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규명 숨은 주역] ⑤ 전 민족미술인협회장 강요배 화백
역사화 ‘동백꽃지다’ 50편 연작으로 제주4.3전국에 알려

▲ 4.3역사화 '동백꽃지다' 50편을 연작한 강요배 화백은 여전히 4.3을 화두로 살고 있다. 한림읍 귀덕1리에서 새로운 전시를 준비 중인 강 화백을 만났다. 그의 깊은 고뇌가 나즈막한 목소리에 실려 나온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잔인한 사월도 끝자락이다. 사월에 피는 꽃은 숨이 턱 막힌다. 한없이 아름다워서이기도 하고 ‘4.3’이라는 역사 속 잔혹한 생채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라산 왕벚꽃이 그러하고 동백꽃이 그러하다.

지난 1992년 4.3역사화 ‘동백꽃 지다’라는 50편의 연작 그림을 발표, 많은 대중들에게 제주4.3을 주목하게 했던 제주출신 강요배(59) 화백을 지난 22일 만났다.

동백꽃이 지는 4월, 반세기도 훨씬 전 사월의 제주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강 화백을 만나러 가는 제주시 서회선 일주도로엔 여리디 여린 샛노란 유채꽃잎들이 참 질기게도 서 있었다. 쓰라린 역사의 복판에서 작은 바람에도 흔들거리며 불안한 역사의 갈림길을 바라보듯 말이다.

군사정권 시절이던 20년 전, 전업 작가로 붓을 든 그에게 폭풍처럼 다가온 화두가 ‘제주4.3’이었다는 강요배 화백. 강 화백은 10년 전부터 제주시 한림읍 귀덕1리에 살림집과 작업실을 장만하고 정착, 그림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어설픈 서울내기가 나이 마흔 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약 10년간은 하귀리, 외도동 등지로 셋방살이를 이어가다 귀덕1리에 자릴 잡았다.

강 화백과 마주앉자마자 ‘왜 첫 개인전의 주제가 4.3이었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가진 재주가 4.3의 진실을 알리는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시 그는 “제주4.3은 단순한 빨치산의 무장봉기로 치부해야할 사건이 아니”란다.

“1948년 4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짧게는 무려 1년여 간, 길게는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기까지 만 6년6개월 간 벌어진 대학살과 유혈사태, 미군정의 통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 입장을 밝힌 제주도민 수만명을 한꺼번에 몰살시킨 참혹한 역사의 진실을 알려야 할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설픈 서울내기 될 뻔한 강요배, 고향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4.3'

▲ 강요배 화백은 "세상에 무서운게 없는 사람이다"고 말한다. 왜? 라는 질문엔 "4.3영령이라는 제일 힘센 빽이 있으니까"라며 치아를 드러내 웃는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강 화백이 커피 한잔을 내왔다. 커피를 마시려 고개를 든 창문 너머엔 진한 커피향보다 더 진한 향을 뿜어내는 동백꽃이 지고 있었다. 작업실 뒷마당 동백나무 밑동에 핏빛 동백꽃잎들이 무리지어 쓰러져 있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뚝뚝…. 강력한 트라우마에 지금도 앓고 있는 4.3유족들의 모습이 스쳐간다.
 
(사)민족미술인협회 회장을 지낸 강요배 화백에 대해 지인들은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들판에 억새 같은 사람입니다. 질기디 질긴…. 그 근성과 타고난 서사적 감성으로 4.3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작품들을 대중에게 내놓았고, 화가로서 4.3을 전국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만명의 운동가 못지않게 한 사람의 미술작품이 그 역할을 해냈다고 봅니다”

강 화백은 해마다 4월이면 제주 섬과 함께 ‘소리 없는 슬픔’에 잠긴다. ‘제주4.3’, 언제부턴가 제주 사람인 그의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한 화두다. 한때 어설픈 서울내기가 될 뻔 했던 그를 다시 고향 제주 섬으로 돌아오게 한 것도 바로 그 ‘4.3’ 때문이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시작한 교편생활, 여고에서 6년을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새로운 미술교육을 펼치고 싶던 시절이다. 이 무렵 그는 ‘현실과 발언’의 동인으로도 합류한다. 오윤, 성환경, 최민, 임옥상, 손장섭, 박재동 등이 주축이 된다. 당시 현실을 화폭에 담아야 한다고 외치며 이른바 ‘민중미술’의 기치를 든 그룹이다.

 대학 단짝 박재동 화백은 제주사람도 아닌데…4.3규명 진짜 '숨은 주역'

그는 4.3의 숨은 주역으로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을 주저 없이 꼽았다. 제주인이 아니면서 그토록 제주4.3에 애정을 가진 화가를 찾기 힘들다고 말한다. 강 화백은 “박재동 화백과는 서울대 미대 72학번 단짝 동창입니다. 대학시절 방학이 되면 박 화백을 데리고 제주에 와서 한라산을 올랐고, 30대 후반에 제주4.3에 대해 본격적인 공부를 하면서 박 화백과 많은 얘길 주고받았습니다”라고 말을 이었다.

그런 탓일까. 한겨레신문 시사만화가로 활동하던 박재동 화백은 유난히 제주 소재를 많이 다뤘다. 4.3, 골프장 천국, 제주도개발특별법 범도민 반대운동 등…. 결국 4.3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작품 ‘오돌또기'까지 만들었다. 강요배 화백이 박 화백을 4.3진실규명의 숨은 주역으로 꼽은 것이 괜한 공치사가 아니다.

강 화백은 요즘 전시 준비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올 하반기 쯤 ‘제주자연’을 주제로 개인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이 작업을 위해 제주산야를 지난 20년간 헤집고 다녔다. 보여지는 자연 자체보다 자신의 마음 속에 투영된 자연을 그리고 싶단다. 사물 그 자체보다 자신과 교감하는 대상을 표현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에겐 실제의 자연과 그림 속의 자연이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제주자연을 통해 느껴지는 질감과 소리,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하다.

강 화백이 하루 온 종일 머물고 있는 귀덕1리 작업실 지붕과 외벽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 덩굴이 유난히 푸르다. 살아있는 그의 눈빛을 닮아도 참 많이 닮았다.

▲ 강요배 화백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다음은 인터뷰 요지

- 4.3에 처음 관심 가진 계기가 있나. 4.3유족인가?
= 내 고향은 삼양동이다. 우리 가족은 원당봉 쪽에 살고 있다가 4.3때 집을 잃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당시 집안에 청년이 없었기 때문에 인명피해가 적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모친이 살아계실 때 간간이 밤에 들려주신 얘기가 있다. 4.3 당시 원당봉에 봉화불이  올라가고 뭐 그런 얘기다. 부끄럽지만 제주에서 성장하면서는 4.3을 잘 몰랐다. 워낙 금기시했던 시절이기도 하고. 아마 어머님 친정인 외가에 피해가 있었던 것 같지만 어머님도 생전에 암시만 할 뿐 일일이 얘기하지 않으셨다.

- 언제부터 4.3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나?
= 1989년도부터 4.3을 주제로 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전시회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92년도에 발표했지만.  당시 1989년도부터 4.3 그림을 연작으로 그리면서 흐름을 잡았다. 처음에는 100여점을 그리는 것으로 계획했다가 나중에 50점으로 수정해서 1992년도 발표했다.
 
- 4.3을 주제로 그려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했나?
= 1988년도 말이었는데 그 때까지는 직장생활 하다가 그 회사가 망해서 길에 나앉게 됐다.(하하) 딱히 할 일도 없고 또 그 이후 위궤양으로 수술까지 하게 됐다. 몸도 허약해지고 직장도 없고, 힘들던 시절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그림을 공부했는데 이 재주를 가지고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한게 4.3작업이다.
 
- 왜 하필 많은 주제 중에 4.3이었나?
=몸이 허약해지니까 고향을 생각하게 되고, 근데 고향을 생각할 뿐 그 대상이 뚜렷하게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제주도의 지나온 근현대 역사를 되돌아봤다. 그 중에서도 4.3은 그 당시엔 나한테도 좀 애매하고 무섭게 남아있었다. 이것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정확히 들여다봐야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자세로 작업에 임했다. 특히 그림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4.3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면 4.3을 알리는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부하는 과정도 쉽지도 않았고 작업과정도 자료부족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한 3~4년 계획 잡고 장기적으로 작업에 임했다.

 4.3을 전국에 알렸다고? 그건 결과적인 것…난 그저 민심을 그렸을 뿐

- 주변에서 4.3을 전국에 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한다.
= 그건 결과적인 거다. 미술이 갖고 있는 장점은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화가로서 그런 측면을 최대한 활용한 것뿐이다. 그리고 20년 전이 군사정권시절이긴 했지만 이미 시대 분위기가 금기했던 것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물론 당시 노태우 정권에서도 백골단의 무력진압으로 당시 명지대생 故강경대 군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아무튼 미술작품은 문학작품과도 또 다르다. 그때까지도 4.3을 다룬 많은 서적들이 금서였다. 그런 상황에서 문학은 어쩌면 상당한 고급독자들만 접근할 수 있었다. 금서였기 때문에 많이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나 미술작품은 그 당시에 무난히 전시됐다. ‘동백꽃지다’를 주제로 50편의 연작 그림을 제주, 서울, 대구 세군데서 순회전시했다. 당시 상당히 주목 끌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4.3을 다룬 미술작품들을 보면 4.3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이 없었다. 사진이 있었지만 대부분 군인과 경찰 등 토벌대 중심의 사진이었고, 당시 희생된 제주양민들이 살았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동백꽃지다 작품에 등장하는 제주양민들의 모습은 대중들에게 충격적이고 신선한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작품을 그리면서 4.3 전개과정을 표현하는데 시선을 민중 입장에서 전개하니까 부담이 없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을 항쟁에 맞춘다고 하면 대게 전투적이고 민중 지도자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매우 딱딱해진다. 그러나 철저히 민중 중심으로 가면 그런 부담이 사라진다. 그것이 민심의 흐름이니까.

- 아무리 그렇다 해도 군사정권 시절인데 사법당국의 간섭은 없었나. 두렵진 않았나?
= 특별히 뭐 당국에서 표현물에 관한 시비가 없었다. 그 전에 4.3을 다룬 시인 이산하가 한라산 시 때문에 감옥에 갔다 오지 않았나. 난 4.3을 표현한 그림을 50점이나 그렸는데 이상하게도 시비가 없었다. 아마도 당국이 내 그림을 이념 중심적인 것으로 보지 않은 모양이다.(하하) 그리고 시비가 있었던 들 4.3영령들이 모두 제 든든한 빽인데 무서울 게 있습니까?(웃음)

▲ 강요배 화백은 자신과 대학동기이자 절친한 박재동 화백을 4.3진실규명의 '숨은' 주역으로 꼽았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4.3당시의 제주도민들의 민심을 뭐라고 읽었나?
= 분명한 것은 해방 후 5.10선거 때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보이콧하기 위해 중산간 마을로 올라가서 일주일에서 열흘씩 살다 내려왔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대규모로 이뤄진 일이었다. 이 의미는 분단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옳지 않다고 본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 점을 표현하고 싶었다. 다음 또 중요한 것은 대량 집단학살이라는 양민들의 수난사다. 바로 이 두가지, 대량 양민학살과 5.10선거로 인한 한반도 분단을 막고자 했던 제주도민들의 민심을 표현하고 싶었다.

- ‘동백꽃지다’(제주4.3민중항쟁전) 전국 순회전이 첫 번째 개인전이었나?
= 맞다. 그전에 10년간은 동인전으로 꾸준히 전시활동을 했지만 개인전은 1992년이 처음이다. 시인이 자신의 시집을 내듯이 화가도 개인전을 한번 해야 화가가 되는 셈이다. 그때가 마흔 살이다. 먹고살려다보니 화가로서 개인전이 상당히 늦었다.

- 우문일지 모르겠다. ‘동백꽃지다’ 연작 50여점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 어떤 것을 꼽겠나?
= ‘동백꽃지다’ 작품 50점은 모두 하나의 주제로 연결된 것이다. 어떤 한 작품을 꼽을 수 없는 그림이다. 지금도 50점 전부를 제가 다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누가 갖고 있던지 분리하면 의미가 없다.

  난 무서운 게 없어, 왜? 무수한 4.3영령들이 내 빽이니까!

- 다시 4.3 작품을 구상 중인가?
= 그렇진 않다. 다만 1992년 전국 순회전 이후 약 20년 되가는데 그 사이에는 후배들과 미술단체(탐라미술인협회)를 만들어서 매년 4월마다 4.3기획전을 여럿이 함께 하고 있다. 하다보니까 지금까지 꾸준히 해왔다. 해마다 질적으로 나아지기 위해 새로운 시각으로 전시를 시도하고 있다. 우리들에겐 매년 4월에 4.3영령들에게 제사 지내는 의미로 전시를 하고 있다.

- 4.3 작품에 대한 갈증은 없나?
= 89년부터 92년 전시회 때까지 당시 3년여에 걸쳐서 작업하다 보니까 데미지(Damage)가 컸다. 작가로서 상상력을 동원할 때는 심리적 부담이 대단히 크다. 한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을 때도 많았다. 지금이야 워낙 4.3을 많이 얘기하니까 펜도롱(‘멀쩡’을 뜻하는 제주어) 하는데 당시 작업할 때는 4.3영령들을 만나는 느낌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영령들이 “너 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무언의 압력을 주는 듯 했다. 오래 붙잡기 힘든 작업이다. 4.3을 오랫동안 천착해온 4.3중앙위 김종민 위원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김종민 위원이나 저나 4.3에 태운 사람이고, 4.3에 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일이든 한가지에 오랫동안 천착한다는 것이 그 대상과 인연이 없고서야 불가능하다. 소설가 현기영 선생의 말씀이 생각난다. “4.3일을 하면 4.3영령들이 그 사람을 항상 지켜준다”는 말이었다. 진짜다 여러 가지로 4.3영령들이 도와준다. 수호신 같은 거다. 겁날 것이 없다. 4.3영령이 한둘인가. 가장 힘센 영령들이다. 현기영 선생이 “4.3일을 할 땐 겁먹지 말고 꿋꿋하게 걸어가라”는 말이 다시 생각난다. 

▲ 강요배 화백의 작업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담쟁이로 뒤덮인 한림읍 귀덕1리의 강요배 화백 작업실. 그대로 자연이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고향 제주로 돌아오기 까지 20년 세월이 걸렸다. 서울내기로 살던 시절과 제주에 정착하기까지 일화가 궁금하다
= 제주촌놈이 대학 진학하면서 육지로 나갔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마흔 살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처음엔 돌아와서 한림 옹포리에 가서 조그만 집 얻어서 살았다. 그러던 중 제주도 곳곳을 답사 다니다가 여기 귀덕리에 정착했다. 10년전에. 10년 동안 셋방살이로 떠돌이 하다가 10년 전에야 여기 정착한 셈이다. 하귀, 외도동으로 돌아다니다가….
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교편을 잡았다. 여고에서 6년간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그러다가 다시 약 3년 동안 출판 일을 했다. 아동용 도서에 삽화를 그리고 출판 기획하는 일을 맡았는데 그 회사가 망했다. 그 이후에 건강이 안 좋아져서 위궤양 수술까지 받게 됐다.

- 회사가 망하지 않았다면 출판 일을 계속하고 있었을까?
=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다.(웃음) 워낙 가진 게 없는 사림이었으니까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려면 직장 중심으로 살았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망한 것이 결과적으로 잘 된건가? 하하. 아무튼 4.3을 통해 화가로서의 강요배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그 이후에 제주자연을 다루는데도 상당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4.3영령들의 보살핌이다. 4.3영령들은 나에게 두려움뿐만 아니라 사리판단을 냉철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작가로서의 자세를 잘 갖추게 만들었다.

- 요새 그리고 있는 작품의 주제는 뭔가?
= 제주 자연을 그리고 있다. 4.3 이후에 주목한 것이 제주자연이다. 처음엔 4.3전시회 직후에 제주자연을 다뤘는데 사람들이 자꾸 4.3의 분위기가 물큰 남아있는 자연으로 해석했다. 1994년에 제주의 자연 전시회를 한 차례 했다. 그림속엔 4.3작품과 달리 제주사람이 없었다. 4.3흔적이 스쳐간 자연 느낌이 묻어났던 모양이다. 지금은 제주자연을 주제로 하지만 시공간을 초월한 여러 가지 폭넓은 각도에서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 앞으로 전시 계획을 준비하고 있나? 언제쯤 전시회를 만날수 있나?
= 올해 하반기쯤 전시 준비하고 있다. 주제는 제주자연이다. 자연도 이젠 자연 자체보다 완전히 주관화된 형태의 제주자연을 다뤘다. 자연은 대상인데, 그것도 결국은 마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처럼 내 마음의 거울일 수밖에 없다. 대상 자체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는다. 상당히 주관화된, 추상화된, 마음의 문양을 표현하고 싶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자유자재한 자연을 표현하려 한다. 예를 들면 사물 그 자체보다도 그 사물이 나와의 교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그 모양이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질감, 소리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한 것 같다.

- 아직도 제주사회에선 4.3의 영원한 해결을 말하고 있다. 그만큼 과제가 남아있고 여전히 4.3은 현재진행형이란 얘기다. 남은 4.3 과제를 뭐라 생각하나?

= 지금도 무수히 많은 4.3피해자 신고가 이어져야 한다. 아직도 깊은 트라우마(외상성 신경증세) 때문에 신고하지 못하는 여러 사례들이 있다. 유해발굴조사도 더 해야 한다. 그 다음에 헌법에 나와 있는 평화통일 지향 원칙을 잘 이어가야 한다. 남북문제를 헌법에 명시된 대로 평화 원칙에 맞게 이어가야 한다. 우리 민족사 전체가 바로잡히려면 장기적으로 평화통일이 되어야 한다. 평화통일이라는 우리 민족의 과제에서 봤을 때 60여년전 제주도민들이 반 분단의 슬로건을 내걸었던 것은 분명히 의미 있는 역사다. 어느 정권이든지 통일 이야기는 항상 나온다. 언젠가는 한반도 분단 문제는 해결될 것이고, 그 때 되면 제주4.3도 분단거부 운동으로서 반드시 재조명 될 것이다. 결국 그것이 4.3의 완전한 조명이다. 남북이 분단을 막고자 했던 것이 4.3 아니냐. 분단은 외세 때문에 두동강 난 것이다.

- 4.3 진상규명 작업에서 기억에 남는 분이 있나?
= 많은 분들이 제주 안팎에서 4.3의 진실규명을 위해 애써왔다. 제주인으로서는 김종민 씨 같은 분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제주인이 아니면서도 제주4.3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한 이가 있다. 바로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이다. 나하고는 서울대 동기이고 단짝 친구다. 대학 동기다. 대학시절에도 방학때 제주도에 같이 와서 한라산도 오르고 많은 시간을 보낸 친구다. 서른 후반에 4.3공부하면서 박 화백과도 4.3애길 많이 주고받았다. 그때 박 화백은 한겨레신문 만평 그릴 때다. 시사문제와 역사문제를 꾀고 있던 박 화백이다. 특히 제주도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제주도개발특별법 반대운동 한창 때, 골프장 천국 제주도, 탑동매립할 때 등 박 화백의 제주에 대한 애정은 대단했다. 결국은 4.3을 애니메이션 해보겠다고 해서 만든 작품이 ‘오돌또기’다. 만화로 4.3을 알렸다. 외부사람으로서 대단한 시도다. 제주도 사람 못지않게 애정을 가지고 있고, 상당히 많은 역할을 했다. 지금도 평화공원에 가면 박 화백의 애니메이션이 전시돼 있다. 그의 제주사랑에 늘 고마움을 느낀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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