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양동윤 제주4.3도민연대 대표
반전가요 틀어주던 DJ에서 타협모르는 고집불통 4.3운동가로

▲ 제주 첫 음악다방 DJ에서 레스토랑 꽃사슴 사장을 거쳐 4.3운동가로 인생의 반전을 거듭한 양동윤. ⓒ제주의소리
그의 이력을 알고 나면 “어! 정말 그래? 그 사람에게 그런 스토리가 있다니…아니, 어떻게 그렇게 변신했데?”라고 반문한다. 그는 요즘 한창 인기를 끄는 ‘세시봉’세대다. 아니, 단순한 세대가 아니라, 세시봉문화를 이끈 주역이다. 관덕정과 칠성로 음악다방에서 장발머리 ‘제주1호 DJ’를 했다면 쉽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어느 날 홀연히 음악을 떠나 초야에 묻혀 살더니만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재야(在野) 인사로 변신하고,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4.3판에서는 어김없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4.3운동의 주역으로 이 땅의 애정을 확인한다. 

양동윤(61) 제주4,3도민연대 공동대표. 그의 인생은 반전의 반전이다. 흥미롭고 다채롭기까지 하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20~30대 연인들이라면 한번쯤은 밥딜런(Bob Dylan)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을 들으며 돈가스에 칼질을 해대던 제주에선 가장 잘나갔던 칠성통 레스토랑 ‘꽃사슴’ 사장이었다. 70년 대학(조선대)에 입학했지만 얼마 안 돼 대한민국을 독재국가로 만든 박정희 10월유신에 염증을 느껴 대학을 때려 치고 음악에 빠졌다. 광주 충정로에서 배운 DJ 솜씨로 그는 제주에 내려오자마자 관덕정 옛 우체국 옆에 있던 심지다방 DJ로 명성을 날린다.

# 제주 첫 음악다방 DJ, '시국멘트' 날리다 모처에 끌려가 사흘밤낮 줄창나게 얻어터지고…

여기서 훗날 운동권으로 빠지게 되는 유쾌하지 못한 경험을 한다. 당시 서울에서 도망 온  ‘시대의 구라’인 소설가 황석영이 다방에 자줄 오는데, 말주변이 없던 그가 팝송을 틀고 ‘이러니 저러니’ 구라 흉내를 내는 건 좋았지만 젊은 혈기에 DJ의 본분(?)을 망각한 채 감히(?) 시대에 대한 논평을 하고 말았다. 한번 두 번 이어지고, “심지다방 DJ가 이상한 소릴 하더라”`는 소문은 금새퍼져 어느 날 밤늦은 시간에 검은 점퍼 사나이들에게 붙잡혀 모처로 갔다. 이곳에서 ‘왜 헛소리하냐’며 삼일 동안 줄창 나게 깨져다. 다방 사장은 아예 팔이 부러질 정도로 맞았다. 이후부터 ‘입 조심’하고 돈 버는 데만 전력, 음악 레스토랑 꽃사슴 사장이 된다. DJ출신 사장이 됐으니 퍽이나 성공한 인생이었다.

잘나가던(?) 인생은 여기서 끝. “내가 뭐하나 싶었죠. 편하긴 했지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인 한경면 신창으로 내려갔고, 여기서 그는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을 한다.

제주 민주화운동, 4.3운동에서 그는 늦깎이다. 역사에 대한 죄스러움일까, 아니면 먼저 깃발을 들고 나선 후배활동가들에 대한 미안함이 있어서일까…그는 환갑을 맞은 지금도 정정하게 현장을 누비는 현역 활동가로 일한다. 뒤늦게 시작함을 후회라도 하듯, 후배들이 줄줄이 떠나는 현장을 그는 고집스럽게 지킨다.
 
“신창 집에 있는데 당시 제주시에서 이른바 학생운동 한다는 후배들이 어떻게 내 이야기를 들었는지 가끔씩 집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길 나눴고, 나도 제주시에 가서 당시 사회과학서적을 팔던 대동서점이나 각종 자료 등을 복사해주던 돌 소리를 드나들면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죠. 그리고 얼마 후 87년 6월 항쟁이 터지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제주본부(국본)’이 결성되면서 이른바 재야운동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운동주류가 20대 후반이었으니 한 10년쯤 늦은 셈입니다.”

▲ 87년 민주화운동당시 국민운동제주본부에서 제주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그는 4.3문제가 전면화되면서 4.3운동으로 인생을 또 한번 전환한다. ⓒ제주의소리
그는 재야운동을 주도하는 학생운동 출신이 아니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는 특유의 성실함과 판을 읽는 뛰어난 감으로 짧은 시간에 운동권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지금의 제주참여환경연대 전신인 제주도개발특별법반대범도민회를 결성하면서 집행위원장으로 제주개발특별법 반대운동, 외지인 토지투기 실태 등 개발의 문제를 제주사회 현안으로 집중 부각시키면서 제주NGO운동을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시민운동에 주력하던 그가 4.3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

“1989년 제주에서 재야시민단체들이 4월공준위를 결성하고 처음으로 ‘4.3추모제’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4월공준위는 추모제를 준비하기 위해 해마다 꾸리는 비상설조직이어서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책임 있게 추진할 상설투쟁체 건설 논의가 있어 왔지만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1998년 4.3 50주년을 맞습니다. ‘4.3이 일어 난지 반세기가 됐는데 4.3은 아직도 합동위령제에 머물고 있다. 4월에만 반짝하지 말고, 이젠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할 때’라는 반성이 주류를 이뤘지만 50주년기념사업인 학술기념사업회 조차 단체별 참가 결의를 이끌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한계를 노출합니다. 심각한 문제였죠.”


# 4.3 50주년 거치며 4.3상설조직 건설‥4.3특별법 쟁취 전면에 내걸고 투쟁

 
50주년 기념사업 평가회에서 투쟁조직체 건설을 결의했지만 여전히 누구도 나서지 않자 양 대표는 기념사업회 조직국장이던 오영훈 현 제주도의원에게 “딱 2년만 나하고 일하자”며 끌어들인다. 여기에 박경훈 화백, 박찬식 전 4.3연구소장, 오승국 4.3평화재단 연구원, 그리고 고창훈 제주대 교수, 김영훈 전 제주시장 등이 합류하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도민연대’. 목표는 4.3특별법 쟁취였습니다. 그런데 특별법을 만들기 위해선 서울(국회)에서 싸워야 하고, 국민들은 또 4.3을 너무 모르는 상태여서 특별법 문제를 전국화시키기 위해서 제주를 출발해 광주->서울, 부산->서울로 가는 전국순례를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4.3단체와 유족들은 물론 당시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장이던 오만식 도의원의 지원 협력하래 사상 유례없이 제주도의회, 시군의회 의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여의도에서 여야대표를 만나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당시 국민회의에게는 김대중 대통령 공약을 지키라고 압박합니다. “

연내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감돌던 이 때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제주4.3에 대한 명예회복을 대선 공약으로 내건 김대중 정부의 국민회의는 엉뚱하게 4.3특별법제정이 아닌, 4.3특위를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반면 너무나 고맙게도 한나라당 제주도당위원장인 변정일 국회의원이 4.3특별법 시안을 내 놓았다.

“1999년 9월 정기국회가 시작되자 전반적으로 ‘이대로 그냥 둬선 안된다’는 위기감이 감돌았습니다. 특별법 제정을 바라는 제주도민 2천여명 서명을 받아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4.3연대회의)를 결성하고 국회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엉뚱하게 돌아가는 겁니다. 국민회의 제주도당은 특별법제정에 아예 손을 놓고 있고, 중앙당은 당내에 4.3특위(위원장 김진배, 부위원장 추미애)를 만들었지만 박상천 원내총무가 특별법 제정이 아닌 국회내 4.3특위로 가자는 발언을 하고 다녔습니다. 내심 기대했던 국민회의가 이러니 날벼락이었죠. 반면 ‘정말 저들이 할까’하는 작은 의구심을 가졌던 한나라당에선 변정일 제주도당위원장이 직접 4.3특별법 시안을 만들고 시민단체와 두 차례나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4.3특별법 하면 많은 이들이 추미애 의원을 떠 올리지만 양 대표는 그에 못지않게 한나라당 변정일 양정규 의원, 그리고 이부영 원내총무의 공을 꼽는다.
“박상천 원내총무의 4.3특위 발언으로 김진배 위원장이 사퇴하는 등 국민회의가 분란을 겪다 김대중 대통령의 지원으로 추미애 의원이 특위원장을 맡으면서 탄력이 붙죠. 추 의원 주도로 국민회의에서 4.3특별법을 발의되고, 법사위 심의나 본회의에서 대표발의자로 추 의원이 전면에 나서면서 ‘4.3 의원’이라고 고마워 하지만, 사실 가장 고마워해야 할 정치인은 현재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는 변정일 의원입니다. 국민회의조차 나 몰라라 할 때 9월부터 직접 특별법 시안을 만들어 시민단체 의견을 수렴하고, 한나라당내에서 대표발의까지 했습니다. 4.3과 관련해서 한나라당이 딴죽을 거는 통에 욕먹는 건 사실이지만 그 공을 간과해선 안 될 겁니다. 양정규 의원도 막판에 도움을 줬죠.  국회법사위 심의를 할 때 특별법을 벼르는 의원이 국민회의 조순형 의원이었습니다. (조 의원의 부친인 조병옥 당시 경무부장은 4.3초기 사건을 강경 진압해 피의 4.3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다) 이 때 법사위원도 아닌 양 의원이 회의장에 들어가 조 의원 옆에 앉아 뭐라고 하더니, 조의원이 법안 심사도 않고 회의장을 퇴장해 버리는 거예요. 그 때에 한숨이 놓이더군요. 또 한 분, 한나라당은 대체적으로 4.3특별법 제정에 부정적 기류였어요. 그런데 이부영 원내총무가 고맙게도 총대를 매줬죠.”

그리고 12월16일 국회 본회의에서 제주4,3특별법은 마침내 통과된다. 4.3이 발발한지 51년만이었다. 제주 전역은 흥분에 휩싸였고 시민단체와 4.3인사들은 감격을 눈물을 흘렸다. 당시 언론에 나온 사진에 양 대표 얼굴은 없었다. 그는 4.3도민연대 한편에서 조용히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 "제도권사업과 운동은 건강한 긴장 유지해야"..점차 희미해지는 4.3정신에 아쉬움

▲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 그리고 특별법 쟁취 싸움 곳곳에는 그의 흔적이 있다. 고집불통이라고 불릴만큼 원칙에서는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 그의 의지는 60 넘은 그를 4.3활동가로 부를 수 있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주의소리

4.3특별법 제정 이후 4.3이 국가공권력에 의한 억울한 죽음으로 정의되는 4.3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고 이를 근거로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과 4.3희생자들에 대한 사과, 그리고 희생자 선정 등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제도권 내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그리고 다시 특별법이` 제정된 지 12년이 흘렀다. 양 대표는 12년의 세월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공이 많죠. 이뤄낸 성과물도 많지요. 하지만 보완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시각에서 본다면 법률에 의한 제도화란 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떠나서라도 4.3 정신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  특볍법에 의해 정부지원이 시작되면서 거기에 매몰돼 버리는 게 가슴이 아픕니다. 4.3사업이 국비로 진행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지만 80년 후반 이후 4.3운동에 헌신해 온 많을 활동가들이 국비사업에 참여하다보니 운동의 관점, 4.3정신은 저를 포함해서 희미해지는 건 아닌지, 우리의 솔직한 현주소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제도권 사업과 운동으로서의 4.3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고, 때론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한발 너 나아가 ‘4.3권력’이란 표현도 힘들게 꺼냈다. 
“서글픈 이야기지만 세간에선 4.3이 권력화 됐단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초심’을 이야기하는데, 세간의 비판에 귀 기울이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 정도가 아주 적더라도 기득권화 되고 권력화 됐다면 버려야 합니다. 억울하고 동의하지 못할 분도 있을 거지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내놓을 자세가 돼 있어야 합니다.”

4.3권력이란 표현은 현실이지만 곤혹스런 부분이다 이왕 말 나온 김에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4.3도민연대 공동대표이자, 4.3실무위원과 평화재단이사를 맡은 양동윤 당신 스스로가 권력이 된 건 아닌지. 평소 골초인 그는 이 대목에서 담배 연기를 더욱 깊게 빨아들이고 내 뱉는다.
“1999년 도민연대가 만들어진 이후 저의 위치는 달라진 게 없습니다. 있다면 4.3실무위원과 재단이사로 참여하는 것인데…그게 권력이라면 권력이죠. 그래서 항상 4.3운동, 활동가 위치를 지키고자 하지만, 그래도 그걸 권력으로 본다면 욕먹을 건 욕먹어야 합니다.”

그는 4.3 역사의 중앙에 서 있으면서도 항상 비주류에 속한다. 4.3정신과 방향을 놓고 주류와 자주 시각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4.3진상규명운동에서 양 대표의 공을 꼽으라면 수행인과 육지교도소로 끌려갔다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전혀 모를, 행방불명된 행불인 문제를 진상규명 과제로 끌어올린 점이 높게 평가된다.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나 진상조사보고서가 4.3진상규명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지만 2%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바로 수형인-행불인 문제일 겁니다. 4.3당시 불법계엄령 하에서 군사재판 또는 일반재판을 받아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그 대부분이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다가 행방불명된 행방불명 수형인이 3000명에 이릅니다. 이들에 대한 진상규명이 뒤따라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끌려갔고, 또 어디에서 어떻게 죽임을 당해 어느 곳에 파묻혔는지를 , 이건 산자의 책무입니다.”

# 좌우 모두 떠나 국수 한그릇 나눠 먹을 수 있는 대동한마당이 '꿈' 

▲ 양동윤 대표는 요즘 4.3이 권력화 됐다는 비판에 고개를 들을 수 없다. 거기에는 물론 자신도 있다. 그는 아주 적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레 권력이라면 다들 내려놓자고 말한다.

그는 1999년 추미애 의원이 정부기록보전소를 뒤져 세상에 공개한 4.3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와 재판과련 피고인 명단 등을 제주4.3연구소 박찬식 박사 도움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하고, 마을별 수소문하며 유족들을 찾아낸다. 제주4.3도민연대가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전국 형무소를 순례하는 사업을 벌인 것도 수형인-행불인 문제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또 나중에는 4.3유족회랑 통합되긴 했지만 4.3행불인유족회도 만들 수 있었다. 

양 대표는 “죽은자를 기리는 건 당연하지만, 살아있는 자에 대한 배려도 있어야 합니다. 불법계엄령에 의해 억울한 옥살이를 한 분들에 대한 뭔가 있어야 합니다.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분들이 대부분 한국전쟁 직후 학살됐고, 그나마 목숨건진 분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에 대한 진상조사 등은 아직 아쉬운 실정입니다.”

그는 4월이 되면 청소년들과 항상 산다. 4.3사업 일환으로 웅변대회를 한다. 4.3 정신을 계승하자고 하는데 누구에게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바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아닌가에 주목하고, 올해로 8년째 4.3웅변대회를 연다. 어린이 웅변대회긴 하지만 그 준비과정을 통해 학부모와 교사들이 4.3에 관심을 갖고 배우는 계기로 연결된다.

4.3 하나만 갖고 고민하는 그가 바라는 제주를 물었다.
“먼저 고민은 아직도 4.3은 현재 진행형이고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데, 이 판에 일할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어차피 운동은 지속되긴 하지만 진정성 있게 운동을 풀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는 게 두렵기만 합니다. 내가 바라는 제주는 4.3을 갖고 이야기 한다면 이번 4.3 63주년 위령제도 언론보도에 의하면 1만여명이 모였다고 하는데 위령제가 대동한마당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각 읍면동별로 천막에서 따로따로 보내는 게 아니라 광장에서 모두가 모여들어 국수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그런 과정을 통해 화합하고 상상하는 그런 제주가 됐으면 하는 게 바람이라면 바람입니다.”

양동윤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그를 고집불통이라고 한다. 비타협적이고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한다고도 한다. 이 말을 평생 들어온 그는 오죽 괴로울까. 이제 조금 양보하고 한발 뒤로 물러서면 안될까?
“고집불통 인정합니다. 토론장에서 끝까지 주장하고, 회의하다가 나간 적도 많습니다만, 운동을 포기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변에서 농담으로 ‘막차도 잡지 못해 낙오됐다’는 말을 합니다. 멍청해서 미련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떠나질 못했습니다. 이 나이(61세)에 아직도 저는 (4.3운동의) 현역입니다. 예비역 좀 하고 싶은데 전역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누군가 해야 할 길이라면 좀 전역이 늦으면 어떻습니까. 어쩌면 예비역보다는 현역이 나은 게 아닙니까?”

그는 제주4.3도민연대 공동대표이자 운영위원장을 맞고 있는 그는 오늘도 한림집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오전9시에 사무실(제주시 시민회관 인근)에 나오고, 오후6시가 되면 다시 퇴근한다. 월급은 없지만 4.3판은 그가 숨쉬는 일터다.  <제주의소리>

<이재홍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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