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몽골을 만나다] 세 배 가까이 불어난 인구

제주와 몽골의 만남으로 제주는 인구가 크게 증가하는 변화도 겪습니다. 몽골이 직할령으로 삼은 초창기에는 1만223명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된 탐라민의 수가 1374년(공민왕 23)에 이르러서는 3만 명 내외에 달했을 정도로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제주와 몽골의 만남은 대립과 갈등관계로 이어진 경우도 많았지만 상당수의 몽골족이 제주에 들어와 정착하고 제주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교류도 직접적이며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몽골족이 제주에 오기 시작한 것은 몽골이 제주를 직할령으로 삼은 1273년(원종 14)부터입니다. 그때 몽골은 700명의 몽골군을 주둔시키고 몽골족 관인도 파견했습니다. 그후에도 몽골이 보낸 군사는 점점 늘어나 제주의 1차 환속이 이루어지는 1294년(충렬왕 20) 이전 무렵까지는 최소한 1,400명의 몽골군이 주둔했었습니다.

군사 뿐 아니라 몽골 본국의 죄수 170여 명도 1277년(충렬왕 3) 이전에 제주로 왔고, 이후에는 왕족, 관료 등이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몽골이 제주에 설치한 목마장을 주관하는 ‘하치’ 곧 목호도 적지 않게 제주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탐라목마장이 설치된 1276년(충렬왕 2)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부터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1366년(공민왕 15) 이후에도 몽골은 당시 황제 순제가 피난할 궁전을 짓기 위해 목수 등 상당수의 몽골족을 제주에 보냈습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중 제주목, 성씨조 부분 ⓒ김일우·문소연

그렇게 1273년부터 제주에 오기 시작했던 몽골족은 공민왕대(1352~1374)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이 모여 사는 부락을 이미 이루고 있었을 정도로 상당수가 정착하거나 오랜 기간 거주했습니다. 당시 몽골족들은 제주를 낙토(樂土)로 여길 정도였다니, 제주사회의 몽골세력이 어느 정도였고, 제주에서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됩니다. 

제주의 성씨(姓氏) 선향(先鄕)에서도 상당수의 몽골족이 제주에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16세기 전반까지 제주지역에 살았던 주민이 지닌 성씨 중에는 몽골의 원(元)을 선향으로 삼은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 등과, 명나라가 유배 보냈던 몽골왕족으로서 운남(雲南)을 선향으로 삼은 양(梁), 안(安), 강(姜), 대(對)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성씨를 지닌 주민들은 제주가 몽골의 직할령으로 된 뒤 제주에 들어와 살았던 몽골족, 혹은 그들과 제주여자 사이에 태어난 후손들이었을 테지요.

제주 인구는 몽골과 만나기 전인 13세기 전반 이전부터 다른 곳으로부터 사람이 유입되어 점차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지만, 몽골의 직할령 기간에 들어온 몽골족이 제주여자과도 혼인했기 때문에 더욱더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몽골족과의 혼인은 당시 전국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왕실부터 그랬습니다. 고려왕은 몽골황실의 공주와 결혼해야 했고, 왕위 계승권도 몽골공주가 낳은 왕자가 우선순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고려의 육지부 지역에 왔었던 몽골군 중에도 몽골 황제가 고려여자와의 혼인에 관한 지침을 하달할 정도로 고려여자와 혼인했던 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제주인 경우, 제주사람들과 몽골족의 만남이 100여 년 지속되고 제주사회 주도권도 몽골족이 장악했던 터라 목호 등의 몽골족과 제주여자의 혼인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던 듯합니다. 그러다보니 반(半)몽골족화 된 제주사람들도 상당히 많이 태어났을 것이고, 이들 역시 원(元)이나 운남(雲南)을 선향으로 삼는 성씨를 지녔을 것입니다. 그렇게 몽골족 혹은 몽골족과 제주여자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은 제주에 동화·흡수되어 가며 제주사람들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그들로부터 제주사람들이 받은 문화의 영향도 적지 않았습니다.

<관련유적 돌아보기>

몽골인 목호와 혼인했던   열녀정씨지비

▲ 열녀정씨지비 한남리사무소 ⓒ김일우·문소연

이 비의 주인공인 정씨는 고려시대 몽골인 목호와 혼인했던 제주여성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1374년(공민왕 23) 일어난 목호의 반기와 그 평정의 와중에 죽고 맙니다. 당시 정씨의 나이는 스무 살. 젊고 아름다운데다가 목호 남편 사이에 자식도 없어 제주에 온 고려의 안무사 군관이 탐내어 강제로 취하려 했지만 정씨는 죽기를 각오하고 물리쳤다는군요. 이후에도 많은 유혹이 있었고 친족들도 재가를 권했지만 끝내 뿌리치고 절개를 지키며 혼자 살다가 70세에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정씨는 열녀로 칭송받게 됩니다.

열녀 정씨의 이야기는 몽골 지배기에 제주여성과 몽골인의 혼인이 제주사회에서는 일반적이었고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음을 엿보게 합니다. 

지금의 정씨열녀비는 1834년(순조 34)에 세워졌는데, 원래 남원읍 속칭 ‘정비못’에 있었다고 합니다. 정비못이라는 이름도 이 비석에서 유래했다는군요. 도로확장 공사 등으로 2006년 한남리사무소에 보관 중인데, 머지않아 이사무소 마당 공덕비 터로 옮겨 세울 예정이라고 합니다.

▲ 열녀정씨지비 ⓒ김일우·문소연

비문 번역 내용을 소개해봅니다.

<비양(碑陽)> 고려 때 석곡리보개(石谷里甫介)의 처는 합적(哈赤)[몽골의 관마 관리인]의 난에 그 남편이 죽었는데, 정(鄭)은 나이가 어리고 자식이 없으면서 얼굴이 예뻤다. 안무사의 군관(軍官)이 억지로 장가들려고 하였으나, 정은 죽기를 스스로 맹세하고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하니 마침내 장가들지를 못하였고 늙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다.

<비음(碑陰)> 목사 한공(韓公[韓應浩])께서 특별히 뒷 양식을 내리면서 석비(石碑)를 고쳐 만드셨다. 이르는 곳마다 보고 들으며 고적(古跡)들을 중수하였으니, 그 은혜에 또한 끊이지 않도록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가 없다. 1834(순조 34)년 3월 일

 / 김일우·문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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