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70)대정 안성리 수월이물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수월이못 전경 ⓒ김순이

대정읍 안성리에는 조선시대 후기, 인공으로 조성된 큰 못이 있는데 수월이물이라 부른다. 기녀였던 수월이가 기부하여 조성된 못이어서 붙은 명칭이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평생 모은 돈으로 땅을 사서 이 못을 만들도록 희사했다.

제주여성이 하는 가사일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은 물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나마 해안가 마을에서는 솟아나는 시원한 물을 썰물 때에 맞추어 길어오기만 하면 되었다. 중산간 마을인 경우, 우물이 없었다. 대신 빗물을 받아 고이게 하는 물통이 있었고, 올챙이나 장구애비가 헤엄쳐 다니는 그 물을 길어다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안성리는 대정현성의 동쪽에 형성된 마을이다. 수월이는 젊은 시절에는 관아에서 수청을 드는 기녀였으나 나이가 들자 마을 끝에 작은 집을 지어 살았다. 지금도 수월이물 동북쪽에는 수월이, 해주오씨 입도 3대조 독검할아버지, 원씨 등이 살았다는 집터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 기녀의 가장 주된 임무는 관리의 수청을 드는 일이었다. 그 중에 병을 치료하는 의기(醫妓), 의복수발을 담당하는 침기(針妓) 등은 존중 받았으며 나이가 들면 관아 밖에 나가 살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수월이는 며칠에 한 번 말을 타고 관아에 오갔다는 것으로 보아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침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의복이 완성되면 관아에 가져가 바치고 다시 일감을 받아가지고 와서는 바느질을 했을 것이다.

그녀가 말타기를 즐겼다는 점은 또 다른 추측을 하게 한다. 제주목에는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말과 혼연일체가 되어 고도의 기마술(騎馬術)을 구사하던 기녀 집단이 있었다. 어쩌면 수월이는 젊은 날 이름을 날리는 기마술의 최고 달인이었고, 그 공로로 나이가 들자 은퇴하여 밖에서 살 수 있게 되었던 건 아닐까.

수월이는 물 긷는 고통을 아는 여성이었다. 가뭄이 들어서 물통이 마르면 여성들은 물허벅을 등에 지고 마소떼를 몰고 마른먼지가 뿌옇게 날리는 자갈길을 걸어 해안가로 향해야 했다. 그런 장면을 그녀는 수없이 목격했을 것이다. 그래서 늙어서 기녀를 그만두게 되자 모아둔 돈을 내어 습지를 구입하였다. 자신의 노후자금을 탈탈 털어 물의 고통, 목마름의 절망으로부터 마을사람들을 구제한 그녀야말로 보살이고 천사이다. 한 여성의 아름다운 마음이 이렇게 물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수월이물은 비교적 큰 못이고 수량도 풍부하다. 사람은 물론 인근의 마소들도 저녁이면 몰려들어 싸움 없이 실컷 물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 넉넉한 마음이 읽힌다. 사람이 사용하는 물통은 돌을 둘러서 안경처럼 두 곳을 만들었다. 남성용과 여성용 2개의 물통을 설치하는 이유는 식수공급과 빨래터이기도 하지만 목욕통을 겸하기 때문이다. / 김순이

*찾아가는 길 - 안성리 대정성문 옆길 → 한라산쪽으로 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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