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의 도백열전(15)]제6대 제주도지사 최승만②

부임후 모든 일정을 업무 파악에 매달리고 있는 최 지사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순시계획이 전해진 것은 그해 8월15일이었다. 부임한지 불과 열흘 만이었다. 최 지사는 업무파악이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최고통수권자의 순시가 무척 부담스러웠으나 지사 임명 때에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던 이 대통령의 말을 상기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최 지사는 이 대통령의 제주순시에 대한 목적이 피난민 수용과 전쟁고아들의 생활을 둘러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황온순 한국보육원장을 불러 대통령 영접계획을 세워 나갔다. 도민환영대회가 열릴 관덕정에는 광목으로 임시 식장을 마련했다.

이 대통령은 8월17일 UN군 총사령관 밴플리트 장군과 함께 내도했다.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이 대통령은 곧바로 도민환영대회에 참석하고 광장을 가득 메운 제주도민들에게 "이제 전쟁은 용감무쌍한 우리 국군에 의해 계속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고 있으므로 제주도민들은 각자의 생업에 열중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승만, "제주도민은 생업에 열중해 달라

이어 등단한 밴플리트 장군은 "UN군은 한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전쟁을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환영대회에 참석한 뒤에 한국보육원을 방문하고 황 원장으로부터 현황을 보고 받고 고아원 운영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최대한 지원하겠다는 약속하고 모슬포에 있는 육군훈련소를 시찰한 뒤 귀경했다.

최 지사는 이 대통령이 이도하고 난 다음날 이북(平北)출신인 홍순원(洪淳元) 총무국장 대신에 구좌면 세화리 출신의 전인홍(全仁洪· 후에 초대 제주도의회 의장과 제8대 제주도지사 역임) 서무과장을 전격 승진 발령했다.

홍 前국장은 4.3사건과 피해복구사업 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한때는 지사를 능가하는 권력으로 공무원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등 뒷말이 무성했다. 최 지사는 이러한 여론을 수렴하여 서정쇄신 차원에서 홍 국장을 해임했다.

그러나 신임 전인홍 총무국장은 다음해 5월에 예정된 제주도의회 의원선거 출마로 2개월만에 그만두는 바람에 외자관리청(外資管理廳)에 길성운(吉聖運· 平北출신· 후에 최승만 지사에 이어 제7대 제주도지사를 역임)을 후임 총무국장에 전격 발탁했다. 길 국장은 최 지사와 일본 유학시절의 선후배 사이였다.

최 지사는 그 동안 미뤘던 郡·邑·面에 대한 초도순시에 나섰다. 일선 순시는 새벽부터 시작해야 겨우 하루에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최 지사는 순시에 앞서 "도지사를 영접하기 위해 郡이나 面의 직원들이 업무를 중단하고 길거리에 나와 도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초도순시 직원영접·풍성한 오찬에 "누가 이랬냐" 호통

평소 성격이 강직할 뿐만 아니라 소탈한 것을 좋아했던 최 지사는 "도지사가 아무 때라도 가고 싶을 때에 가면 되는 것이고, 직원들이야 사무실에서 만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 지사의 지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는 도지사를 대통령과 똑같이 '각하'로 호칭할 만큼 절대적인 존재였다.

최 지사는 어디를 가나 읍·면 직원들이 한결같이 모두 길가에 나와 지사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 최 지사는 자신을 영접하기 위해 나와 있는 직원들이 고맙기보다는 화급한 피난민 구호업무 등을 팽개치고 시간을 허비하는 행정 행태가 몹시 못마땅했다.

애월과 한림을 지난 모슬포에 이르러 점심때가 되자 최 지사는 면장과 경찰서장을 불러 "점심은 된장국이나 설렁탕 정도면 충분하니 그 이상 다른 것을 준비시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이 지시도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실정으로서는 좀체 구경하기 힘든 굉장한 점심 식사가 마련돼 있던 것이었다.

최 지사는 불쾌한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다. 최 지사는 오래 전부터 실시돼온 관례로 돌리고 그냥 넘겨버리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최 지사는 점심이란 요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도 이렇게 많은 음식을 어떻게 다 먹으며, 음식값은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생각하니 식욕이 영 나지 않았다. 이것이 나라의 돈으로 썼다면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 것이며, 개인의 돈으로 썼다면 얼마나 민폐가 심했을까를 생각하니 속이 상했다.

초도 순시를 마친 최 지사는 전인홍 총무국장을 불러 "내가 그렇게 읍면 직원들을 길거리에 나와 영접하지 말라고 했으며 식사도 별도로 준비하지 말라고 지시했는데도 지켜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호통을 쳤다. 최 지사의 힐책에 크게 당황한 전인홍 국장은 "그래도 지사의 초도순시인데 소홀히 대접할 수 없어서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최 지사는 "도지사를 대접한다는 의미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면서 "앞으로는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도시락 직접 챙기고 다닌 '벤도 지사'

최 지사는 이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순시 때마다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이 때문에 한동안 최 지사에게는 '벤또(도시락의 일본어) 지사'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러면서도 최 지사는 도시락을 준비하라고 시키면서, 반찬을 이것저것 만들려면 신경이 쓰이니 간단히 먹을 수 있는 토스트를 준비하도록 했다. 최 지사가 일선 순시중의 점심을 토스트로 하라고 한 것은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냄새도 나지 않아 먹기가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최 지사는 수행비서와 운전기사 등 세 사람의 도시락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다가 점심때가 되면 순시 지역에 이르기 전에 조용한 숲 속에 들어가 식사를 하곤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휴지를 모아 소각한 뒤 재를 땅 속에 묻는 세심한 주의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럭저럭 초도순시를 모두 마친 최 지사가 점심식사를 위해 도지사 관사에 들렀을 때 어떤 여자가 쌀 한 가마니를 가지고 최 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자는 최 지사를 보자 정중히 인사를 하며 "저는 사모님과 잘 아는 사이인데 변변치 않은 것이지만 받아주시면 고맙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최 지사는 6.25 때에 부인과 세 딸이 납북됐기 때문에 이 여자가 무슨 청탁을 하려고 뇌물을 가져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집사람과 잘 아시는지는 들은 바가 없으며, 설사 잘 안다하더라도 국가에서 주는 봉급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으니 이 쌀은 가지고 가시라"고 돌려보냈다. 후에 그 여자의 오빠가 제주읍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최 지사는 덮어두기로 했다.

한편 최 지사는 도정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인구통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인구조사사업'을 부임 후 첫 사업으로 삼았다.
최 지사가 인구조사를 첫 사업으로 결정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가 사회부 제주분실장으로 있을 때 미국 CIC 대표와 도청 사회과·산업과·총무과의 3과장과 함께 제주도부흥문제를 협의하던 중에 미국 CIC 대표가 제주도의 인구가 얼마냐고 물었는데 도청의 3과장이 모두 다르게 대답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정확한 인구조사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도청 첫 업무로 인구조사사업 실시

당시 최 지사는 그 일이 너무 부끄러워 통역관으로 참석했던 김태진(金泰晉)에게 이 얘기는 통역하지 말라고 말한 뒤 휴식 시간에 "어떻게 제주도의 인구숫자도 모르고 있냐"면서 제주도청의 과장들을 나무란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도청 과장들은 "인구 유동이 많은데다 인구를 조사하는 데에만 한달 이상 걸리기 때문에 정확한 인구를 알아내기 힘들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때 제주도에는 피난민의 유입숫자가 많아 정확한 인구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최 지사는 전인홍 총무국장에게 15일 이내로 인구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최 지사는 모든 공무원이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2주일이면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실시한 제주도내 인구조사결과 1951년 9월15일 현재로 5만4041세대에 26만6419명으로 나타났다. 여자가 5만여명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최 지사는 옛날부터 제주도에 여자가 많은 이유가 궁금하여 국민회제주도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우상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제주의 산세(山勢), 즉 한라산의 모양이 모두 여자의 국부처럼 생겨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해 10월15일자로 전인홍 총무국장이 도의회 의원 출마를 위해 사퇴의사를 표명함으로써 후임에 길성운을 기용했다. 길 국장은 그때부터 최 지사를 그림자처럼 보좌하여 제2인자의 자리를 굳혀 최 지사의 후임 지사로 발탁되기도 했다.

그 무렵 제주도에는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설립의 기운이 태동하고 있었다. 전쟁피난민이 홍수처럼 밀려들던 1951년 2월 문교부는 피난지 부산에서 '전시(戰時)하 교육특별조치요강'을 제정, 발표하고 부산과 제주도에 대학을 임시 운영한다고 밝혔다.

한국대학 서울이전으로 도민들 대학설립 필요성 절실

이에 따라 제주도에는 피난 온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한 한국대학(국제대학의 전신)의 제주분교가 설치되고 법학과와 영문학과가 개설됐다. 대상은 피난민과 제주출신의 대학지망생들이었으며 야간수업으로 실시했다. 교수는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역사학자 조의설(趙義卨), 한글학자 장지영(張志暎), 최근학, 시인 박목월, 방치화 등이 참여했다.

그해 8월 수도 서울이 복구되면서 한국대학은 서울로 이전했다. 한국대학이 갑자기 이전해버리자 지방 유지들은 대학설립의 필요성을 다시 절감하고 9월부터 본격적인 설립추진에 나섰다. 지방 유지들은 대학설립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시설과 운영에 따른 자산을 출연할 수 있는 재단이 설립돼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첫째, 제주향교가 주체가 되어 대학을 설립한다는 방안 둘째, 삼성시조(三姓始祖)재단에서 설립하는 방안 셋째, 두 재단이 합동으로 설립하는 방안 등이 검토됐다.

그러나 사립재단은 재정 형편상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는 대학설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도립으로 설립하는 방안으로 모아졌다. 대학설립추진인사들은 우선 최승만 지사를 방문하고 이 문제를 설명하고 제주도청과 최 지사의 협조를 부탁했다.

최 지사는 지방 유지들과 함께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기로 하고 최 지사를 이사장으로 하는 가칭 '도립제주대학설립후원회'를 결성키로 하는 한편 자산 출연은 향교재단과 삼성재단에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향교재단·삼성재단 재원 출연으로 제주대학원 설립

이에 따라 1951년 10월5일 제주향교재단은 최승만 지사로부터 대학설립에 필요한 자산출연에 대한 지원요청을 받고 긴급이사회를 소집하고 "도립제주대학후원회에 농지개혁으로 취득한 지가(地價)증권의 보상금 전액을 기부하고 그 보상금으로 기업체를 경영하여 수익금중 100분의 50을 대학의 유치를 위해 납부한다"고 결의했다.
이어 삼성재단도 10월10일 임시총회를 열고 "재단 재산인 토지에 대해 문교부가 발급하는 지가증권의 보상금 전액을 도립제주대학후원회에 기부한다"고 의결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한 달 뒤인 1951년 11월 문교부의 정식인가를 받지는 않았으나 제주도의 인가만으로 제주대학원(濟州大學園)이 설립될 수 있었다. 학교 건물은 제주시 용담동 제주향교의 명륜당을 빌어 개설했다.

제주대학원(濟州大學園)의 설립은 비록 정식 대학은 아니지만 도민들에게 제주지역에도 최고학부인 대학을 설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으며 제주대학 설립의 기초가 됐다. 제주대학원은 이듬해인 1952년 5월27일 제주초급대학이 설립되면서 1953년 3월31일 폐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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