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강남규 전 사월공준위 공동대표
제주 민생·노동운동 시효...합동위령제 성사·4.3국제화 발판

▲ 강남규 ⓒ제주의소리
1978년 김민기 노래굿 <공장의 불빛>1970~80년대 암울했던 독재정권 시절 문학에 김지하의 <오적>이 있었다면 음악엔 <공장의 불빛>이 있었다.그 중 가장 격동적인 노래 <야근>.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시퍼런 절단기에 뚝뚝 잘려서~ 한개에 5만원씩 20만원을~ 술 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터리래~.” 70년대 대표적 노동운동 사건인 동일방직을 전면적으로 다룬 노래극이다.
 
마치 이 노래의 주인공처럼, 70년대 후반 인천에서 공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프레스에 손가락 4개를 잘린 그는 이후 제주에 내려와 지역생존권운동,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4.3운동에 전념하며 제주민주화운동사에 결코 적지 않은 족적을 남긴다. 강남규(57) 제주문화관광개발원장. 스스로를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극 전체 완성과 주인공을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조연을 보는 것처럼, 그는 80년대 이후 제주민주화운동의 길목을 조용히 지켜왔다.

강남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기록자’다. 그는 제주에서 펼쳐지는 역사 하나 하나를 순간마다 놓치지 않고 자신의 파일이 빼곡히 적는다. 그는 ‘기록보존소’다. 제주 개발, 민중생종권, 민주화, 4.3역사와 관련해선 없는 게 없다. 이 분야 자료에 관한한 학계나 연구소, 시민단체 그 누구도 그를 따를 이 없다. 그는 복사기다. 자료가 귀했던 시절 복사기로 자료를 재생산하고 퍼뜨리는 것뿐만 아니라, 제주에서는 볼 수 없는 자료도 그에게 사정하면 어디에선가 나온다. 70~80년대 군사독재정권시절 그렇게 운동을 하고도 그의 자료가 경찰에 의해 털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자료 정리와 보관에 관한 한 귀신이다.    

1979년.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읽혔던 잡지 <뿌리깊은나무>에 외지인들이 집어 삼킨 ‘제주 땅 투기’ 문제가 적나라하게 실려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가진 자들의 땅투기를 거론하는 자체가 금기시 됐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관광지 남국의 섬 제주가 외지인들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단 사실을 전혀 몰랐던 우리사회에 큰 파장을 던졌다. 이 기사는 ‘기생관광’ 문제 취재를 위해 제주에 왔던 김현장 기자에게 강남규씨가 외지인들에 의한 제주토지 잠식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린 게 계기가 됐다. 김현장 기자는 이후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배후로 드러났다. 강남규는 84년 그동안 조사해 온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시사무크지 <현장> 3집에 제주토지투기 실태를 쓴다. 필자는 그의 이름으로 나갔지만 실제는 당시 대학원생 후배 고은택 고훈석과 공동집필 했다.  

▲ 강남규 ⓒ제주의소리
80년대 제주 학생운동은 지역문제부터 출발했다. 개발과 토지문제가 그 중심이었으니 운동권 치고 강남규 집에 가보지 않거나, 자료 도움을 받지 않은 대학생이 없을 정도로 지역문제에 관한한 독보적이었다. 재경 운동권 대학생들도 방학만 되면 그로부터 제주문제를 들어야 했다.

그가 지역문제, 민주화운동, 4.3운동에 깊숙이 빠지게 된 배경은 뭘까?
“1976년 제주YMCA 여름캠프에서 제주출신 이종헌 목사를 만났는데, 아니 이 분이 술 마시고 담배도 피우는 거예요. 그 분이 나중에 한번 산에 가자고 해서 2박3일 Y청년들이 함께 어리목엘 갔는데 전태일 박동선과 같은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죠. 이후 같이 성서공부도 하고, 사회과학공부를 하면서 세상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이 제주 젊은이들을 잡아 놓고 성서공부를 빙자해 제주 최초의 의식화 교육을 시키신 거죠.(웃음) 그 분의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민중신학과 본회퍼 칼 바르트와 같은 신학자의 삶을  배우면서 ‘세상 탓만 하면 뭐하냐’는 생각에 당시 다니던 전문대를 때려치우고 서울에 올라가 직원 7~8명 남짓한 영등포 마쯔꼬바(영세한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77년말  이종헌 목사의 소개로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김세균(현 서울대 교수) 신인령(전 이화여대 총장)을 만나고,  한국노동운동의 대모이자 여성신학자인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조화순 목사를 만나 인천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그리고 월급날인 8월30일 프레스에 오른 손가락 4개가 잘리고 병원에 입원한다. 그는 4.3을 병원 병실에서 처음 접한다.

“손가락이 잘려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그 때 현기영 선생의 작품 ‘순이삼촌’을 읽었습니다. 어릴적 부모님으로부터 들어 막연하게나마 느꼈던 4.3을 문학작품을 통해 처음 접했고, 제주출신 작가 중에 이런 분이 계셨는지를 알았습니다.”

잘린 손가락 상처가 채 아물기 전 그는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동일방직 ‘똥물사건’ 연극에 연루되면서 경찰에 쫓기게 되는데 이 와중에 현기영 강창일 김명식을 만난다. 그해 겨울 이종헌 목사 댁에서 현기영 등 세분 선배들과 함께 4.3제를 올리면서 30년전 이 땅에서 일어나 가장 참혹한 현대사 비극인 제주4.3 운동의 길로 빠지게 된다.   

수배를 당해 인천에서 더 이상 노동운동을 하기 어렵게 된 그는 79년 고향에 오고, 이때부터 ‘제주 문제’에 천착하게 된다. 4.3은 물론이고, 외지인 토지잠식, 중문관광단지를 필두로 한 개발문제 등 제주에서 벌어지는 사안들에 대해 자료를 스크랩하고, 현장 조사를 다니면서 때론  ‘이상한 놈’으로 찍혀 경찰에 수차례 신고를 당할 정도로 제주 곳곳을 누빈다.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강남규 하면 기억되는 게 두 가지. ‘노동상담소’와 ‘돌소리’다.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경험한 그는 1989년 제주에 첫 노동상담소 문을 연다.  당시엔 노동운동이라 해 봐야 한국노총 밖에 없던 때였다. 노동상담소는 주로 노동조합을 어떻게 결성해야 하는지, 노동관계법은 어떤지, 그리고 어용노조를 어떻게 민주화시켜 나갈지 등을 중심으로 교육을 해 나갔다. 교육횟수가 1년에 150~200회에 이를 정도였으니 강남규의 노동삼담소를 ‘제주노동운동의 효시’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돌소리’는 노동상담소를 운영하면서 재정이 어려워 호구지책으로 문을 연 복사점이다. 그런데 이곳은 그냥 복사가게가 아니었다. ‘돌소리’가 “만일 너희들이 잠잠하면 면 돌들이 소리를 치리라’란 성경구절에서 나온 것에서 알 수 있듯 돌소리는 당시 암울했던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민주화운동의 또 다른 근거지였다. 일반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금서나 일본서적,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 등을 알리는 유인물과 팸플릿 등을 육지에서 들여와 복사해 제주운동권에 배포하는 역할을 했다.

▲ 강남규 ⓒ제주의소리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면서 후배들이 하던 4.3운동을 뒤에서 도와주던 그는 1995년 47주년 합동위령제부터 4.3전면에 나선다. 이전 만해도 4.3위령제는  재야단체가 중심이 돼 관덕정에서 올리는 4월추모제와 신산공원에서 반공유족회가 올리는 위령제로 나눠져 있었다. 1994년 46주년 행사부터 제주도의회의 적극적인 중재로 제주시 탑동광장에서 합동위령제로 올리기 시작했다. 4.3발발 46년만에 좌와 우에 희생당한 유족들이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를 올린 화해와 상생의 시발점이었다. 이 때 양측은  민중항쟁이나 공산폭동이란 표현을  서로 쓰지 않기로 사전 합의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재야단체 중심의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4월공준위)에는 제주대학총학생회 등 제주지역대학총학조직은 참여하지 않았다. 투쟁구호가 합동위령제를 추진해야 하는 공준위와 시각차가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제총협(제주지역총학생회협의회)이 46주년 합동위령제가 열리는 탑동광장에 만장을 들고 입장했고, 유족회쪽에서 고의적으로 행사를 방해한다며 시비를 걸고 나섰다. 여기에다 위령제단에 올려진 위패중에 무장대 대장격인 이덕구 이름이 오른게 말썽을 빚으며 갈등의 골은 더 벌어졌다. 나중에 이덕구 위패는 유족회에서 쓴 것으로 확인되면서 진정됐으나 이 때 패인골이 좁혀지지 않아 95년 47주년 합동위령제는 무산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 때 재야단체에서 단독 위령제를 주장하는 4.3유족회 카운터 파트너로 나선 이가 4월제공동준비위원회 공동대표 강남규다. 강 대표 강점은 협상의 귀재다. 언제 나갈 때와 물러설 때를 정확히 안다. 그렇다고 반드시 협상만 연연하지도 않는다. “할 테면 맘대로 해 보라”고  상대방에 호통 치는 두둑한 배짱도 있다. 무엇보다 판을 잘 읽기 때문이다.

제민일보 4.3 전문기자로서 현장을 지켰던 김종민 4.3위원회 전문위원 이야기다. “4.3유족회에선 재야단체와 합동위령제를 하지 않겠다면서 제주도에다 단독으로 위령제를 봉행 할 테니 예산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와 제주도의회는 힘겹게 성사시킨 합동위령제를 쪼갠다면 예산을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버텼죠. 그 때 유족회 기세는 아주 등등했는데 강 대표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습니다. 유족회 혼자 절대 할 수 없는 상황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었죠.”

“합동위령제를 성사시키면서 양쪽 갈등은 물론이지만 각자 내부 반발도 적지 않았습니다. 공준위 내부에서도 당시 민중항쟁이란 표현을 안 쓰면 ‘이상한 눈’으로 봤던 시기였는데, 4.3정신을 제대로 살리지도 못하는 합동위령제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이 있었고, 유족회도 당시 김병언 회장이었는데 경우회나 어르신들로부터 많은 욕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해들었습니다. 하지만 양쪽 모두 품고 가야지 4.3을 자꾸 대립적 시각으로만 보면, 위령제 하나 같이 못하고 맨날 따로 하면 중앙정부에서 이 문제를 다뤄야 하는데 진상규명이나 특별법 제정은 언제하냐며 서로를 달랬습니다. “ 강남규 이야기다.

이 합동위령제는 나중에 보수우익단체들이 4.3특별법과 진상조사보고서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을 당시 그들의 주장을 기각하는 소중한 자산이 된다.  모두 여섯 차레 소송에서 변호인단은  “육지에선 좌우단체끼리 이데올로기 분란이 있을지 모르지만, 제주도민들은 토벌대에 희생당했건 무장대에 죽임을 당했건 이미 1994년부터 화해와 상생으로 합동위령제를 올리는데 서울.육지의 분열된 시각으로 제주도민들을 보고 소송을 하면 제주는 또 다시 심각한 분란에 빠지고, 그 역사적 책임은 누가 질거냐”는게 주된 주장이었다. 강남규는 1995년 47주년 합동위령제부터 50주년까지 4년동안 사월공준위 공동대표를 맡으며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합동위령제 초석을 다졌다.

이 당시만 해도 재야시민단체의 4.3행사는 위령제와 문화행사가 전부였다. 4.3의 전국화 세계화를 이야기 했지만 그 역시 슬로건에 그쳤다. 1998년 50주년을 맞아 그해 8월 제주그랜드호텔에서 열린 ‘동아시아 인권 국제학술대회’는 이 한계를 극복하고 4.3을 학술적으로 조명하고, 전국화 세계화로 나가는 첫걸음을 내딛는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대만 일본 한국 등에서 참가해 4박5일 진행된 이 대회는 제주4.3, 광주 5.18, 오끼나와 미군기지반환, 그리고 대만의 2.28사건과 백색테러를 다뤘고, 참여인사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동티모르 라모스 오르타를 비롯한 한일대만 등 동아시나 평화인권 학자와 전문가 등이 참여했다. 이 대회는 강창일 국회의원(당시 배제대 교수)과 강남규 대표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 강남규 ⓒ제주의소리
“1997년 대만에 이어 한국에서 열릴 예정인 98년 대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한국 사무국 을 맡아야 하는데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강창일 의원(당시 배제대 교수)이 제주4.3연구소에서 맡겠다고 덜컥 나섰죠. 일본 도쿄 오키나와 사무국, 대만 사무국, 한국사무국 등 4개 사무국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1년반동안 준비한 끝에 열렸습니다. 대단한건 국내 국회참가자 전부 자부담이었고, 4박5일 대회 참가율이 95%를 넘었습니다. 국내외 언론 관심도 대단했고, 역사와비평사에서는 발표자료를 ‘평화와 인권’이라는 단행본으로 발간했습니다. “

이 대회를 계기로 4.3특별법 제정운동이 본격 점화되기 시작한다. 국제학술대회를 끝으로 강남규는  휴식기에 들어간다.

(주)제주문화관광개발원 원장인 그는 현재 제주도로부터 예비적 사회시업에 선정돼 사회적기업 준비에 여념 없다. 1997년 새날여행사를 시작하면서 기록으로 증명할 순 없지만 시기적으로만 봐도 우리나라에서 최초 생태관광.다크투어리즘을 연 장본인이다. 요즘이야 일반화되고 있지만 당시엔 “이게 뭔 소리야!” 할 정도였다. 망할 것도 없었지만 그 때 빈털털이 되고, 이제 60을 보는 나이에 다시 두 번 째 도전에 나서고 있다.

“제주에서 문화관광운동을 하고 싶단 욕심이 있었습니다. 자연을 훼손하는 건물.시설위주의 관광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결코 오래가질 못합니다. 지속가능한 개발이 아니죠. 제주가 갖는 문화원형 역사 생태 등을 소재로 한 문화관광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남들보다 3년 정도만 앞섰으면 되는데, 무려 10년이상 앞섰으니 될 게 없죠...1997년부터 생태관광 다크투어리즘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다 들 ‘미친놈’이라고 했죠. 학문적으로도 별로 없었고, 고작해야 환경단체에서 활동가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생태기행.현장학습이 전부였던 때였으니까요. 직원들을 6개월동안 훈련 시켰는데 그들 눈에도 비전이 없어 보였던지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왕 관광업에 뛰어들었으니 더 늦기 전에 소위 말하는 ‘대안관광’으로서 뭔가 초석이라도 다져 놓고 싶은, 지금까지는 생태관광.다크투어리즘이 비전을 갖지 못했는데 앞으로는 그렇지 않다, 돈이 되는 사례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여전히 있습니다.”

제주생태와 역사를 중심에 놓고 문화관광사업을 하는 그의 눈에 오늘의 4.3은 어떻게 비쳐질까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이 쏟아졌다.
“몇 년 전부터 4.3 ‘정명’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4.3유적지를 가보면 누가 이들을 죽였는지, 왜 죽어가야 했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어 기행 갈 때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유족지복원사업도 원형을 너무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어 차라리 그냥 놔뒀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섯알오름 학살터나 낙산동 터를 보면 당시 감흥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낙선동 초가집을 보세요. ’60년전 저런 집에 살았으면 굉장히 잘 살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4.3을 박제화하고 왜곡시키고 있는 거죠 또 하나는 위령비입니다.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분명한 건 국가공권력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백조일손이나 북촌위령비처럼 위령비 건립에 관의 지원을 받았다 해서 태극기와 무궁화문양을 넣는 것은 정말 뭔가 어색합니다. 마을사람들이 세운 위령비는 소박하고 정감이 가기나 하지요. 혹 4.3을 왜곡 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80년대부터 30년 넘도록  민주화,4.3운동을 계속 한다는 건 그야말로 길고 긴 자기와의 싸움이다. 가족과 형제, 주변에 미안을 넘어 고통을 주는 힘든 삶도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한다. 이에 비하면 세상과의 싸움은 어쩌면 쉽다. 강남규도 그런 사람이다. 편하게 살 기회도 많았지만 외면했다. 그는 운동판 욕쟁이다. 원칙을 벗어나는 행동을 보면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쓴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그에게 욕 한 두번 듣지 않은 후배가 없을 정도로 역사를 바라보는 눈은 무섭다.
“원칙주의자라고 하지요. 분명한 건 어떤 사업을 할 때 어느 정도의 원칙을 담아낼 것인가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고민없이 원칙만 주장하거나, 괜찮다고 넘어가는 것은 절대 용납 못하는 성격입니다. 평소 ‘하좌이행(下座履行)’이란 말을 좋아하는데, 아랫자리에 앉아서 실천하는 게 중요하지 이름 내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변에선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 이게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입니다. 노동상담소나 생태관광 돈이 안되는 거 알죠. 하지만 누군가 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사람이 없어 때론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로움을 생활화 하지 않으면 자기를 되돌아 볼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어울려 다니면 좋지만, 그렇게만 살 순 없는 거 아닙니까. 생활이 어려우니 경제적으로 그들을 따라가지도 못하고...스스로 어울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좋게 이야기 하면 ‘자제’고, 현실적으로는 솔직히 (경제적으로) 벅찹니다.”

30년 넘도록 지역을 위해 일해 왔지만, 여전히  ‘벅차다’는 강남규. 그가 그리는 제주는 과연 뭐길래 그렇게 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걸까.
 “네 살짜리 외손녀가 있는데, 그 아이가 컸을 때 제주모습을 늘 그려봅니다. 지금 속도로 가면... 일본 원전문제, 강정해군기지, 롯데리조트 특혜,  이런 개발방식이 옳은 거냐. 그렇지 않고도 충분히 제주도민들이 먹고살 방안이 있을 겁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프로그램을 하나씩 만들어, 빠르면 올 여름부터는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도시 아이들, 한 부모 가정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생명평화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돈은 안 되겠지만요. 또 하나는 제주민주화운동사, 노동운동사, 민중생종권투쟁사를 정리하고 싶습니다. 87년 6월 항쟁이 벌써 25년 , 사반세기가 되고 있는데 사료들을 정리해서 데이타베이스화 해 놓으면 후학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고...장기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환갑 전에는 작업을 마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무실에는 70~80년대에 봤던 그 책, 그 자료, 유인물들이 파일철에 담긴 채 빼곡이 보관돼 있다. 옛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당시 자료 유인물 들을 쏙쏙 꺼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자료들을 지금까지 보관할 수 있었나 감탄할 정도였다. 세월은 흘렀지만 강남규 그에겐 아직도 현재 진행중인 역사였다. 30여년에 걸쳐 제주땅을 밟고 느끼며 하나하나 쓰고, 몹고, 함께 숨숴온 역사적 자료들 속에 여전히 젊은 청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제주의소리>

<이재홍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