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근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삼별초를 만난다

[제주시 외도동②] 옛 사람들 풍류와 해학이 묻어나는 도근천

2008-09-26     장태욱 시민기자
▲ 월대천 도근천이 바다와 만나기 전에 깊은 연못을 이루는데, 사람들을 이 곳을 월대천이라 부른다.
ⓒ 장태욱

제주시 서쪽에 있는 '외도동'은 도근천의 바깥이란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 근처에서 발원한 도근천은 외도동에서 바다에 이르기 직전 큰 연못을 형성한다. 사람들은 이 연못 주변에 월대를 만들었기에, 그 연못을 월대천이라 부른다. 월대천은 이 지역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이나,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주민들이 풍류를 체험하는 공간이다.

도근포, 삼별초가 전리품 들여오기 위해 만든 포구

도근천이 월대를 지나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포구가 만들어졌는데, 이 포구를 도근포라 부른다. 도근포는 삼별초의 항쟁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삼별초는 1270년 고려관군을 격파하고 탐라를 장악했다. 지금의 애월읍 고성리에 병사들과 주민들을 동원하여 항파두리 토성을 쌓고 그곳에 궁궐을 지었다. 성을 쌓는 일이 진행되는 동안 주민들과 병사들은 식량이 부족해서 기근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소설가 오성찬이 쓴 기록이다.

역사를 하는 동안 삼별초는 동원된 인부들의 식량을 대노라고 했으나 어떤 때는 그것이 원만치 못했었던 듯 이런 후일담이 전해온다. 고된 노동에 굶주려 배가 고팠던 인부들은 똥을 싸놓고 그걸 다시 먹으려고 돌아다니다보면 어느새 다른 사람이 먹어 버렸더라는 웃지 못 할 이야기였다. - <아아, 삼별초> 중 일부

병사들과 주민들에게 먹을 식량을 공급하는 것은 삼별초 지휘부에게는 탐라를 수비하는 것 못지않은 중요한 과제였다. 결국 삼별초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남해안 일대에 관아와 고려 관군의 기지를 기습하였고, 또 관아에 보관된 식량이나, 세공선이 운반하는 식량을 탈취하여 제주도로 운반하였다. 1272년(원종 13) 고려 이유비가 원에 보낸 글을 보면 당시 삼별초가 고려조정을 얼마나 공포에 떨게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도근포 삼별초가 도근포로 사용했던 포구다.
ⓒ 장태욱

탐라의 역적들이 금년 3월과 4월에 회령·함포·해남 3현의 포구를 침공하였고, 5월에는 회령· 탐진· 2현을 공격하였습니다. 무릇 전후하여 약탈당한 선박이 25척, 양곡 3천 2백여 석, 피살자 12명, 납치자가 24명입니다. 노효제라는 자가 역적에 붙었다가, 14일 만에 도망 와서 말하는데, 역적은 390명이 11척에 나누어 타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공미 운반선박을 빼앗고자 연안 포구를 공격한다고 합니다. 장차 전라도의 전선 만드는 곳을 침공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렇게 탈취한 전리품들은 도근천 하류에 있는 도근포를 통해 항파두리성으로 운송되었다. 삼별초는 이 포구를 조공포(朝貢浦)라 불렀는데, 훗날 제주사람들이 '조공(朝貢)'이란 말을 '도근(都近)'으로 잘못 불러 포구의 이름이 도근포로 변했다. 그리고 하천이 도근포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 하천을 '도근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말 타락한 사회상을 풍자한 노래, 도근천요

고려 말 관리이자 명 문장가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던 이제현은 당시 백성들이 즐겨 부르던 민요들을 칠언절구의 한시로 바꿔서 기록했는데, 이들을 모아놓은 것을 소악부(小樂府)라고 한다. 소악부에는 도근천을 소재로 한 노래인 도근천요(都近川謠)가 전해진다.

▲ 월대천 오래전 부터 이곳을 방문한 자들은 월대천에서 풍류를 나눴다.
ⓒ 장태욱

都近川謠(도근천요)

都近川頹制水坊 水精寺裏亦滄浪
도근천퇴제수방 수정사리역창랑

上房此夜藏仙子 社主還爲黃瑁郞
상방차야장선자 사주환위황모랑

도근천 물에 둑이 터져서 수정사도 왼통 물바다가 되었네.
이날 밤 윗방에 예쁜 처자 감춰두고 주지 꼴 보게
뱃사공이 되어 들어가누나.

노래는 여색을 탐하는 중이 홍수가 일어 도근천 둑이 넘치자, 물속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제현이 한시 11수를 남기면서 대부분 시에 대해서는 그 출처나 제목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이 도근천요에 대해서만은 제목과 더불어 제주도민요를 직접 옮긴 것이라며, 시의 해설까지 남겼다. 도근천요에 대한 이제현의 설명이다.

최근에 높은 벼슬을 하는 관리가 연회 자리에서 늙은 기생 하나를 희롱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승려들과는 어울리면서 사대부가 부르면 오는 것이 어찌 그리 늦느냐?'고 하였다. 기녀가 대답하기를 '요즘 사대부들은 돈 많은 상인들의 딸을 취하여 두 집 살림을 차리거나 노비를 취하여 첩을 삼는데, 우리가 중과 속인을 구별하여 대한다면 어찌 입에 풀칠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부끄러워했다.

이제현은 승려들과 더불어 '돈 많은 상인 딸을 취하여 두 집 살림을 차리거나, 노비를 첩으로 삼는' 당시 관리들과, '중과 속인을 구별하지 않고' 돈을 좆는 기생들을 모두 포함하여 고려 말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타락상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자 조선 초기 최고 명문장가로 손꼽히던 백호 임제(林悌)가 이곳을 다녀갔다. 그는 1577년(선조 10)에 과거에 급제하자 제주목사로 재임하던 부친 임진을 뵙기 위해 제주를 찾았던 것이다. 그는 제주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여정을 기록했는데, 당시 남기 기행문이 '남명소승(南溟小乘)'이다. 백호 임제가 도근천을 찾은 후 남긴 기록이다.

도근천가에 도착하니 아장 문덕수와 임세영이 술을 들고 나를 맞았다. 그곳은 시내가 흐르다 못을 이루었는데 한라산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이에 술을 주고받으며 실컷 취하고는, 서로가 돌아가며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이곳 찾은 발길 끊이지 않아

임제는 좌충우돌 호탕하고 자유분방했던 시인이었다. 그런 자유로운 기질이 도근천 하류의 자연 절경과 만나 감정이 달뜨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정작 임제를 취하게 만든 것은 술이 아니라 푸른 소나무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계곡이었으리라.

도근천에서 술에 취한 임제 일행은 날이 어두워지고 비가 내리자, '말고삐를 놓아 치닫기도 하다가 천천히 걷기도 하고, 서로 말 앞에서 피리를 불게도 하는 등 극도로 호기를 부리며' 제주성내로 들어왔다고 한다.

▲ 월대천 다리 월대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인데, 차가 다니는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송창권씨는 이 다리 외에 사람이 마음놓고 다닐 수 있는 현수교가 세워져야 한다고 말했다.
ⓒ 장태욱

도근천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자취를 간직한 곳으로, 지금도 연중 물이 흘러서 옛사람들의 풍류가 그대로 전해지는 곳이다. 이 연못을 더 많은 이들이 찾을 수 있고, 그 깊은 내력에 대해 제대로 느끼게 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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