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63) 창천리 베염바리터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베염바리터 ⓒ장혜련

베염바리터라는 명칭은 집터의 지형에서 생긴 이름으로 뱀이 도사리고 있는 형 즉, 뱀이 또아리를 틀고 앉은 형태라는 데서 유래했다. 진주 강씨 소유로 옛날에는 대가를 이루어 살던 곳이며 이 집터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니 뱀바리동, 한자표기로는 사반동(蛇盤洞)으로 불렀다. 혹은 풍수지리학상 소병악에서 내려온 혈맥이 이곳에서 딱 멈춰 사반형을 이루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베염바리터는 옛날부터 제주시 ‘귀아랑’과 남원읍 신흥리 ‘여우내’와 함께 제주도 3대 명당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명당이란 개념은 풍수지리에서 나온 것으로 산세, 지세, 수세 등을 판단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풍수지리에는 땅을 우리가 살아가는 중요한 터전으로 보았다. 따라서 우리가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고대로부터 명산 대천에 제사를 지냈으며 후손의 발복을 기원했다. ‘작은 부자는 사람이 만들고 큰 부자는 하늘에서 낸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명당이다.

베염바리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토산의 처녀가 이곳 갑부집 총각에게 시집을 오던 날 모시고 온 뱀신이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쩔쩔맸다. 땅의 기가 뱀신보다 더 강했기 때문이었다. 새색시를 보러 나왔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끝내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 뱀신이 갑자기 망아지로 변하더니 토산 방면으로 달아났다.

실제로 이 곳엔 안덕에서 최고 부자였던 강씨가 살았는데 후손이 조상의 묘를 잘 못 쓴 탓에 지금은 쇠락했다고도 하고, 강씨가 집을 지을 때 정시(地官)가 “마당에 있는 돌이 까마귀만큼 자라거든 이사하라.”고 했는데 그 경고를 무시하여 돌이 많이 자라나도 이사하지 않아 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김오순(1928년생, 여)에 의하면 베염바리터에 강씨가 살았을 당시, 막산이란 힘센 하인이 살았다고 한다. 얼마나 기운이 센지 50인분 식사를 혼자 먹었으며, 한 번 밭에 나가 일을 할 때는 하늘에 갑자기 뿌연 구름이 일어 앞이 안 보이다가 먼지가 가라앉으면 금방 나무숲이 농토로 변했다고 할 정도로 일을 잘했다고 한다.

지금 이곳은 빈 터로 남아 있다. 정시가 얘기했던 그 돌은 이제 돼지머리 만큼 자랐다고 한다. 지기(地氣)가 다한 땅, 한 때의 부귀영화는 어디로 갔는지 쓸쓸한 빈 터만 남아 있다. 정말이지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라는 시조 한 구가 이곳의 황량함과 쓸쓸함을 말해 준다. 일찍이 우리 선조들은
풍수니 명당이니 하는 것 또한 자연이 이치를 닮아 흥망성쇠가 있음을 간파하여 그 순리에 순응하여 살아가고자 하였다.

인간의 부귀와 영화는 영원하지 않고 계절과 자연의 섭리처럼 그 운명을 달리한다는 사실을 이 유적은 말해주고 있다. / 장혜련

*찾아가는 길 - 창천리 창천초등학교 앞 신호등 첫 번째 길 → 우회전 100m 지점 좌측 오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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