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규명 숨은 주역] ⑥ 4.3시인 강덕환
"기억, 어떤 두려움 없이 말할 권리 지켜져야"

▲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대학 시절 자췻방에 숨어 4.3영령의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던 제사상, 소설 ‘순이삼촌’을 각색해 만든 시극 ‘열여드렛날 밤에’ 대본을 공안에게 빼앗겼던 일, 판금 된 ‘순이삼촌’을 몰래 숨어 돌려보던 일. 그리고 제주도의회 4.3특위 조사위원으로 만났던 4.3 유족들이 희생자 명단에 오르는 데 두려워하던 모습.

이 모두가 시인 강덕환(제주도의회 정책자문위원)이 ‘말 할 권리’에 대한 고집을 키우게 한 장면들이다.

그래서였나. 그의 펜은 말 못한 사람들의 입이 되었다. 시집 ‘그해 겨울은 춥기도 하였네(2010)’는 그 발언장이다.

4.3 기념일 뒷날 도의회에서 만났던 그는 ‘음복’하느라 술을 달고 산다고 했다. ‘술 먹는 핑계지 뭐’라고 가볍게 얘기했지만 4월이면 아직 명예회복 되지 못한 영령들을 위한 음복이 시인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강 시인은 인터뷰이로선 쉽지 않은 대상이었다. 인터뷰하는 내내 그는 말을 아끼는 느낌이었다. 인터뷰가 끝난 후 이유가 설명됐다. 인터뷰가 끝난 뒤 모든 짐을 챙기고 막 문을 나서려는 기자에게 그는 ‘내가 4.3에 대해 얘기할 주제가 되나... 4.3의 한복판에 있어야 할 텐데’라고 말했다.

돌아와 확인해 보니 그를 찍은 사진에도 쑥스러운 웃음만 남았다.

# 먹을 거 많은  친척 제사상 부러워한 어린시절...“그게 4.3인줄도 모르고”

많은 4.3문학인들이 그렇듯 그 역시 ‘순이삼촌’을 맨 처음 이야기 했다. 1980년 초 ‘순이삼촌’이 판금 되기 전인 1980년 대학 들어가던 해에 제주시 구제주에 위치한 남문서점에서 샀었다.

이보다 거슬러 올라가 4.3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강렬한 첫 기억은 ‘친척집 제사상 성찬’이었다. ‘그게 4.3인줄 모르고’ 사과, 고기가 많았던 친척집 제사가 마냥 부러웠던 꼬마시절. 그 뒤 ‘도대체 4.3이 뭐길래’란 질문으로 그 뒤를 좇기 시작했다.

문학동아리 ‘신세대’ 활동을 통해 4.3을 다시 만난다. 신세대는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컸던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이 다수 포진돼 있었다.

공식적인 4.3위령제가 이뤄지기 한참 전부터 신세대는 자췻방에서 공안 몰래 추모제를 열기도 했다. “무엇보다 잊지 말자는 취지”였다. 쌀떡에 소주가 전부였어도 할 수 있는 예를 최대한 갖춰 엄숙히 치렀다.

역사가와 정치인들에 대해 경비가 삼엄할 때 제주 예술인들은 4.3을 다루길 주저하지 않았다. 강 시인은 “역사와 정치가 할 수 없는 영역에서 4.3을 발언할 때 예술의 역할이 분명 있었다”라고 말했다.

# 4.3시인, 4.3시집은 단 한 권...현장에 더 가까웠던 시인

강 시인은 대학 졸업 후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월간 제주 기자로 활동하면서도 4.3을 놓지 않았다. 그는 4.3 피해가 심한 마을들을 돌며 기획 취재 했다. 지면을 4.3에 할애해 왔던 게 인연이 됐을까, 평소 알고 지내던 제주도의원의 권유로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현장 속으로 들어갔다.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이었다. 4.3과 관련된 어떠한 자료도 없던 당시 그 기초자료를 만드는 일이었다. 각 마을마다 돌며 “누구집에 피해 있었수과”부터 물어야 했다. 쉬쉬하던 분위기에서 유족들은 ‘그거 허영 지금 왕으네 뭐 할거라’고 푸념했다. 아기가 희생된 경우에는 부끄러워 하며 손사레를 쳤다.

그때마다 강 시인은 ‘일단 명단에 이름 올립서’라며 설득했다. 한사코 손사레 치는 통엔 마음이 아렸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어렵게 이어갔다. ‘생명으로 태어났으니 이름이야 얻지 못했더라도 위로는 받아야하는 것 아니겠냐...’

강 시인을 4.3시인이라곤 하지만 그가 4.3시집을 낸 것은 지난해였다. 지난 1998년 12년의 공백기를 거쳐 4.3시집을 냈다. 조사하며 간간이 써내오던 것을 묶은 것이다. 지난 시집은 그가 4.3특위 활동을 하며 만났던 증언자들의 이야기를 시적 형상화 작업을 통해 옮긴 것이다. 시 제목 꼭지 하나에 하나의 이야기가 든 형태다.

그는 이 시집을 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의 삶에 행과 연을 나누는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한 평생, 아니 젊은 날의 모든 열정을 받쳤고 밀접히 관계해온 4.3을 시인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4.3이 과연 어느 중턱을 넘었을까이..’ 그는 4.3의 피로 물들었던 한라산을 넘겨다 보듯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진척된 것은 사실이지만 쉽지 않은 여정이다’고 말했다. ‘한라산을 넘어가야하는 거라면 몇 부 능선이나 넘었을까이. 올르다보면 보수단체들이 다시 끌어내리고....’

▲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 4.3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대학 들어던 해에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읽었다. 오현고 졸업한 친구가 국어선생이 사보라 했다고 말했다. 그 얘길 듣고 남문서점에 가서 같이 사러갔다. ‘순이삼촌’이 4.3관련 소설이라 얘길 들었다. 거기 주인이 ‘순이삼촌’ 줍서 하니 ‘순이삼촌 없수다’ 했던 기억이 난다.

- ‘순이삼촌’은 당신에게 어떤 책.
나는 ‘순이삼촌’ 보다도 그 단편집 중에서 ‘도령마루 까마귀’에 깊은 감동을 받았었다. 우리 동네 얘기였다. 해태동산을 나 어렸을 적엔 ‘도령마를’ 혹은 ‘도령마루’라 했다. 내가 노형에 살았었는데 중학교는 제주중학교를 다녀서 그 도령마루를 지나와야 했다. 소낭밭 있는 길이 되게 무서웠다. 당시만 해도 신제주가 개발 안됐을 때다. 어느날 이 길이 뚫리고 ‘해태탑’이 세워졌다. 그러면서 밑도 끝도 없는 ‘해태동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공항도 확장 전이었다. 동령마루 까마귀가 우리동네 얘기다. 순이삼촌 보단 그게 더 감동을 받았던 거다. 내 주변 얘기인데.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던 할머니에게 듣던 얘기였다.

- 당시는 4.3 관련 자료도 마땅치 않을 때다. 관심을 이어온 계기?
대학 때는 문학동아리 신세대 활동을 했었다. 당시만 해도 4.3보단 5.18 얘기를 더 많이 했었다. 5.18추모제는 하되 4.3추모제는 안 하던 분위기 였다.

- 몰라서 였나? 알아도 무서워서?
4.3을 어떻게 정리할지도 몰랐고 말할 분위기도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 패기만만한 학생들조차 움츠러들 정도였나. 당시 사회 분위기는?
내가 제주대학교 80학번인데 입학 뒤 얼마 안 있어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5월 17일, 계엄령 내려 제주를 제외한 전국 계엄령 내려졌고 곧이어 5.18 휴교령이 떨어졌다. 우리 동아리 창립기념일이 5월 16일이어서 기념 한라산 등반을 갔는데 영실산장서 휴교령 라디오로 소식 들었을 때만해도 ‘으아, 학교 안가서 좋겠다’ 그런 분위기였다. 우리 학번이 처음 아라동 캠퍼스로 갔었는데 당시 교련수업 있었고, 학내 구호는 ‘학내 민주화’를 많이 요구했었다. 요 시기가 ‘서울의 봄’ 시절인데. 이런 싹이 잘려진 게 5.18이었다. 여기에 대한 정보는 제주도에서 없었다. 국내 언론 조차 차단당하고 할 시절이었다. 4.3과 관련해선 읽어볼 만한 자료조차 없었다. 그래서 ‘순이삼촌’ 책이 유용했다. 그것도 5.18 이후엔 판금 돼버리니... 사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 동아리 신세대에서 자취방 추모제 열었다고 하던데. 4.3을 입에 담기도 삼엄한 분위기서 어떻게 의기투합 됐나.
기억나는 건 당시 광양쪽 자취방이었다. 나는 휴학했을 땐데 82, 83년도였나. 전화가 왔다. ‘제문’ 하나 써달란다. 자취방 밥상 해봐야 (손바닥을 펼치며)요만한 것에 제물로는 떡에 촛불 켜놓는 수준이었다. 나름 엄숙하게 했었다.

- 제문까지 썼으니 소박하게나마 할 수 있는 한 예를 다 갖췄던 것 같다.
잊지말자는 차원이겠지... 그런 것들(4.3)을 공부할 때도 자료가 없으니 왜곡된 자료들로도 공부했던 것 같고. 정확한 진상 규명 안 됐으니... 82년도엔 같이 신세대 활동했던 김경훈 시인이 쓴 시극 ‘섣달열여드렛날 밤에’를 올리려 했었다. 그게 음력 12월 19일 북촌학살을 소재로 한 거다. 소설 순이삼촌을 각색한 거다. 그러다 공안에 대본을 뺏겼다. 학교가 발칵 뒤집어지고 등사기로 민 파지까지 가져오라고 난리였다.

- 신세대가 4.3문학인의 씨앗이라 할까?
글쎄. 당시 신세대 기관지 ‘젊음의 가능성’이란 게 있었다. 처음 썼던 시가 ‘처남동산의 협죽도’라는 4.3시였다. 당시 대학 1학년때였는데 노형초 옆 동산을 처남동산이라 한다.

- 어떤 내용인가?
우리 친구들 이야기다. 궁핍한 시대의 목숨붙이들. 4.3당시에 끝끝내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들이다. 그들이 이렇게 어우러져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4.3을 전면적으로 다룬다기 보다는 흉내 내는 정도였다.

- 월간지 기자를 하면서도 4.3 놓지 않았다고.
나름 4.3현장을 많이 뛰어다니려 노력했었다. 제1회 4.3추모제 할 때나 학내 집회할 때 인터뷰를 한다든가 했었다. 기획취재로 마을마다 돌며 4.3 이야기를 담으려고도 했었고.

- 1989년 4.3 추모제가 시민회관에서 처음 열리던 때에도 함께 했다고.
당시 학내서는 교문 밖 진출이 최대 과제였었다. 시위대가 교문 밖 진출하고 그다음 교수아파트 넘고 5.16도로 입구 이런 단계로... 시민회관서 추모제 하는데, 그 시대만도 반공유족회가 따로 있었고 문익환이 북한 방문하던 때였다. 추모제 해내는 게 어려웠다. 내가 그때 문학운동협의회, 청년문학회 활동했었다. 청년문학회는 4.3추모제가 열린 시민회관 앞에서 시화전을 했었다.

- 처음 치르는 추모제 분위기는 어땠나?
최루 가스가 난무한 가운데 추모제가 열렸다. 일부에선 훼방 놓고... 당시 놀이패 한라산이 ‘한라산’이란 4.3마당극을 처음 공연했고 김명식 선생의 토론회도 있었다. 당시 경찰들이 김명식 선생 꼬투리를 잡으려고 토론회를 녹음해 가고 분위기가 삼엄했었지.

- 다음해부턴 매년 열었나?
1991년에 유족회가 공식적으로 신산공원에서 ‘위령제’를 열었고 시민사회단체는 탑동 매립지서 ‘추모제’를 열었다. 유족회와 시민사회단체가 따로 서로 다른 이름으로 추모제를 열었었다. 

- 대학 졸업 후의 4.3 문학 활동은.
대학문학 동아리 ‘신세대’ 출신 문학동인들이 모여 ‘풀맆소리’를 만들었고 1987년엔 청년문학회를 결성했다. 문화운동협의회라는 게 있었는데 여기 문학분과가 제주청년문학회였다. 문화운동협의회 안엔 연행분과 놀이패 한라산, 울노래연구회 노래패가 있었다. 문화운동협의회가 하나의 사단법인으로 된 게 지금은 제주민예총이다. 그게 1994년인데. 청년문학회는 지금 제주민예총의 문학분과인 제주작가회의가 된 것이다. 지금은 독립된 사단법인으로 있고. 이 줄기를 함께해 왔다. 

- 87년경 청년문학회가 아닌 다른 4.3 문학작품 활동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나.
이산화의 작품 ‘한라산’, 노민영의 ‘잠들지 않는 남도’과 같은 작품들은 하나의 번역서 같은 것들이다. 그 전에도 오성찬 선생 등 단편적으로나마 분출하고자 했던 기성작가들도 있었다. 김용해 선생이 ‘민중 일기’란 4.3 시를 내는 등 간간이 4.3 작품들이 이어졌다.

- 단체가 중요한 게 거기서 계속 길러내 배출된다는 지속성 아닌가.
같이 뭐에 대해 해보자는 데선 힘이 된다. 4.3예술제를 제주민예총에서 처음 하면서도 문학은 문학대로 미술은 미술대로 노래는 노래대로 마당극은 마당극대로 총화를 이루게 된다.

- 문학을 통해 4.3을 형상화 알리는 데 4.3문학의 큰 줄기 쫓다 보면 신세대가 거론 안 될 수 없다. 이어서 풀맆소리, 제주청년문학회가 4.3문학운동의 한 줄기를 형성한다. 이 단체들이 4.3진상규명 구심체로서의 일정정도 역할을 하지 않았나.
어떤 정치가나 역사학자하고는 다르게 하나의 문학 자체가 어찌 보면 있음직한 거짓말이다. 소설도 시도 그 어떤 세계를 표현하려 하면 미래와 과거를 넘나들 수 있다. (삼엄했던) 그 시기의 방법으로써 문학이 주요했던 게 아닌가. 정치나 역사보다는 문학만이 아닌 예술장르가 4.3을 말하는 데 가능했었지 않나 생각한다. 위대하다기 보다는.

- 도의회 4.3특별위원회는 어떻게 참여했나?
1993년 3월 20일 구성됐다. 1단계는 기초조사, 2단계는 제대로운 역사 정립, 3단계는 도민 대화합이 큰 틀이었다. 4.3특위 기초조사 단계서 아는 의원이 전화가 와 같이 하자 했엇다.

- 현장에 더 가까워진 것 아닌가.
개별 희생자들을 의회서 피해자 조사했다. 1993년부터 계속했다. 도의회는 4.3피해 신고실 개설하고 희생자 유족들이 신고를 하고, 현장에 나가는 여섯 사람 조사위원이 나가 유족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했었다.

▲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 조사 명단도 없었을 텐데.
‘맨땅에 헤딩하기 식’으로 조사를 했다. 무조건 마을을 찾아가 얘기를 듣고 그 사람이 ‘옆집에 누구도 죽었더라’하면 그 집에 가서 또 이야기 듣고. 또 ‘이 마을 역사 누가 잘 압니까’ 물어 가서 또 묻고. 의회가 호적 열람권 있는 것도 아닌 상태였으니...

- 얘기도 잘 안 해줄 때 아닌가?
그렇지. 그나마 공식기관서는 처음으로 조사하면서 일정부분 신뢰를 심어준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욕도 많이 들었다. ‘그 허영 지금 왕으네 뭐 할거라’(이제 와서 조사하면 무슨 소용이냐)는 거다. 어쨌든 조사의 가장 큰 목적은 희생자의 실체만이라도 밝혀보자는 것이었다.

- 그때 4.3관련한 당시 분위기는?
1994년 첫 합동위령제를 도의회가 중재했다. 그전엔 개별적으로 해왔다. 제 지내는 걸 갖고 유족회와 시민사회단체가 서로 입장차이 보이며 달리하면 안 된다 해서 합동위령제 중제해 냈다. 

- 4.3자체의 성격 규명 자체가 진일보한 게 있는 거였나?
당시 정치적 분위기는 삼당 합당에 이어지는 87년 6월항쟁을 겪으며 사회민주화의 변화를 겪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사회가 어쩔 수 없이 민주화 열망을 막기만 해서는 도저히 안되는 상황까지 진척이 돼 간 거다.

- 1992년에 시집 ‘생말타기’를 냈는데 이건 굳이 4.3 시집이라라곤 할 수 없었다. 지난해 낸 ‘그해 겨울은 춥기도 하였네’가 4.3시집으로는 첫 시집이었다. 물론 4.3시를 단체시집 등을 통해 발표해 오긴 했지만 개인 이름으로 시집을 못냈거나, 안 냈던 18년의 공백기는 어떤 시간이었나?
기자로 활동하거나 막상 4.3 조사위원으로 활동 할 때는 글로 나오기 힘들다. 어쨌든 조사하면서 간간이 써왔던 것들을 묶어서 낸 거다.

- 시집 도입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의 삶에 행과 연을 나누는 것일 뿐이라 했는데.
그 진실이 나한테 도달해서 다시 하면서 왜곡될 수 있어서다. 그 진심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 말이다. 그러니 되도록 진실에 초점을 맞추자는 차원에서 복무했단 뜻이다. 어찌보면 알량한 시줄 보단 그게 더 감동적인 것들 일지도 모른다.

- 4.3현장을 누구보다 많이 돌아다녔는데.
4.3특위 조사위원으로 활동했을 땐데. 사람들이 낮엔 밭에 가버려 밤에 가야 한다. 밭에 갔다 오면 저녁 먹고 자버리기 때문에 짧은 순간에 어쨌든 만나야 한다. 낮엔 집과 올레를 파악해 둔다. 가서는 신고서에 주민등록번호를 적는데 이게 또 다른 뭔가로 남을까 두려워 한다. 이름 뭐우꽈, 물으면 내가 주민등록 번호 아느냐 가만 있어 보라, 신고 안하켜, 우리 아들한테 들어봐야 한다,하며 협조가 잘 안된다. 우리집엔 없다,고도 딱 잡아 떼기도 한다. 왜냐하면 아기들 죽으면 막 부끄러워 호적에도 안 올렸었다. 엄연히 한 생명으로 태어났다가 희생됐는데 이름이 지어졌건 아니건 희생자로 올리고 싶어서 ‘괜찮수다’(이름 없어도 괜찮습니다) 해봐도 한사코 손사레 치면 그런 걸 볼 때 막 가슴이 아렸던 적이 있다.

- 4.3이 업이 된 건가.
귓것(귀신)에 미쳐서...

- 지금 4.3의 현주소는 어디쯤 왔다고 생각하나.
과연 어느 중턱을 넘고 있을까 하는 거다. 완전한 해결에 이르기 위해선 한라산 정상을 넘어야 한다면, 어리목에 왔을까 사재비 동산 왔을까, 이정도 왔겠지 하면 보수단체가 끌어내리고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응한다든가 해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다. 진척된 것은 사실이지만 쉽지 않은 노정이라 생각한다. 4.3 특별법보면 불이익처분 금지 조항이 있다. 4.3에 대해 얘기해도 불이익 받지 않는다는 조항이다. 4.3특별법 제정당시 초안 작성 과정에 참여한 적 있는데 무엇보다 이것만큼은 넣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두려움 없이 자기 기억을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 노형도 피해가 많았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우리 가족에는 없다. 정확히 말해 호적부 상에 없다. 우리 아버지가 양자 들어 갔는데, 양자 들기 전 고모댁엔 있더라. 또 양자들어간 우리 할머니가 후처인데 대려온 아들이 희생당했다. 어렸을 때 제사 명절 같이 지내던 팔촌이 있다. 가깝게 지냈는데 그 집안에는 (4.3)희생자가 10명이 넘는다. 제상 차리는 게 엄청나다. 그게 어린 나에겐 ‘와, 여기는 제상도 많이 차려서 사과도 많고 고기도 많구나’ 그런 생각했었다. 그게 4.3인줄 모르고... 커가면서 왜 우리집에는 제상이 많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도대체 43이 뭔가’로 이어졌다. 이런 의구심들이 내가 글 쓸 때 4.3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 대체 그게 뭐던가.
내가 4.3에 관심을 갖게 된 그 출발이 주변에서 시작했단 뜻이다. 어떤 거대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라.

- 4.3의 앞으로 방향은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나.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노력하듯 제주가 평화 인권의 쓰나미(해일) 진원지가 돼야 한다. 해일 쓰나미가 아닌 평화 쓰나미를 퍼뜨려야 한다. 동시대 같은 아픔,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냉전으로 갈라진 시기에 아픔 겪었던 제3세계 지역들과 다리놓기를 해야 한다. 이게 가장 절실하고 필요하다고 본다.

- 마지막으로 요즘 어떻게 지내나.
술 ‘하영 먹으멍’(많이 먹으면서) 지내고 있다. 4.3만 되면 이것저것 음복할 일이 많아진다. 술 먹는 핑계긴 하겠지만...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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