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제주, 시산혈해지도(屍山血海之島)

화가이자 필자인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 소장이 개인전 ‘알뜨르에서 아시아를 보다’ 전시를 진행하며 오랫동안 손을 놓았던 ‘제주담론’ 칼럼을 재개한다.(편집자 주)

서 - 바람 타는 섬, 제주

‘바람 타는 섬’, 제주가 낳은 한국의 대표소설가 현기영 선생이 지은 소설집 제목 중 하나다. 구로시오와 태풍의 길목, 제주섬의 역사를 함축하는 표현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으랴. 제주섬은 어찌 보면 세계사와는 하등 관련 없는 동아시아의 조그만 섬 같지만, 한반도의 부속도서 4천여 개의 섬 중 유독 다른 섬이다.

섬은 운명적으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모든 섬은 붙박이이기 때문에 자기 땅에 유배된 운명을 타고난 것이리라. 바로 그 운명이 섬에서 뼈를 빌고 살을 얻어 태어난 이들의 삶을 좌지우지했으니 그 이름이 ‘섭라인’이든 ‘탐라인’이든 ‘제주인’이든 다 바람 타는 섬의 백성들이었으리라.

주민소환투표까지 치러지면서 전직 지사시절 강행하던 해군기지 문제는 새 도정 들어서도 해군의 공사강행과 그에 따른 주민들 간의 충돌, 군과 민간의 충돌이 이어지면서 여전히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영화평론가인 양윤모 씨가 목숨을 건 무기한 단식을 이어가고 있으며, 초대민선지사였던 신구범 씨는 강정 현장의 천막 속에서 10일간의 동조단식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국회 차원에서도 야 5당이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활동에 들어가는 등 그동안 도민사회에서 잊힌 듯했던 해군기지 문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그동안 제주해군기지 추진의 군사적·전략적 명분이었던 ‘대양해군 정책’이 지난 4월 29일 <국방개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의 입법예고를 통해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으면서 기지건설의 명분도 사라지자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강정 앞바다는 2002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우리나라 유일의 연산호 군락지로 문화재보호구역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 해안가에는 1㎞가 넘는 한 덩어리 용암단괴인 ‘구럼비 바위(이 바위가 지질공원에서 빠진 것은 아마도 해군기지 때문일 것이다.)’가 있고, 멸종위기종인 ‘붉은발 망똥게’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제주도는 이러한 경관 및 생태계의 우수성을 인정해 개발해서는 안 되는 곳, ‘절대보전지역’으로 지정했었다. 하지만 이런 해군기지 부당의 이유들도 군의 강행의지와 거기에 결탁한 개발이익을 노리는 일부 세력들(일부 개발업자, 토지 소유주, 도의원, 행정가 등등)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일임을 안다. 늘 그랬다. 밖에서 들어오는 세력에 빌붙어 사욕을 채우려는 자들이 구더기처럼 들끓어 온 게 역사였다.

가까운 시기로 돌아가서 1989년 이루어진 탑동매립의 경우만 보자. 하늘이 준 천혜의 먹돌바당을 메워서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아름다운 자연을 메꾸어서 제주도가 행복해지는데 도움이 되었는가? 제주발전에 자그마한 밑돌이라도 되었는가? 그 당시 매립을 추진한 세력들은 모두 어디 있는가? 아름다운 자연보다 우월한 삶의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어떤 미사여구와 애국주의를 들먹인다고 해도 그 논리가 한낱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거짓임은 오래지 않아 들통 나는 법이다. 해군의 논리가 과연 대한민국을 위한 것일까? 단 한 명의 주민의 삶이라도 공권력, 군대의 힘에 의해 파괴된다면, 이미 그 공권력, 그 군대의 힘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잃어버린다. 그렇다면 그들의 명분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육사 출신이기도 한 신구범 전 지사는 10일간의 단식의 와중에 “해군기지 건설은 안보를 빙자해 군 내부에서 자체 세력 확장과 이익 도모를 기하려는 해군의 몸집 불리기에 불과하다.”고 설파한 바 있다. 생존권이 갈가리 짓이겨진 강정마을을 보면 신 지사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이즈음에서 제주의 역사를 한번 돌아보자. 대양의 한복판에서 스스로 흐를 수 없는 붙박이 섬의 운명이 그동안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말이다. 세계사의 거센 물결에 휩쓸렸을 때, 섬은 운명적으로 어떻게 존재해왔는지를 말이다.

세계사와의 첫 만남, 동아시아 국제전 - 백제부흥전쟁과 탐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위 삼국시대(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부여도 가야도 탐라도 사라져버린 엉터리 시대표현이기 때문이다.)의 종국. 백제의 패망과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진 긴박했던 시대. AD. 660~668년 사이 요동-만주-한반도 열국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국제전이 벌어진다. 이 전쟁의 두 세력은 ‘백제 대 나당연합군’ 그리고 ‘고구려 대 나당연합군’이었다. 흔히 삼국시대를 다룬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삼한일통의 대업(신라 입장에서)’을 달성하는 이 전쟁에 신라는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였다.(물론 당시의 외세를 오늘의 논리와 등치시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 또는 관념이 현대와는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연히 역사와 풍토가 아주 달랐던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반쪽짜리 반도의 삼한을 일통한 것은 안타까운 역사의 한 장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 전쟁의 결과 동아시아는 중국 중심의 조공체제가 완전히 자리 잡으면서 소위 중화적 질서가 향후 19세기까지 지배한다.

어쨌든 제주도(탐라)와 관련 있는 대목은 백제와 나당연합군의 전쟁이다. 서기 660년 7월 백제는 끝내 나당연합군에 패망하고 만다. 그리고 뒤이어 4년간 소위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활발했던 이 부흥운동 역시 663년 8월, 전쟁의 마지막 대전이었던 백강전투에서 왜의 구원군(왜군 27,000명 / 왜 함선 400여 척)이 나당연합군에게 궤멸당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 전투의 결과는 8년 후 고구려 패망의 또 다른 배경이 되기도 한다. 우리 역사의 열국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전쟁의 기사 중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이 있는데,《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조’에 “5년(665) 가을 8월 유인궤(劉仁軌)는 우리(新羅) 사신과 백제·탐라·왜인 네 나라 사신을 이끌고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돌아가 태산(중국 산동성)에서 회사(會祠)하였다.”라는 기록과, 중국의 사서인《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유인궤전>에 “인덕 2년(665) 탐라국의 사자가 당나라 수군장 유인궤에게 항복했다. 유인궤가 신라·백제·탐라·왜의 추장을 거느리고 모임에 참가했다.”는 기록, 당회요(堂會要)에 실려 전하는 같은 내의 기록이 그것이다.

   
▲ 백강전투 상상도, 김산호 작 《대쥬신제국사 2권》중에서 ⓒ박경훈
이 기사(記事)는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들불처럼 일어났던 백제부흥운동이 패망한 지 2년 후의 상황을 전하고 있는 것인데, 기사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백제부흥운동이 백제인과 왜인들과의 연합전이 아니라, 나·당 연합군 대 백제·탐라·왜 연합군의 전쟁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즉, 당시 동아시아대전 속에서 탐라는 참전국으로 전투에 임했으며, 그 결과 백제, 왜와 함께 패전국의 대표로 당나라 장수 유인궤에 이끌려 당나라의 봉선(封禪)의식에 참여한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탐라는 백제 패망 후 부흥군의 일원으로 참여했으나, 이 전투의 결과로 패전국의 일원이 되었고, 뒤이어 신라(679년)에 새롭게 귀속되고 만다. 세계사와 만난 파란만장한 역사의 서장이었다.

대제국 원 팽창기의 탐라: 삼별초 항쟁

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원 세조) 집권기에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화북(華北)에 가까운 상도(上都: 개평부)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大都: 현재의 북경)로 옮겨 나라이름을 대원(大元)으로 선포하는 등 제국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 고려는 문신들의 횡포에 반기를 든 무신정권(武臣政權)이 들어서서 왕조를 쥐락펴락할 때였다. 고려와 원은 거란족을 소탕하는 데 상호 협력하는 등 초기에는 유화적인 관계였으나, 원이 점차 과중한 세금을 요구하는 등 외교적 마찰을 빚게 되자 끝내 단교(斷交)에 이르게 된다. 원은 마침내 고종 18년(1231)에 대대적으로 침공해오는데, 고려 조정은 이듬해 강화도로 천도해 이후 40여 년간 원의 일곱 차례에 걸친 침공에도 끈질기게 맞선다.

하지만, 전국토가 초토화되고 백성들이 강제로 끌려가는 등 오랜 항전에 나라는 도탄에 빠지고 말았다. 어찌 보면 백성은 안중에도 없고 최씨 무신정권과 왕족·귀족들만을 위한 수성이었던 셈이기도 했다. 4대 60여 년에 걸친 최씨 정권의 마지막 세습자였던 ‘최의’가 ‘김준’ 등에게 살해당하면서 무신정권도 종막을 고하고 있었다. 마침내 원종 11년(1270) 북경에 갔던 원종이 고려가 원의 속국이 되는 것을 전제로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원에 대한 항쟁은 끝을 맺는다.

하지만, 최충헌의 아들 최우 때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으로 시작된 삼별초는 대몽항쟁기에 고려의 최정예군으로 활약하면서 원에 대해 적개심이 가장 강력했던 집단이었다. 이들의 입장에서 원종의 원과의 강화를 통한 사실상의 항복과 뒤이은 삼별초에 대한 혁파령은 곧 삼별초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개경 환도가 결정되자 삼별초는 ‘배중손’을 대장군으로 추대, 왕족 ‘승화후 온’을 새로운 왕으로 삼고 고려의 환도를 거부해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게 된다. 처음 강화도에 반원정부를 수립한 삼별초군은 이탈자가 속출하자 1천여 함선의 대선단을 꾸려 재화와 백성, 군사들을 모두 싣고 강화도를 떠나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며 남행하여 진도로 거점을 옮기고 항쟁을 벌이지만, 1271년 음력 5월 고려의 장군 ‘김방경(金方慶)’과 원의 ‘흔도(炘都)’가 이끄는 여·원연합군에 의해 9개월 만에 궤멸되고 만다. 이 해에 ‘김통정’은 잔존세력을 규합하여 탐라로 거점을 옮겨 항쟁을 이어갔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일부만 복원된 항파두성 외성과 성 안의 항몽순의비 전경. 박정권은 대몽항쟁의 현장이었던 항파두성이 부족한 정권의 정통성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 항몽유적지로 급조했다.

탐라에 들어온 삼별초는 현재의 애월읍 고성리에 토성(항파두성)을 축조하고 거점으로 삼아 1년 동안 조직 정비 및 방어 시설 구축에 주력하였고, 이후 약 반 년 간 전라도 연안에 대한 군사 활동을 전개하여 그 세력이 충청도와 경기도 연안까지 확대되었으며, 개경까지 위협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1273년(원종 14년) 음력 4월 28일 고려 장군 김방경과 원의 장수 홍다구(洪茶丘)와 흔도가 지휘하는 여·원연합군이 160척의 함선에 1만 여명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략해 옴에 따라 제주도의 삼별초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5월 24일에야 김방경은 조정에 승전을 보고한다. 사태가 수습되는데 근 한 달이 소요됐다.

삼별초군의 거점이었던 항파두성(그 당시는 삼별초성이었을 것이다)이 함락되자 원은 이를 계기로 삼별초를 평정한 두 달 후 제주에 ‘탐라국초토사(1년 후에는 ‘탐라군민도달로화적총관부’로 바뀜)’를 설치한다. 그리고 제주도는 이후 100여 년간의 몽골지배기를 맞기 시작한다.

삼별초의 제주거점화와 여·원연합군의 토벌은 제주도에 있어서는 사상 처음으로 본섬이 외침을 당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본도가 한반도부의 세계사적 상황과 맞물려 의도하지 않은 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섬과 외부와의 피비린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원의 패망기와 탐라: 목호의 난

삼별초 패망 100년 후 제주도에 또다시 온 섬을 피로 물들이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는데 ‘목호의 난’이 그것이다. 목호의 난이란 고려 말 제주도의 목호(牧胡: 몽골에서 온 牧子)들이 일으킨 반란을 일컫는다.

삼별초 토벌을 명분으로 제주를 직할령으로 삼은 원은 직할지배의 관부(官府: 탐라국초토사 - 탐라국군민도달로화적총관부 - 탐라국안무사 - 탐라국총관부 - 탐라군민만호부로 이어짐)를 두고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 관리를 직접 파견해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탐라의 자원을 수탈하거나 주둔 중인 고려군과 원나라군의 유지, 탐라목장의 운영과 양마에 관한 업무 등 군정과 민정을 관할했다. 그들의 수탈은 면포, 가죽, 전마, 전선 등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특히 일본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서의 탐라의 가치는 정벌을 위한 수탈이 항상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이러한 고통은 고스란히 탐라민의 것으로 떨어졌다.

고려 충렬왕 2년(1276)에 다루가치 ‘탑자적(塔刺赤)’이 몽고말 160필을 가져와 섬의 동쪽 평원지대인 수산평에 방목한 것(동아막)을 시작으로 탐라목장이 설치된다. 이듬해 서쪽 평원지대인 고산평에도 설치(서아막)하여 동서목장을 운영하게 되는데, 방목마는 곧 늘어나기 시작했다. 탐라목장에는 말 이외에도 소·낙타·나귀·양도 방목(放牧)했다. 이들 목장에는 ‘하치(哈赤)’라 불리는 원에서 직접 파견된 양마기술자들이 배속되어 말의 사육을 주관했다.

원은 ‘제주’에 대한 고려의 연고권을 지우기 위해 ‘탐라’라 부르고 지배한 반면, 탐라가 고려로 환속되었을 때는 고려 조정에서 다시 ‘제주’라는 명칭을 살려서 관리를 파견했다. 이러한 직할과 고려환속이 반복되면서 제주섬은 원과 고려 두 조정을 섬기는 이중귀속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탐라민들은 양국에 이중의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특히 고려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원의 관리들보다 더할 정도로 가렴주구와 핍박이 극심했다.

이 사이 몽골 출신의 ‘하치’나 ‘몽골군’이 장기주둔하면서 탐라여인과 결혼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몽고족과 탐라여인 사이에 태어난 탐라민들은 점차적으로 그 수가 늘어나는데, 이들은 하치가 되거나 원 직할의 관리 등으로 중용되었고, 점차 탐라에서 중요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해갔다. 탐라사회에서 이들은 이미 주도권을 행사하는 특권층이기도 했다. 또한 인구수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했다. 공민왕대에는 이들만이 모여 사는 마을이 생겨날 정도였다. 이들이 바로 목호세력이다. 목호세력은 원의 지배에 의해 다스려지던 탐라 100년의 역사가 배태한 섬 땅의 ‘작은 몽골’이었다.

   
▲ 고려시대 원의 탐라목장과 현촌의 위치. ⓒ박경훈

원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즉위한 지 두 달 뒤부터 전격적으로 개혁작업에 돌입해 무신정권기에 설치된 ‘정방’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개혁조서를 선포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또한 재위 5년(1356)에는 당시 원나라의 기황후(奇皇后)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奇轍)세력을 역모죄로 숙청하고, 원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 고려 문종 당시의 칭제(稱制)로 환원하였으며, 그동안 내정을 간섭해 온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도 폐지하였다. 또한 100년간 존속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격해 혁파하고 몽골에 빼앗긴 영토를 회복했다. 같은 해 압록강 너머 원나라의 영토를 침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민왕대의 반원정책은 제주도의 목호세력에게 위기감을 몰고 왔다. 100년 동안 누려온 탐라에서의 특권과 안온한 생활의 뿌리가 그들이 떠나 온 원나라라는 대제국이었기에 그들의 영원할 것만 같았던 낙토에서의 생활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위기감은 표독스런 반응으로 나타났다.

탐라의 목호세력은 점차 고려 조정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는데, 공민왕 5년 제주도순문사 윤시우와 목사, 판관 등을 살해해버린다. 공민왕 11년(1359), 초고독불화와 석질리필사가 성주 고복수와 다시 반기를 든다. 공민왕 15년(1366)에 전라도 도순문사 김유가 전선 100척으로 목호 평정에 나서나 목호세력에 패퇴 당한다. 18년(1369)에도 고려 관리를 살해한다.

이 시기 목호들의 본국인 원은 사실상 1년 전에 망하고 북막으로 쫓겨 간 뒤 중원의 새 주인으로 명(明)이 들어선다. 명의 등장은 팽팽하게 대치하던 목호와 고려의 관계에 새로운 조건으로 작용한다. 목호세력의 반기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공민왕 21년(1372), 명(明)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은 고려가 명의 원에 이은 탐라목장의 연고권을 근거로 말 2,000필을 보낼 것을 요구해오자, 고려 조정은 제주의 말을 징발하려고 했다. 목호세력은 또다시 난을 일으켜 간선어마사(揀選御馬使) 유경원(劉景元)과 목사 겸 만호(萬戶) 이용장(李用藏)을 죽이고, 군사 300여 명을 척살해버린다.

공민왕 23년(1374) 명이 사신을 파견해 양마 2천 필을 바치도록 요구해옴에 따라 조정에서는 탐라에 요구했으나,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관음보(觀音保) 등의 목호들은 “세조(쿠빌라이)황제가 방축(放畜)한 말을 어찌 원(元)의 적인 명에 보내랴.” 하면서 단 3백 필만 내주고 만다. 이에 곤경에 처한 공민왕은 최영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삼은 전함 314척, 정예병 2만 5,605인의 탐라출정군단을 꾸린다. 이 군단의 수는 당시 탐라민 전체의 인구수와도 맞먹을 정도의 대군이었다.

목호세력 역시 침공에 대비해 기병 3,000과 수많은 보병들을 명월포에 포진시켜 토벌군단의 상륙에 대비하고 있었다. 고산평의 서아막세력이 주도했다.

동년 8월 28일 명월포에 도착한 최영 군단은 전선 11척의 병사를 먼저 상륙시키나 일거에 몰살당하고 만다. 이에 병사들이 동요하자 비장 한 명을 베어 조리 돌렸고, 군사들은 그때에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목호와 토벌군 사이의 전투는 서아막의 목호 토멸에 이은 석다사만(石多思滿)·조장홀고손(趙莊忽故孫)이 이끄는 동아막 세력과의 전투로 이어지면서 9월 23일에야 종료된다. 전투의 치열함이야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 전투로 희생된 목호 외에도 반몽골족이었던 탐라태생의 목호들과 그들과 혈연으로 연루된 탐라민들 다수가 이 토벌전에서 희생당했다. 4·3이 제주 역사상 최고의 비극이라고 하지만, 인구대비 인명살상으로만 본다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육당한 사건일 것이다.

조선 태종 17년(1417), 제주목 판관을 지낸 하담(河澹)은 40여 년 전 벌어진 당시 전투의 목격담을 탐라민들로부터 직접 듣고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의 변(목호토벌)’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고.

프랑스 제국주의와 제주: 신축민란(이재수의 난)

‘목호의 난’ 이후 500여 년 만인 1901년 또다시 이 섬은 제국주의와 맞닥뜨리면서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이재수 난’이라고 더 알려진 ‘신축제주항쟁’이 그것이다. 천주교계에서는 교인들이 수난을 당했다 해서 신축교난(辛丑敎難)이라고도 한다.

1886년 6월 한불통상우호조약 이후 선교의 자유를 얻은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은 공세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한다. 당시 프랑스 신부들은 조선 국왕이 직접 내린 ‘여아대(如我待-국왕처럼 대하라)’라는 신표를 지니고 다니면서 치외법권을 행사한 존재였다.

1898년 제주도에 가톨릭이 전래되기 시작하였고, 1899년 페이네(한국명: 裵嘉祿) 신부와 김원영(金元永) 신부가 파견되면서 본격적인 전교가 이루어졌다. 그 뒤 1900년 라쿨(한국명: 具瑪瑟), 무세(한국명: 文濟萬) 신부가 들어오면서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었다. 그 결과 제주도의 천주교도는 급증했으나, 이들 중 신앙심과는 무관하게 위와 같은 이점 때문에 개종한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봉세관이 파견된다. 봉세관(捧稅官)이란 국가에서 직접 파견한 세금징수관을 말하는데, 그들의 권한은 막강하였다. 이 두 세력이 결합하면서 이재수 난의 비극의 싹을 틔운다.

   
▲ 이재수 난 당시 관덕정 광장의 민군에 척살된 천주교인들(당시 기록사진), 오른쪽은 강요배 화백 작 '이재수난'. 멀리 프랑스 전함이 제주 앞바다에 들어와 있고, 민군 척후병들이 이를 감시하고 있다. ⓒ박경훈

‘이재수 난’은 두 가지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났다고 알려졌는데, 그것이 바로 세폐(稅弊)와 교폐(敎弊)였다. 세폐는 봉세관 강봉헌이 이미 없어진 민포를 징수하고, 가옥세, 수목세, 가축세, 어장세, 어망세, 염분세, 노위세(갈대세), 잡초세까지 징수해갔다. 또한 징수과정에서 왈짜패 같은 천주교도를 고용하여 징수를 하니 도민들뿐만 아니라 기득권층인 토호들마저 불만이 늘어 갔다. 교폐는 치외법권적 행위로 문제를 양산했다. 일례로 천주교도가 살인을 해도 관리가 이를 체포하지 못했으며, 시체검시도 허용치 않았다. 교인이 남의 부녀를 빼앗거나 윤간을 해도 이를 항의하지 못했다. 이미 판 토지를 다시 필요하면 원가만 지불하고 되팔았고, 사사로이 사설감옥을 만들어 사람을 가두기도 하였으며, 마을의 본향당을 함부로 파괴하거나, 심지어 유배 온 자라도 개종을 하면 빼내가기도 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행태를 보였음에도 천주교 신부들은 교인들의 불법 행위를 보호해 주었으며, 지방 행정까지 간섭하였다. 도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정군 내의 유지들은 1901년 4월 초 교폐와 세폐에 대항할 자위집단인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당시 대정군수 채구석과 나중에 장두가 되는 오대현·강우백 등이다. 상무사가 발족하자 도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대거 가담하게 되면서 상무사와 교인들 간의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그 와중에 ‘오신락’ 노인이 교인들의 고문으로 인해 치사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격돌하게 된다. 처음에는 민회를 개최하고 진정단을 꾸린 정도의 평화적인 신원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천주교도들이 명월진에 진출한 민회를 습격하고 장두였던 오대현을 납치해가고 살상을 하는 등 과잉대응하면서 민란으로 발전한다.

이에 제2차 봉기에서는 관노 출신 이재수가 장두로 전면에 등장하면서 강우백을 동진장으로 임명해 정의현을 돌아 주성으로, 본인은 서진장을 맡아 애월 방면으로 제주성으로 진군, 5월 17일 황사평에 군진을 쳤다. 이에 천주교인들도 제주성의 삼문을 걸어 닫고 항거하여, 양측의 공방전이 이어진다. 하지만 수일간 성내외의 출입이 봉쇄된 상황에 견디다 못한 성안 주민들, 특히 부녀자들이 일어나 5월 28일 성문을 여니 민군이 진입하여 관덕정 광장에서 교인 317인을 척살하고 만다. 이 사이 라쿨 신부는 상해의 프랑스함대에 도움을 청하여, 5월 30일 프랑스 군함 ‘서프라이즈(Surprise)’호와 다른 한 척이 제주항에 입항한다. 6월 2일 뒤이어 강화진위대 병사 1백 명이 입도한다. 이들에 의해 사건은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되는데, 오대현·강우백·이재수 등은 도민들이 제주에서의 공개재판을 거세게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압송 당해, 8월 1일 평리원(최고재판소) 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심리관에는 법부관리 외에 라쿨, 무세 신부와 프랑스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10월 9일 세 장두는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나머지 주동자들은 징역에 처해졌다. 또한 제주도민들은 민란으로 인한 배상금마저 물어내야 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프랑스공사는 대한제국정부에 교당 파괴와 두 신부의 집물보상으로 4,160원, 고용인들의 인건비 1,000원 등 도합 5,160원을 배상금으로 청구했다. 1904년에 삼읍의 도민들이 원리금과 이자를 합쳐 당시 금액 6,315원을 은(銀)으로 물어야 했다. 또한 당시 희생된 교인들의 매장을 위해 민군의 주둔지였던 황사평(현재 천주교 공동묘지)을 내놓아야 했다. 유럽제국 프랑스와 천주교와의 첫 만남은 피비린 것이었다. 최근 ‘남자의 자격’ 합창단으로 히트를 친 노래 <넬라 판타지아>의 원곡인 <가브리엘을 위한 오보에>가 주제곡으로 심금을 울렸던 영화 <미션>. 이 영화는 남미원주민인 과라니족과 스페인 신부들이 앞장선 천주교와의 만남에서 제국주의 정책 앞에 스러져가는 슬픈 원주민의 역사를 다룬 영화였는데, 물론 그쪽이 훨씬 착한 천주교였던 것 같다. 신부들 역시 말이다. 어쨌든 제국주의시대 종교는 제국주의의 첨병이었던 것이다. 제주의 <이재수 난> 역시 제국주의시대 제주도 원주민들의 슬픈 역사였다.

2003년 11월 7일 제주시 열린정보센터 대회의실에서 양측은 악수했다. “천주교측은 과거 교회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동양 강점을 위한 치열한 각축의 시기에 선교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주민중에 대한 과거의 잘못을 사과한다. 제주도민을 비롯한 ‘1901년 제주항쟁 기념사업회’는 봉건왕조의 압제와 외세의 침탈에 맞서 분연히 항쟁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인명 살상의 비극을 초래한 데 대하여 사과한다. 이에 우리는 제주의 후손들로 지난날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 서로 용서하며, 화해를 구하고자 한다.” 천주교 제주교구의 허승조 총대리신부와 ‘1901년제주항쟁기념사업회’의 김영훈 대표가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선언’을 낭독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 2003년 11월 7일 공식적으로 천주교계와 제주도민 사회 사이에 이루어진 102년 만의 화해의 악수. ⓒ박경훈

일제와 결(決) 7호 작전

그로부터 40여 년 만에 제주도는 또다시 세계사의 태풍에 노출된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미군이 공세로 전환하면서 전투는 점차 일본 본토로 접근하여 갔고, 1944년 봄부터는 미군 잠수함이 일본 근해까지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미군이 필리핀에 이어 1945년 2월 이오지마(硫黃島)를 함락시키자 오키나와와 큐슈 등 일본 남서부 지역에 상륙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에 따라 일본의 최고전쟁지도회의인 대본영은 1945년 3월 본토사수를 위한 방어작전을 수립한다.

1945년 2월 대본영의 총사령관은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해 일본 내 6개 지역, 일본 외 1개 지역(제주도) 등 모두 7개 방면의 육·군 결전작전 준비를 명령한다. 이 중 제주도에서의 작전은 결(決) 7호 작전이라 이름 붙여졌으며, 작전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제58군이 1945년 4월 15일 신설되고, 일본 본토의 부대와 만주의 관동군 등 모두 7만여 명의 병력이 4개월 사이에 제주도에 집결하여, 미군과의 결전을 위한 진지를 구축하고 부대를 배치하는 등 결전 준비를 진행했다. 1945년 4월 1일부터 시작된 오키나와전은 83일 만인 6월 25일에 끝나고 마는데, 미군의 일본 본토상륙루트는 규슈북부로 좁혀졌고, 남은 건 제주상륙이었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데 이어 1937년 중국 대륙에까지 진출한 일본에게 제주도는 중국의 상하이[上海]와 난징[南京] 등을 폭격할 수 있는 최단 거리의 전략 요충지였다. 이로 인해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일본 해군 비행장(일명 알뜨르 비행장)이 건설되어 1937년 8월 중순부터 중국 남부를 폭격하기 위한 도양 폭격 기지로 활용되었다. 일본의 상하이 점령 이후 제주도의 전략적 가치는 줄어들었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면서 제주도는 또다시 전략적 요충지로 그 가치가 높아졌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 알뜨르 일본군 항공기지의 잔해. 현재 19기의 콘크리트 격납구조물들이 완강히 버티고 있다. ⓒ박경훈

결 7호 작전으로 인해 제주섬은 곳곳이 몸살을 앓게 되는데, 그것은 방어진지 구축을 위해 수많은 갱도진지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결 7호 작전을 위해 제주도에 구축하거나 구축을 예정했었던 일본군 진지는 모두 104개소 정도였다. 80여 곳의 오름에 갱도진지만도 700여 개라는 조사결과도 있다. 주저항 진지는 서남부 지역의 안덕과 한경, 중앙부의 제주시 등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갱도 진지는 미군이 상륙할 것으로 예상했던 제주도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상루트 상 미군은 남태평양에서 올라올 것이었다. 지금도 해안지역에 입지한 웬만한 오름들이나, 유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성산일출봉, 수월봉, 송악산 등에는 모두 당시 일제가 파놓은 보기 흉한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다.

결 7호 작전은 결국 집행되지 못했다. 미국의 원폭 투하로 무조건 항복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비록 준비 단계에서 종전으로 종결되었지만 제주도와 상황이 매우 비슷했던 오키나와 전투를 보면, 일본군과 미군을 합해 군인 전사자가 8만~15만 명, 현지 주민 전사자가 12만 명 이상으로 도합 2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당시 오키나와 인구는 60만 명 정도였다. 제주도에서 실제 결 7호 작전이 진행되었을 경우 오키나와에 필적하는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가져왔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당시 제주의 인구는 22만 명 정도였다. 인류에게는 재앙이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이 제주도민에게는 축복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비록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오키나와의 비극은 되풀이되지 않았지만, 결 7호 작전을 위한 주민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총 도민수의 3분의 1이나 되는 7만 병력이 갑자기 작은 섬에 투입되면서 도민들의 일상적인 삶도 문제였거니와 제주도민 가운데 징병 적령자는 남양군도로, 나머지는 탄광노무자로 강제징용 당해 떠나버린 상태에서 농민은 식량공출, 노인들은 비행장 건설에, 국민학생들은 송탄유와 주석산 원료채취에 동원되었으며, 1945년 5월 이후에는 소년대·소녀대·부녀대·청년대·장년대로 나뉘어 유격전·공습대피훈련 등 옥쇄작전을 위한 군사훈련에 동원되었다. 우리 민족에게 일제는 돌이킬 수 없는 악행을 저질렀지만, 제주도민들에게는 지옥문으로 끌고 갈 저승사자였다. 제국 일본이 남긴 상처는 오늘도 이 제주섬의 산하에 문신처럼 남아 있다.

   
▲ 일제의 무조건 항복 뒤인 1945년 10월, 제주에 진주한 미군의 지휘 하에 58군 소속 일본군들이 결 7호 작전을 위해 제주에 집결했던 전차들을 해체하고 있는 모습.(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사진) ⓒ박경훈

미국의 세계지배전략과 제주4·3항쟁

절멸을 몰고 올 위기에서 천운(?)으로 벗어난 지 불과 3년 만에 제주도민들은 역사상 결코 반복되지 말아야 할 미증유의 비극적 사건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제주인의 운명과 국가 그리고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4·3이 그것이다. 이번엔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패권국가의 지위를 획득한 미국이었다. 소련과 함께 냉전시대를 열어젖힌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맹주를 우리는 해방과 함께 만나버린 것이다.

강대국들은 언제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아니, 이것은 제국주의시대를 관통해 온 국제사회의 냉혹한 생존법칙이다. 그리고 패권국가들은 약소민족, 국가들에게 우방이나 맹방이라는 표현으로 치장하여 동맹적 관계를 유지하지만, 결국 자국의 이익에 부합될 때만 유효한 관계일 뿐이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미국의 고민은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도전세력이었던 러시아 혁명으로 시작된 사회주의 계열의 확산을 봉쇄하는 것이 주관심사였다. 특히 공산화를 목전에 둔 중국대륙과 동아시아의 사회주의화는 미국의 전후 아시아와 태평양에서의 패권에 대한 거대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속에서 36년간의 악몽 같은 식민상태에서 해방된 조선민중의 상태는 관심 밖의 것이었고, 조선민중들에게는 저승차사 같던 악랄한 친일파들은 그들에게는 잘 조련된 신생 독립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유능한 엔지니어로 보였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남한의 이런 정서와 염원을 무시하고 일체의 주체적 정치활동을 봉쇄한 그들만의 전략적 지도 그리기와 군정의 정책들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거나 광복을 맞은 국민들에게는 또 다른 식민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극심한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제주도도 마찬가지였다.

미군정의 정책은 해방과 동시에 조직된 자치조직과 제주사회의 중도적 인사들에 대한 광범위한 탄압으로 시작되었다. 결국, 모든 주체적 해방조국의 건설에 대한 기대가 봉쇄당한 제주민중들에게 남은 길은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길뿐이었다. 그 첫 충돌은 제주역사의 중심지였던 관덕정광장에서 벌어졌다.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였다. 관덕정 광장에만 3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했던 이날, 미군정의 기마경찰대와 참여군중 사이의 충돌로 시작된 사건은 결국 경찰의 발포로 이어져 끝내 민간인과 초등학생을 포함해 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도화선에 이미 불은 당겨져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1년간 무차별 투옥과 탄압이 폭주한다.

1947년 3월 10일부터 경찰 발포에 항의하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된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도청, 법원, 검찰 등 관공서와 학생들의 동맹휴업과 제주연고의 경찰까지 파업에 동참하면서 3․1발포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사회적 파국을 몰고 왔다. 하지만, 미군정은 도지사를 갈아치우면서 오히려 강력한 탄압으로 맞섰고, 문제는 더욱 곪기 시작했다. 이후 1년간 2,500여 명을 투옥 감금하고 만다. 말 그대로 섬은 아비규환이었다. 곪으면 결국 터지게 되어 있다.

이듬해인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오름마다 봉화가 오르고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의 지휘 아래 350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서 가운데 반을 일제히 공격한다. 4·3항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재수 난’ 때 그러했던 것처럼 ‘탄압이면 항쟁’이라는 구호가 온 섬을 뒤덮고, 단선반대 통일정부 수립을 정치적 구호로 하여 무장항쟁의 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 항쟁의 불길이 온 섬을 쓸고 간 후 무장대 총사령관 김달삼과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사이의 평화회담도 성사되나, 이와는 상관없이 미군정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밀어 붙인다. 미군정에서 시작된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은 이승만 정부 수립 이후에도 이어져 사상 유래 없는 민간인 학살로 이어진다. 비전쟁기간 가장 짧은 시기에 가장 많은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진 참혹한 보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 4·3사건은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3만여 명 이상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항쟁은 짧았고 무력은 미미했으나 뒤이은 탄압은 참혹하고 온 섬은 피로 물들어야 했다.

삼광·삼진작전인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중산간 마을 대부분이 전소되었으며, 20,000여 호 이상의 가옥이 파괴되고 3만여 명의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당시 제주도 인구수는 해방 후 6만 명이 귀향해 와 28만 명에 달했다. 그중 10%가 학살당한 것이다. <제주4·3특별법>에 의한 희생자 신고조사 결과, 사건 발생 이후 6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만 14,0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해방된 자기 땅에서 ‘아름다운 나라’라는 미국을 만난 최초의 경험이 피울음이 진동하는 생지옥,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섬’이었다.
특히 이 사건은 역사상 제주사회에 가장 강력한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이었다. 지금까지도 제주사회는 그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10월 31일 4·3사건을 국가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만행임을 인정하고 국가를 대표해 유족과 제주도민들에 공식사과 했다.

결 - 섬의 운명, 섬의 역사를 더듬는 뜻은

동아지중해의 보석 같은 섬 제주는 앞에 살펴 본 오랜 탐라의 역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세계사의 격변기마다 ‘바람 타는 섬’이 되어야 했다. 이는 어쩌면 섬의 운명이리라. 관광객이라는 입장에서 제주를 찾는 많은 사람들은 제주를 천혜의 자연, 신이 내린 축복의 땅이라고 하지만, 탐라민에서 제주민으로 이어지는 지난한 섬사람들의 삶은 전혀 축복받지 못했음을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진행형인 해군기지 역시 단순히 국토방위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모두 알고 있다. 이는 냉전의 초입 강대국 미국의 대아시아전략 속에서 겪었던 낯익은 데자뷰의 첫 장면일지도 모른다. 미국은 갈수록 영향력이 확대되는 중국의 팽창을 봉쇄하기 위한 초승달 전략에 기반하고 있다. 대양해군정책도 포기된 마당에 지속적으로 제주해군기지건설을 강행한다는 것은 미국의 대중국 대아시아 군사전략의 하나로 추진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제주에 해군기지가 들어선다는 것은 화약고 같은 동아시아의 바다 한가운데 제주도가 거대한 항공모함이 된다는 것을, 군사적 요충지로 제주도가 다시 세계사에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듯이 제주도가 다시 시산혈해의 섬으로 복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제주의소리
늘 그래왔듯이 제주는 또다시 세계 초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피비린 역사의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는 제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해군기지가 반드시 들어와야 한다고 하고, 해군은 평화와 무력의 공존과 지역발전을 이야기하면서 매우 폭력적 방법으로 기지 건설을 강행하고 있다. 4·3 이후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타들어가던 불바람이 그친 지 겨우 60년이 지났을 뿐인데, 왜 이리 어렵게 맞은 평화의 시간을 세치 혀로 경제발전이니 애국이니 하는 말을 뱉으면서 깨버리려 하는지, 좀 더 진중하게 우리들의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들이 대를 이어 살아 온 이 땅이 왜 힘의 각축장이 되어서는 안 되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지나온 세계화의 경험과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은 결국 시산혈해의 풍경만을 역사에 남겼다. /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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