가방법을 동원하기 전에 공직자들이 먼저 나서달라"고 은근히 압박했다. '물리적인 평가방법'은 사실상 점수화하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실제로 제주도와 제주시, 서귀포시에선 투표 실적 체크가 일상화된지 오래다. 지난달 24일까지 이들 세 곳에서 이뤄진 행정전화투표 건수가 312만건이라는 집계도 나왔다. 전화투표는 횟수 제한이 없다.

서귀포시청 6급 공무원 A씨는 "캠페인은 말 그대로 순수성과 자발성이 생명인데 실적을 중시하다 보니 공무원들의 손에서 전화기가 떠나질 않는다"며 "앞으로 성과관리 항목에 넣는다고 하니 울며겨자먹기로 전화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 한동안 제주도청 간부들은 다른 지방에 출장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다. 세계7대 자연경관 선정에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본연의 업무는 뒤로 미뤄졌다. 부서마다 담당 지자체나 기관을 빠짐없이 정했다. 간부들이 돌아오고 나면 어김없이 보도자료가 배포됐다. 'OO가 세계7대 자연경관 선정에 앞장서기로 했다'는 내용 일색이다.

# 요즘 도청 기자실의 하루는 세계7대 자연경관으로 시작된다. 제주도가 업무협약을 맺었거나, 어떤 단체가 세계7대 자연경관을 위해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가 기자들의 책상에 맨 먼저 오른다. 대부분 제주도의 주도로 이뤄진 것들이다. 여기서 자발성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매번 비슷한 내용이 기관, 단체 이름만 바뀌어 쏟아지자 기자들 사이에서도 식상하다는 반응이 팽배해졌다.

관 성격을 띤 기관, 단체들마다 오로지 세계7대 자연경관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으면서 나타난 달갑지 않은 자화상들이다. 점점 흥겨움은 사라지고, 일부에선 거부감이 생겨났다.

세계7대 자연경관에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는 연예인 등 유명 인사의 홍보대사 임명이나 전화투표 장면, 업무협약, 지원 결의. 대부분 '반짝 행사'에 그치다 보니 지속성을 갖기 어렵다. 무릎을 치게하는 아이디어도 없고, 열성적인 공공기관과 민간 사이의 간극은 더 벌어졌다.

▲ 제주도가 3월2일 개최한 '세계7대 자연경관 도전 범도민.읍면동추진위원회 보고회'. <제주의 소리 DB>
<제주의 소리>가 궤도를 벗어난 세계7대 자연경관 캠페인의 올바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달 30일 10명 안팎의 인사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대부분 실명 공개를 원치 않았다. 의견은 말해줄 수 있지만 이름을 밝히면 곤란하다고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너도나도 세계7대 자연경관에 올인하는 마당에 '쓴소리'를 하게 되면 자칫 초를 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부담 때문으로 보였다. 획일적인 패거리문화를 연상케하는 분위기에 짓눌려 말문까지 닫고 만 것이다. 

어렵사리 입을 연 이들의 의견을 요약하면 한마디로 전화투표를 위한 번호만 난무할 뿐 캠페인의 컨텐츠가 없다는 점이다. 도전 과정 자체가 제주의 이미지를 메이킹하고, 궁극적으로 제주라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투표!"와 "동원!"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 "'묻지마 투표' '동원'은 그만...브랜드 전략 앞세워야"

동원이 이른 시일에 투표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해 국내외 호응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IT업계에 종사하는 김 모씨는 "제주의 경관이 왜 훌륭한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브랜드 전략이 있어야 설사 세계7대 자연경관에 들지 못하더라도 잔영이 남게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고모씨는 "세계에 제주의 무엇을 알리려고 하는지 컨텐츠 소개가 없고, 제주도는 '묻지마 투표'만 부르짖고 있다"면서 "7대경관에 대해 딴소리하면 마치 제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찍히기 십상"이라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상황을 우려했다.

세계7대 자연경관 선정을 관장하는 스위스 재단 '뉴세븐원더스'의 실체와, 이벤트의 상업성을 경계하는 목소리에 대해 속시원한 대답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제주도의회 강창수 의원은 "제주도의 입장에서 세계7대 자연경관이 절실하다면 그 당위성에 대해 철학적인 접근이 필요한데도 관제 데모 하듯 시대에 뒤떨어진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며 "전화통만 붙들다가 세계7대 자연경관에 선정된들 어떤 효과가 나타날지 의문"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참여자들에게 감흥을 주고, 자발성과 창의성을 이끌어내는 이벤트의 부재를 꼬집는 의견도 있었다.

관광업계에 몸담고있는 정 모씨(45)는 "틀에 박힌 동원 행사로는 이 운동의 의미를 살릴 수 없다"며 "투표율을 높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도전 자체를 펀(Fun)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 씨는 지난달 29일 오현고 학생들이 선보인 세계7대 자연경관 바디섹션을 '펀한 사례'로 꼽았다. 

손쉬운 전화투표 위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전화투표라면 번호를 앞세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이런 지적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인터넷 투표가 돈도 안들 뿐더러 참가자들이 세계7대 자연경관 도전의 의미와 제주의 자연가치를 속속들이 알 수 있다고 여긴다.

이 운동에 관여하고 있는 B씨는 "이제는 민간에 맡기고, 관은 서포트 역할만 하자고 건의했는데도 도통 먹혀들지 않는다"고 답답해했다.

그는 "세계7대 자연경관 선정 이벤트가 상업성이 있는 건 맞지만 도전 과정에서 제주가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 비용을 훨씬 뛰어넘는 효과가 따를 것"이라며 "앞으로는 이 점에 주목해 콘텐츠로 다가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제주의소리>

<김성진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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