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한짓골에서 따산즈(大山子)를 본다

인민의 공장에서 예술의 팩토리(Factory)로

중국 북경시 북서부 외곽지역에는 ‘따산즈 798’이라는, 이제는 세계적인 과거의 공장지대가 있다. 물론 공장지대의 건축물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과거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은 죽의 장막의 시대였던 마오의 시대에는 영광의 노동 현장이었으며, 인민의 공장지대였다. 이곳의 지명이 따산즈(大山子)였으며, 그곳의 공장번호가 798번이었던 탓에 그 자체로 ‘따산즈 798’이라는 트렌드가 되었다. 이 이름은 이미 세계적이다. 인민의 공장이 예술의 팩토리로 바뀐 것이다.
 
이곳은 현재 ‘798 예술구’ 혹은 ‘따산즈 예술구(大山子 藝術區)’라고 불리지만 전에는 ‘718 롄허창(聯合廠)’이라고 하던 지역으로 798, 797, 718, 707, 706 등 칠자 돌림의 여러 개의 국영공장이 모여 있던 공장지대였다. 따산즈(大山子)는 이들 공장이 있던 지명이다.

▲ 1따산즈의 여러 표정들. 바우하우스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모더니즘 건축물들이 집적된 경관은 퇴락한 공장지대의 이미지와 새로운 예술활동의 역동성이 만나 따산즈만의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박경훈

이들 공장은 지난 1950년대에 구소련의 원조로 지어진 것인데, 소련이 독일한테서 받은 전쟁배상금을 기초로 구 동독이 설계와 건축을 책임지고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공장의 정식 명칭은 ‘북경화북무선전련합기재창(北京華北無線電聯合器材廠)’, 줄여서 ‘718 롄허창(聯合廠)’은 1957년 10월에 문을 열었다. 공장건물은 독일의 설계로 이루어진 바우하우스 양식이다. 공업생산과 생활수요에 적응하도록 건축기능, 배치 등을 적절히 고려한 것으로 건축사적 의미가 있는 것들이다. 여기에서 중국 최초의 원자탄과 인공위성의 핵심적 부품이나 전기·전자 부품 등이 생산되어, 이곳은 가히 ‘신중국 전자공업의 요람’이라고 불리던 지역이었다. 그러니까 당시로서는 중국의 최첨단공장지대였던 셈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시작된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은 역설적으로 북경의 이 전설적인 공장지대의 쇠락을 불러 오게 된다. 한때 2만 명이 넘던 798공장의 노동자들도 대량으로 실직하게 된다. 단지 내 공장들은 조업이 중단되고 기계들은 해체되었다. 한때 중국사회주의의 상징이었던 따산즈는 그 후 개혁·개방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20여 년간 폐허로 방치되고 말았다. 그러다 1996년 중앙미술학원 조소과에서 이곳의 한 창고를 임시 창작실로 빌렸는데, 이 일이 798공장이 공업지구에서 예술지구로 변화하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000년 중국 중앙미술학원의 ‘쑤이지엔궈(隋建國) 교수’가 방치된 공장의 창고를 임대하여 작업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2001년에는 디자이너 ‘린칭(林菁)’, 출판업자 ‘홍황(洪晃)’, 음악가 리우쑤어라(劉索拉) 등이 잇따라 거주지를 이곳 공장으로 옮겨왔다. 또한 2002년 중국현대미술을 외국에 알리는 데 앞장섰던 미국인 로버트 버넬(Robert Bernell)이 쑤이지엔궈 교수의 소개로 이곳으로 옮겨 ‘예술서점’을 운영하면서부터 이 서점을 오가는 예술가들에 의해 북경의 가난하고 젊은, 새로운 예술에의 열정을 가진 예술가들이 자연스레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장주인 ‘칠성그룹’은 이 공장지대의 임대를 유휴공장의 재활용이라는 단순한 취지에서 시작했지만, 이곳으로 몰려든 예술가들의 집단적 거주와 활동은 그룹과 시정부의 공장활용 구상에 전면적인 변화를 초래케 했다. 따산즈가 속해 있는 차오양구(朝陽區) 정부와 칠성그룹은 공동으로 베이징 798 예술구 건설관리사무실을 설립하고 ‘조율, 서비스, 인도, 관리’를 목표로 예술구의 문화창의산업 발전을 추진하고 있다.

2007년 북경시 기획위원회와 문물국은 <제1기 근·현대 우수 건물 보호 명록>을 발부했는데, 그중에 798 공장도 포함시켰다. 규정에 따르면 보호 목록에 선정된 건축물은 철거하지 못하며, 개조할 경우 심사비준을 거쳐야 하고 외관의 전체적 풍격을 고쳐서도 안 된다. 따산즈의 건축물들을 문화재로 승격시킨 것이다. 녹슨 공장이 예술가들의 정주와 활동으로 인해, 보존되어야 할 문화유산으로 승격된 셈이다.

2003년 미국 주간지 <타임>지는 가장 높은 문화 상징성을 띤 세계의 22개 도시예술센터에 798 예술구를 포함 선정했다. 같은 해, 북경도 사상 처음으로 <뉴스위크>지에 12강 세계도시에 선정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798예술구가 황폐한 옛 공장구역으로부터 문화구역으로 변화한 사실도 한 몫을 했다. 2004년 미국 <포춘>지에 세계에서 발전성이 있는 세계 20개 도시 중 하나로 선정됐는데 입선 이유 역시 798 때문이었다. 따산즈는 예술구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공장지대 전체의 건축사적 가치 또한 세계건축사상 보기 드문 사례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북경시는 따산즈 예술구의 이런 저력을 눈여겨보았다. 2006년 1월 5억 위안(약 600억 원)의 예산을 배정해 따산즈 예술구를 ‘문화창의산업특구’로 공식 지정했다.

▲ 2국내에선 보기 힘든 사회주의 유산들은 이미 ‘지나간 문화’로서 한낱 키치로 전락해버렸다. ⓒ박경훈
‘따산즈 798 예술구’가 점차 세계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이곳은 자금성이나 만리장성과 함께 외국인들의 북경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관광지가 됐다. 이곳에서는 늘 중요한 국제예술전람회, 예술행사와 패션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많은 국가의 정계요인, 영화TV 스타, 유명인사들도 북경에 오면 798을 찾았다. 해외의 수반이나 유명인사들 역시 이곳을 방문했는데, 독일 슈뢰더 전 총리, 유럽집행위원회 바로소 의장, 프랑스 시라크 전 대통령,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국제올림픽위원회 자크 로게 위원장 등이 798 예술구를 다녀갔다.

798 예술구는 많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다. 북경에서 활동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이곳은 매우 훌륭하고 귀중한 플랫폼이 되고 있다. 인근의 중앙미술학원 등 차세대 인프라와 주변의 지우창, 쑹창 등의 배후권역은 이곳이 지속적으로 활력을 유지하게 해주는 자산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이미 300여 곳의 갤러리와 작가 스튜디오, 서점, 카페 등의 문화인프라가 갖추어진 따산즈는 그 자체로 예술의 공장으로 성공적인 진화를 마쳤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미 미술을 중심으로 한 예술클러스터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전 세계로 열린 인프라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몰려드는 예술가들의 창작과 교류에 더없는 호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 3어떤 골목은 마치 잘 정비된 예술의 거리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요즘 우리나라의 문화의 거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시간의 더께가 얹혀 있기 때문이다. ⓒ박경훈
한국에도 제도적으로 문화의 거리나 문화예술진흥지구 육성을 위한 법적 장치가 만들어져 있으나, 모두가 누더기법안이 되어서 정작 문화관련 공간을 조성하는 데 오히려 장애로 작용한다고 할 정도이다. 중국의 사회주의권력은 예술의 유용성과 사회에서의 필수불가결함을 잘 이해하고 있는 두뇌집단들이다. 과거 사회주의 혁명기에는 예술의 프로파겐더를 활용하여, 전 인민이 사회주의 건설에 동참하게 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했던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기에 마오는 연안문예강화라는 좌담을 통해 설파했듯이 예술과 혁명, 계급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통찰력 있는 이론을 지니고 있었을 정도였고, 주은래는 풍부한 역사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예술에 대한 조예 역시 깊었다. 그들은 엘리트일 뿐만 아니라, 예술애호가이기도 했다. 여기에 한국의 졸부자본주의와 군사쿠데타권력의 후계자들과의 문화적 수준의 차이가 확연해진다. 이러한 국가의 정책 결정담당자들의 수준 차이는 실제 도시개발과 거시적인 정책 수립 시에 크나 큰 차이를 노정한다.

▲ 4작가의 작업실이나 화랑의 전시관 그리고 약간의 책방과 카페 그리고 팬시점들이 이곳의 상업시설의 전부이다. ⓒ박경훈

우리의 경우 대도시의 재개발구역엔 고층아파트와 땅 투기가 판을 치지만, 북경의 재개발구역에는 예술가, 작업실, 전시장, 화랑이 입주하게 되는 예술특구가 6개 지역이나(따산즈의 경우만 해도 3만여 평이다. 최근 치솟고 있는 북경지역의 땅값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수준이다.) 된다. 즉, 중국의 도약에는 단순히 자본주의 따라하기가 아니라, 이미 과거에 세계문화의 중심이었던 영광의 기억과 프라이드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으로 축적된 예술에 대한 태도는 개혁·개방이 밀어 닥치면서 형상복원 소재의 제품이 원래의 상을 복원해 내듯,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 차원의 투자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즉, 기본적으로 권력의 성격과 상관없이 정신적인 인프라가 있었다는 얘기다. 이는 마치 2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과 일본이 패전 후에도 전쟁 전의 발전된 공업국가의 기틀을 단숨에 회복하는 것과 같다.

즉, 중국사회주의혁명의 새로운 전통도, 실상은 과거부터 이어져 온 중국의 문화적 역사성의 고로(高爐)에서 녹여내고 있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빈이나 프랑스의 파리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현대미술은 2차 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건너간 이후 오래도록 그 주도권이 구대륙으로 넘어오지 않았으나(물론 영국의 경우 YBA의 열풍으로 제2의 메카로 떠오르기는 했으나), 현재의 북경을 보면 이제 그것이 구대륙으로 넘어오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1세기 전 서세동점의 주축국들의 먹잇감이었던 그 늙은 대륙으로 말이다. 중국의 고색창연했던 문명의 중심지 역할의 부활을 우리는 지금 막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그 사회 성격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문명의 주도권을 돌려받으려는 의지가 역력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표징이 바로 ‘따산즈 798’인 것이다. 최근 도시의 가치와 도시 발전의 모델로 창조도시를 으뜸으로 친다. 관광산업이 또 다른 산업으로 각광 받으면서 역사문화도시를 으뜸으로 쳤으나, 그를 넘어 창조계급이 몰려드는 ‘창조도시’가 최고의 모델로 각광받는 것이다. 따산즈는 바로 도시재생의 전형적인 모델이면서, 예술이 중심이 된 창도조시로서의 면모를 스스로 갖추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의 창조도시들이 엄청난 국가적 재원과 정책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과 달리, 따산즈는 북경의 예술가들의 열정이 자연발생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만들어 낸 자생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창조도시들과도 다른 운명을 예고한다.

폐공장에서 시작된 따산즈는 현재 포화상태가 되어 인근 지역인 ‘지우창(酒廠)’으로까지 그 범역이 확대되고 있다. 처음엔 싼 값으로 임대했던 따산즈의 작업실들은 이제 국제적 예술구로 도약해, 임대료도 천정부지로 올라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 여파로 몰려드는 작가들은 주변으로 예술구를 확장시켜나가고 있다. 중국의 미술시장이 급격히 확장하면서 규모는 798지역에 못 미치지만 다양한 성격의 예술거리도 베이징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차오창디(草場地)나 지우창(酒廠)와 함께 바이쯔완로(百子灣路) 등에도 현대적인 예술거리가 조성되고 있다.

제주 유일의 전통적인 문화예술의 거리, 나문 한짓골

한짓골, 제주시 구도심권의 가장 오래된 지명의 하나이기도 한 동네와 골목의 이름이다. 애초의 유래는 조선시대부터 유래한 것으로 한질(大路)이 있는 동네, 특히 나문 한지골이라 불렸다. 즉, 제주성의 남문과 이어진 큰길이 나 있는 동네라는 의미에서 불린 이름인 것이다. 앞서 중국 북경의 따산즈를 이야기했지만, 더 정확히는 제주의 유리창이라 부를 만한 곳이다. 이 골목은 남문로터리에서 관덕정 광장에 이르는 총연장 370m의 작은 골목이다. 하지만 문화사적으로 본다면 이 골목은 제주에서도 가장 오래된 문화전통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한짓골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성은 3개의 성문과 두 개의 수구를 두고 조성되어 있었는데, 그중 성문이 있는 곳과 성의 중심부인 관아로 향하는 길은 큰 길, 즉 ‘한 길’이 있었다. 이 중 한짓골은 목관아에서 남문에 이르는 한 길가에 있었던 마을을 이르는 것으로 나문 한짓골(남문 한길골), 줄여서 한짓골이라고 했다. 한질은 보통 성문을 통해 성안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인해 늘 인파가 붐비는 곳이었으며, 주로 상권이 형성되는 곳이기도 했다. 또한 한짓골은 가운데쯤서 이아골과 만나게 되는데, 이아골의 지명은 목사가 집무하는 목관아를 상아(上衙)라고 부른데 반해 판관의 집무처를 이아(貳衙)라 부른데서 기원했다. 상아가 군사, 호적, 조세 등의 업무과 관련된 건물들이 부속되어 있는데 반해, 이아에는 각종 공방(工房)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각종 상공과 관련된 활동이 활발했다. 당시 제주목 내에서는 가장 활발한 경제활동과 문화활동이 이루어졌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곳에는 1899년에 천주교제주교구 최초의 본당이 들어서면서 포교의 거점이 된다. 이후 이재수 난을 거치지만, 신성여학교가 설립되는 등 서양문화가 도입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 5제주성 남문 전경(좌)과 탐라순력도에 나타난 이아와 상아(우) ⓒ박경훈

일제시대에 제주시의 경관은 일제의 신작로공사에 따라 일주도로와 직선상에 놓이는 동문과 서문을 잇는 원정통이 들어서면서 현재까지 이르는 동서경관이 완성된다. 그 결과 주 상권이 동문로와 원정통 서문로로 이어지는 라인을 축으로 형성되고 산지항이 확장되면서 불신작로와 칠성통 등이 활기를 띠게 된다. 하지만, 한짓골은 제주시 북쪽의 물산과 인구의 교통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활발한 경제와 문화활동이 이루어진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육지부에서 피난 온 수많은 예술가들의 거리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수많은 예술가들을 제주로 내몰았다. 이 시기에 제주는 과거 유배의 섬이었던 조선시대만큼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입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만난 제주와의 인연이 제주의 현대예술의 여명기를 장식하게 한다. 피난민들 속에는 문학, 음악, 연극영화인, 연예인들이 있었다. 문학인 박목월, 계용묵, 미술인 이중섭, 장리석, 홍종명, 최영림, 김창열, 연극인 김묵, 김구량, 등등 쟁쟁한 중앙예술판의 작가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들은 제주시, 서귀포시, 모슬포 등에 거주하면서 어떤 이는 중등학교 교사로, 또 어떤 이는 시내에 화실을 차려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였으며, 칠성로와 이 골목 등에 거주하면서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고, 예술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이곳에서 제주의 청년들에게 예술의 맛을 맛보게 하기도 했다. 

▲ 6왼쪽은 구 제주MBC 건물 오른쪽은 맞은 편 건물인 과 구 소라다방 건물. 2층에 소라다방이 3층에 제주도 최초의 사회과학 서점인 ‘사인자’서점이 있었다. 80년대만 해도 이 곳은 가장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서 분주한 거물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최근에 돌아본 이 건물들은 이미 쇠락할 대로 쇠락해 소라다방 건물은 70, 80년대의 화황은 간데 없고 1층을 빼고는 이미 폐허에 가까운 상태였다 ⓒ박경훈

1970년대에 이곳은 골빈당과 소라다방의 시대였다. 지금은 제주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로 성장한 문무병(민속학자), 김상철(전 민예총사무총장), 고희범(전 한겨레신문 사장), 고충석(전 제주대 총장), 강창일(국회의원) 등이 골빈당(너무 쓸데없는 지식들이 들어차서 머리를 비워야 한다는 의미에서) 멤버들이다. 그들은 이 골목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물론 치기어린 당원들(?)의 성화로 고문으로 모셔진, 한라산의 식물과 섬의 동굴들, 고고학자, 음악애호가, 사진가, 산악인으로서 선구자였던 부종휴 선생 역시 이곳이 단골이었다. 당시 칠성로나 원정로 쪽이 주로 문화계 장년층의 거점이었다면, 한짓골은 청년들의 거점이었다. 특히 그 중심에 소라다방이 있었는데, 소라다방은 단순히 차만 마시는 곳이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소위 복합문화센터였던 셈이다. 그 당시는 미술관이 없던 시절이라 미술전이나 사진전 등은 대부분 이 다방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음악감상실이 있어서 음악감상회도 열리곤 해서 이곳은 소위 치기만만하던 문학청년들의 소굴이면서 예술가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소라다방 앞 2층 건물은 1968년 개국한 남양문화방송이 있어서 방송인들이 들락거리기도 했다. 중앙천주교회와 신성여고가 함께 입지했던 곳에서는 밤이 되면 신자들이 몰려들었으며, 학교에선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밤이 되면 골목마다 술자리가 펼쳐지고, 문학과 예술에 목마른 청년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곤 했다.

1980년대 이곳은 다시 한 번 진보적 청년문화의 거리가 되는데, 바로 이 골목에 그 유명한 사회과학서점인 사인자와 대동서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돌소리 노동상담소와 제주문화예술운동연합(건)이 이 골목에 자리를 트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막걸리문화로 대변되는 학사주점들이 대거 이곳에 몰려 있었다. 특히 먹거리집(후에 장터)과 백록골은 학생들과 청년들의 단골집이어서 이 골목에서는 소위 운동가요가 그치는 날이 없었다. 80년대 젊은 혈기와 열정들이 이곳에서 타올랐고, 어떤 날은 중앙로 원정로로 진출해 군부독재와의 한 판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그 중심에 중앙성당이 있어서 분출하는 민주화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한짓골 바로 옆 골목이었던 우체국 건너편의 동인빌딩에는 소극장 수눌음과 동인갤러리가 있었는데, 수눌음 소극장은 80년대 암울했던 시대에 저항의 기치를 올렸던 수눌음운동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극단 수눌음은 제주도에서의 본격적인 문화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이 수눌음운동에서 시작된 제주의 문화운동은 87년 6․10민주항쟁을 거치면서 민주화운동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또한 동인갤러리 역시 당시 미술전시로 늘 붐볐던 곳이기도 했다.

공동화에 쇠락한 채 재생의 손길을 기다리는 문화의 거리

하지만, 이 100년에 가까운 문화예술의 거리도 지속적으로 확장해나가는 제주시 도시개발과 빠져나가는 상권의 썰물을 견뎌내지 못하고 90년대 들면서 퇴락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대낮에도 빈 가게들이 줄이어 있으며, 밤이 깊기도 전에 거리는 컴컴해지고 불빛마저 흐린, 말 그대로 슬럼화된 도시의 종말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극심한 도심공동화에 시달리고 있다.

그동안 필자는 여러 자리에서 한짓골을 문화예술의 거리로 살리자는 제안을 한 바 있으나, 아직까지도 이를 귀담아 듣거나 정책으로 옮기려는 행정가를 만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의 조례로 문화의 거리 조례가 2007년에 제정되어 있다. 당시 조례제정을 위한 토론회의 발제를 맡았던 필자는 혹시나 한짓골이 이 조례에 힘입어 재생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기대를 했었으나, 한짓골은 주목받지 못하고 말았다. 해당 지역구의 도의원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지금도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는다. 결국 문화의 거리는 엉뚱한 곳으로 가면서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 7한집 건너 폐점인 점포들과 70년대 영화세트 같은 한짓골의 전경 ⓒ박경훈

어떤 공간을 지정해 이를 문화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은 단순히 아무개거리를 지정한다고 해서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장소가 본래 지니고 있는 인프라가 중요하다. 그 인프라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장소성인데, 장소성은 다름 아닌 그 장소가 가진 역사성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으로 치면 육체의 기억 같은 것이다. 몸에 새겨진 기억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바로 그 도시, 골목과 골목의 육체적 기억을 살려내는 것이 바로 문화의 거리의 지정 취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제주도에서 진정한 문화의 거리는 한짓골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한짓골에 새겨진 100년의 시공간적 기억이 있기 때문이며, 그만큼 큰 자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의 따산즈의 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금 찍어낸 콘크리트 블록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더께가 쌓인 역사성에서 전체 경관의 이미지가 예술적 분위기를 뿜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 한짓골만큼 시간의 더께와 3세대에 가까운 추억과 역사를 간직한 곳이 드물다. 아마도 후에 세대가 나뉜다면 한짓골 세대와 시청세대로 나뉠지도 모르겠다.

▲ 8퇴락한 구 제주대병원(좌)과 문을 닫은 아카데미 극장 ⓒ박경훈

김병립 제주시장은 지난 달 간부회의에서 도심재생사업과 별개로 옛 제주대병원지역의 활성화방안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특히 김 시장은 활성화방안 가운데 하나로 제주고유의 음식을 판매할 수 있는 토속음식점을 유치하고, 죽공예와 삿갓, 탕건 등 전통공예품 기능보유자들이 직접 제품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는 전통 특화거리를 조성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며, 이에 따라 제주시는 “전문가 자문과 연구용역 등을 통해 사업 타당성을 검증한 뒤 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제주대학교나 제주특별자치도가 답을 내지 못하고 시간만 끄는 사이 구제대병원은 흉물로 전락해가면서 청소년 탈선현장과 각종 생활쓰레기 투기장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병원 건물 일대의 상권 침체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시장의 이런 행보는 구도심의 도시재생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것으로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또한 못내 아쉬운 것은 좀 더 큰 그림 속에서 제주대학병원 문제나, 지역상권침체 문제 더 나아가 구도심권 도시재생 문제로 인식을 확장했으면 하는 일이다. 특히 제주시의 관계자가 연구용역을 통해 답을 구하겠다고 했는데, 현재 구도심권과 관련해 작성된 용역보고서만 필자가 아는 바로도 4~5종은 족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히려 용역보다는 전문가 TF를 구성해 그동안의 대안들을 검토하고 살릴 것을 취하여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아쉬움의 중심에 한짓골이 있다. 필자는 한짓골을 살리면 구도심이 살아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낱 폐공장에 불과했던 따산즈가 예술가들이 정주하고 예술활동이 활성화하면서 새로운 세계적인 예술의 메카로 성장해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왜 우리는 이 한짓골을 방치하고 있어야 하는지 안타깝기 때문이다.

한짓골을 구도심 도시재생의 심장으로 활용하자

한짓골에 사람이 흐르면, 구도심이 잠에서 깨어난다. 주지하다시피 한짓골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흐르게 할 수 있는 여건이 있다. 우선 남에서 북으로 길게 난 도로의 양측으로 과거엔 성업했던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또한 골목의 중간 지점엔 중앙로와 구 제주대병원 그리고 병문천 복개도로를 관통하는 십자교차로가 있으며, 여기에 젊은 층을 흡수할 수 있는 아카데미 극장과 유서 깊은 천주교 중앙성당이 입지해 있다. 그리고 이 골목의 북측 끝은 목관아, 칠성로 입구, 지하상가 등과 동시에 연결되는 이동의 허브공간이다.

현재 골목 전체는 일방통행으로 차량이동을 허용하고 있으나, 이곳을 차 없는 거리로 지정, 도보 중심의 골목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또한 골목과 연접한 좌우의 1층 상가들은 문화카페, 전통찻집, 화랑, 전시장, 서점, 음반가게, 각종 공방 등 문화 관련 업종들이 입주하게 하고, 지하층은 락카페, 전시장, 소극장 등이, 2층과 3층의 경우, 작가들의 작업실을 입주하게 하여 기본적으로 주동선 상의 상가와 건축물의 입주자들을 문화예술과 관련된 사람들이 입, 거주하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행재정적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현재 빈 가게나 임대건축물을 공공자금으로 장기임대 등을 통해 리모델링하고 문화 관련 희망입주자에게 임대하는 방식이나 비어 있는 건물들을 매입하여 공공임대를 통해 수요자들에게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 9한짓골 위성사진. 노랑부분이 1차적인 리모델링 대상구역이다. 이곳이 문화적인 시설들과 점포들이 들어서면 녹색부분의 지선골목들은 자연히 그에 따른 다양한 상가가 형성될 것이다. ⓒ박경훈

또한 이곳의 주 건축물의 하나가 구 제주대병원건물인데, 그동안 제주대학교나 제주특별자치도나 재활용에 대한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장기간 표류하는 동안에 건물의 퇴락은 물론 가출청소년이나 노숙자들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어 이 구역 슬럼화의 주범이 되어가고 있다. 이 건축물을 예술인 레지던시(residence란 거주, 거주지 등을 뜻하는 단어인데, 특정 지역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머물면서 작업을 하거나 문화체험, 전시 등의 활동을 하는 프로그램)빌딩으로 활용하여, 제주작가 30%, 국내작가 30%, 해외작가 30% 비율의 레지던시 프로그램 공간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그들 스스로 국제적인 문화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굳이 국제화니 세계화니 할 것 없이 스스로 국제적인 교류활동들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병실들을 작가들의 스튜디오로 리모델링해야 하며, 그와 함께 공용시설로 소규모 전시장, 세미나실, 자료실 등의 지원시스템을 갖춘다면 명실상부한 국제자유도시 제주의 최대·최고의 국제미술교류의 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시설이 갖추어진다면 제주의 청년작가들과 국내외의 많은 작가들이 레지던시 입주를 희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왕성한 작가활동을 하게 되면, 한짓골의 화랑이나 전시관들이 활성화되게 될 것이며, 이곳은 언제나 예술가들이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주공간이 될 것이다. 또한 현재 휴관 중인 아카데미 극장 역시 이곳에 사람들이 들끓기 시작하면 다시 재개관이 이루어지면서 한짓골 전체 상권을 살리는 데 일조하게 될 것이다.

한짓골의 부활은 단순히 총연장 370m의 퇴락한 골목길의 부활이나, 추억의 공간 살리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짓골의 부활은 곧 주변상권의 재생으로 이어지는 키워드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한짓골의 주도로에 문화예술 관련 시설들이 들어서게 하고, 이곳이 문화예술가들이 거주·활동영역이 되면 각 지선도로인 골목들에는 자연스레 그들이 선호하는 카페나 먹거리집들이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서울의 인사동이나 따산즈의 골목처럼 자유분방한 예술가들과 이를 선호하는 시민들이나 대학생들의 발길이 이어지게 되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이곳은 국제자유도시 제주의 가장 중요한 도심관광명소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곳과 연계되어 있는 목관아와 칠성로 그리고 지하상가도 이 활기에 힘입어 매력적인 도시관광의 쇼핑코스가 될 것이다. 여기에 산지천이 새롭게 탈바꿈된다면 구도심 전체의 상권이 살아나는 것이다.

▲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제주의소리
필자의 이러한 제안이 단순히 개인적인 아이디어의 수준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용역만 남발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100년의 자산은 이미 쇠락해가고 있으며, 한때 제주도 최고의 공간이었던 구도심은 공동화의 나락에서 신음하고 있다.

중국의 따산즈는 버려진 폐공장이었지만, 그들은 이곳에 대규모의 아파트단지를 건설하는 대신, 그곳의 문화자산으로서의 가치에 주목했다. 그 결과 자발적인 예술인촌을 세계 최고의 예술특구로 성장시켰고 그들은 성공했다. 그리고 따산즈는 그 몇 배의 가치로 그 안목과 노력에 보답했다.

100년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한짓골, 그 조그만 골목이 구도심권의 새로운 심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과 정책적 의지가 한짓골을 제주의 따산즈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 결과 한짓골은 구도심 전체의 생동감 있는 재생의 에너지로 답할 것이다. /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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