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 한 줌

“어머니! 나 고사리 오늘은 한 줌 꺾어 완.”
와당탕 소란을 떨며 안채의 문을 열었는데 조용하다. 아마도 노인당에 가셨나 보다.
고사리 한 줌씩이나 꺾었다고 자랑하고 싶었는데…. 나는 풀죽은 모습으로 문을 닫았다.

▲ ⓒ고봉선

며칠 전 산에 갔다가 우연히 막 돋아나는 고사리를 보았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꺾었다.
딱 다섯 개였다.
집에 와선 아무렇게나 마루에 픽 던져두었다. 어머니께서 보시고 한마디 하신다.

▲ ⓒ고봉선

“이 고사린 어디 시난?”
“아까 산에 갔당 꺾언 완.”
“어디 몰명진 고사리 이선 느신디 걸려시니?”
“눈에 보이는디 개믄 그냥 와?”
“그까짓 거 허영 무시거 허잰?”
“만날 호꼼씩 꺾으멍 모으민 되주기.”
“몰라부렁 남느냐게.”
시답잖은 듯 어머니께서 핀잔을 주신다. 

▲ ⓒ고봉선

아침 일찍 운동을 가기로 하던 남편은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은지 그냥 출근한다. 처음으로 예비군 훈련을 받게 된 아들 녀석을 훈련장에 데려다 주고 나 혼자 산으로 향했다.
조른동산을 거쳐 웃작지소를 지나 안오름으로 들어갔다.

▲ ⓒ고봉선

숲길을 지나니 탁 트인 공간에 찔레가 가득하다. 그야말로 세비낭 가시자왈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고사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허리를 숙이고 꺾었다. 다시 눈앞에 줄줄이 이어진다. 순식간에 한 줌이 되었다.

▲ ⓒ고봉선

고사리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BC 1100년경 은말주초(殷末周初)의 전설적인 두 성인(聖人) 백이와 숙제의 고사이다.
백(伯)과 숙(叔)은 형제의 서열을 나타낸다. 사마천(司馬遷)에 의하면 고죽군(孤竹君:고죽은 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루룽 현[盧龍縣])의 아들이라고 한다. 고죽군은 막내아들인 숙제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그가 죽은 뒤 숙제는 이것이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여 맏형인 백이에게 양보했지만 백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나라를 떠나 서백(西伯) 문왕(文王)의 명성을 듣고 주나라로 갔다. 그곳에서는 이미 문왕이 죽고 아들인 무왕(武王)이 문왕의 위패(位牌)를 수레에 싣고 은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러 가려는 참이었다. 두 사람은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병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효이며 신하로서 군주를 치는 것은 불인(不仁)이다"라고 하며 말렸지만 무왕은 듣지 않고 출정해 은을 멸망시키고 주의 지배를 확립했다. 두 사람은 주의 녹(祿)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지금의 산시 성[山西省] 융지 현[永濟縣])에 숨어 살며 고사리를 캐 먹고 지내다 굶어 죽었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발췌)

▲ ⓒ고봉선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
주려 주글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거신들 긔 뉘 따헤 낫다니.

▲ ⓒ고봉선

세조의 왕위 찬탈로 빚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사육신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이 시조에서 성삼문은 백이 숙제보다도 더 굳은 절개를 지키겠다는 충의심을 나타낸다.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이에 항거한 작가는 자신의 위치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 ⓒ고봉선

도깨비고비도 올망졸망 돋아나고 있다. 사진을 찍고 난 다음 하나 툭 꺾어선 털을 손으로 훑어 내렸다. 한입 물어보았지만 삼키지는 못했다. 떫은맛이 강하다.
어서 빨리 집으로 가서 어머니께 자랑해야지 오늘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먹을 만큼 꺾었다고.

▲ ⓒ고봉선

세 시가 넘어 어머니께서 오셨다.
"어머니, 노인당 갔다 완?"
"무사?“
"고사리 하영 꺾어왔댄 자랑허잰 해신디 어머니 안 계셩게."

얼른 꺾은 고사리 갖다가 보여 드렸다.
“오늘은 먹을 만치 걲어싱게. ”
일어서시더니 같이 볶아 먹으라며 햇양파를 갖다 주신다.
팔순이 넘은 어머니 앞에서 50이 넘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아이였다.

<제주의소리>

<고봉선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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