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 (17) 한림읍 소리꾼 할망의 사람 만드는 소리 / 정신지

 

▲ 빠져버린 이와는 상반되게, 그녀의 모심(母心)에는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길고 억센 뿌리가 나 있다. 오남매의 사진을 바라보며 웃으시는 할망의 이가 여기저기 빠져있다. /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오랜만에 만난 할망이 몰라보게 야위어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지셨느냐는 물음에 할망은 입을 크게 벌리고 내게 이를 드러내 보이신다. 몇 개 남지 않은 앞 이가 잇몸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이가 성치 못해 밥을 못 잡수신 까닭이었다. 그것을 자식들에게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듯 견뎌오셨지만, 얼마 전 아들들에게 발각이 났다. 그래서 곧 제주시내에 있는 치과에 틀니를 하러 갈 거라며 자랑처럼 말씀하신다. 미리부터 말씀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왜 굳이 자식들에게 숨기셨냐고 나는 철없이 물었다.

“죽어불잰게(죽어버리려고). 이추룩(이렇게) 나이 먹엉이네(먹어서) 살아있는 것도 지친 거라. 갈 때가 되난(되니) 이빨도 빠지는 거주(거지). 경허난(그러니까) 밥 못 먹엉(못 먹어서) 변비 걸련(걸렸어). 아기들신디(자식들에게) 곧지도 안허연(말하지도 않았어). 거, 고랑(그거 말해서) 뭐할 거라? 영허당(이러다) 죽어도 나는 어떵 안 허여(아무렇지도 않아). 겐디(그런데) 아기들이 얼마 전에 왔당(왔다가) 이빨이 이추룩(이렇게) 된 것을 봐지난(보니까), ‘우리 성제(형제)들이 어머니 이 하나 못 박아냅니까? 놈들이 욕할 중은(남들이 욕할 줄은) 모르고….’ 허멍(하면서) 막 부애난 게(화가 났어). 게난(그러니), 죽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여게.(아니지)”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결국 뒤늦게 노모의 고집을 꺾었지만,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가히 잔인할 만큼의 것이다. 86년이라는 세월을 홀로 당당히 살아오다 뿌리가 빠져버린 이와는 상반되게, 그녀의 모심(母心)에는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길고 억센 뿌리가 나 있다. 이 몇 개 빠지는 것은 별일 아니라 여길 만큼 고생스런 시절을 버티고 살아오셨지만, 자식도 손녀도 아닌 내게는 선뜻 이를 내 보이시고 허리도 다리도 아프다고 말씀하시는 할망.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당신의 고집에 타협점을 찾아가고 계신듯했다.

이제껏 살아오며 힘든 일투성이였지만, ‘스물’, ‘서른’, ‘마흔’에 삶이 가장 힘들었다고 할망은 말했다.

‘스물’에, 그녀는 만주에 있었다. 일 잘하는 제주사람 18명을 선발해 당시 일본이 중국에 세우려던 만주국에 노동자로 발탁되어갔다. 1942년, 할망이 열여섯이 되던 해의 일이다. 그 후 6년간, 공장에서 비단 짜는 일을 하며 고되게 일했다. 힘든 노동에 병에 들어 죽는 사람이 있어도, 아무도 그들을 묻어주지 않았다. 강을 건너다보면 발에 치이는 게 죽은 사람 시체였고, 짐승에게 반쯤 먹혀버린 어린아이의 시체도 보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들판에는 꽃이 피었다. 드넓은 만주벌판의 푸른 하늘 밑에, 일을 끝내고 기숙사에 돌아와 친구들과 놀던 수많은 별 밤의 기억 속에 그녀의 청춘도 꽃을 피웠었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그녀의 삶이 한층 더 고달파졌다. 전쟁이 끝났으니 집에 보내 달라고 장롱 속에 숨기도 했고,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노동을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노동자들에게 고향은 쉽게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만주에 잡아놓고 아예 만주사람을 만들어버리려고 그랬던 것이라며 할망은 말했다.

 

▲ 언젠가 만주벌판을 걸었었고, 물질도 했었고, 한평생 밭일을 하던 할망의 다리. 아프다 그러셔서 조금 주물러드렸더니 할망 입에서 술술 노래가 터져 나온다.  /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스물둘이 되던 1948년의 어느 날, 총을 둘러멘 미군이 노동자들(일본인을 포함)을 둘러쌌을 때, 그녀가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열여섯에 여기 와서 6년씩이나 일도 열심히 하고 생산도 올려줬다. 이제 내 나이 스물둘이다. 난 이제 결혼하러 제주도에 가야 한다.” 그 말을 통역으로 전해들은 미군이 총을 거두고 말했다. “가! (‘가’가 아니라 ‘Go!’였을 것이다)” 총을 내리고 건넨 그 짧은 한마디에 할망은 어렵사리 고향 가는 기차에 올랐다.

“……경행(그래서) 서울에 가난(가니까) 대통령이 노동자들 불러놓고 고생했다고 밥도 사주곡(사주고), 집에 갈 차비도 주곡(주고) 해서. 며칠 지낭(지나서) 제주도에 돌아와신디(돌아왔는데), 집들이 이상해 뵈연게(보였어). 거기 살멍(살면서) 크고 높은 집들만 봐부난게(보니까). 초가집들이 몬딱(전부) 맬싹맬싹(납작납작) 몰랑몰랑(물렁물렁)하게 족아(작아) 보이는 거라.”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드넓은 대륙에서 그녀는 6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몸과 마음이 제주가 작아 보일 만큼 크게 성장했지만, 이내 그녀의 마음이 또다시 오그라들었다. 4.3사건,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그녀의 20대가 슬프게 저물어버린 것이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았으나 늘 먹을 것이 부족했다. 밭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아 물질도 시작했다. 하지만 어린 자식을 두고 물에 나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남편이 ‘테왁’(해녀들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할 때 물위에 띄우는 둥그런 도구)을 불 질러버린 적도 있었다. 

‘서른’을, 그래서 그녀는 잊을 수가 없다. 밭일도 바닷일도 너무나 힘들어서, 되레 만주에서의 노동이 그리운 적도 있었다고 할망은 말한다. 그리고 그녀 나이 ‘마흔’에,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자식들도 크고 어느 정도 살 만해졌는데, 집안의 기둥이 사라졌다. 홀어미가 되어 반세기 가까이 살아온 그녀에게, 나는 또 철없이 물었다. “할머니, 좋은 사람 만나서 또 결혼할 수도 있었잖아요.” 그러자 할망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게(그렇지), 시집 가랜 허는(가라고 하는) 사람도 이서났주(있었지). 겐디(그런데) 아기들(자식들) 사람 만들잰 게(만들려고). 다섯 아기 못 견디게 나아놩(낳아놓고), 죄 어신(죄 없는) 아기들 사람부터 만들어야지, 나만 행복하면 뭣을 하리? 우리 부모도 가지 말랜(말라고) 허연(말했어). 아기들이 얌전허난(얌전하니까), 이 아기들 봥(봐서) 살랜(살랜). 어멍은 죽어도 좋지만, 아기들만은 사람 만들랜(만들라고), 우리 어멍 아방이 나신디(나에게) 경(그렇게) 고라라(말하더라).”

 

▲ 호박씨는 가져가서 심을 때 꼭 뾰족한 쪽을 아래로 가게 심어야 한다고 당부하시는 할망. 시키신 그대로 내년 봄에 나는 그녀가 준 호박씨를 마당에 심을 것이다.  /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할망이 그렇게 기른 다섯 아기는 누구 하나 빠짐없이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벽에 걸린 사진 속의 그들은 현재 작은 회사의 사장님이고, 유학을 갔다 오기도 했으며, 손자 손녀들도 결혼을 했거나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 그들이 할망의 빠진 이를 뒤늦게 발견한 것은, 결코 그들이 무심해서가 아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효자 효녀로 그들은 자랐다. 하지만 할망은 아직도, 세상의 죄 없는 아기들을(나를 포함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홀로 조용히 행하고 계신 듯했다.

침대 옆에 놓인 오남매의 사진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으시는 할망이, 내게 이런 말씀을 건네셨다.

“만약에 너가 막 행복허영(행복해서) 잘 살 거 아니가? 잘 살면, ‘아이고 이 사람 잘도 복 좋은 사람이여’, 하고 동네 사람들이 말허민(말하면) 그거 안 좋은 거라. 항상 고생하는 추룩(것처럼) 조용행(조용하게) 살아야주(살아야지). 복 좋게 보이멍(보이면서) 인정받고 사는 것은 좋은 게 아니여.”

지나가던 나그네인 나에게 노래도 불러 주시고, 내년 봄에 심으라며 호박씨도 건네주시고, 친구들이 놀러 오면 주려 했던 호박떡도 꺼내주신 한림읍의 소리꾼 할망. 하지만 그 수많은 선물 중에 가장 커다란 것은, 입을 벌려 내게 보여주신 그녀의 이다. 그 사이로 보이던 할망의 분홍빛 속살과 그 속에서 터져 나오던 그녀의 쩌렁쩌렁한 노랫소리를 나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 정신지

* 이 글은 9월29일자에 실린 '한림읍 소리꾼 할망이 들려준 ‘빤스’ 이야기'에 이은 두번째 글입니다.

<제주의소리>

<정신지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매주 한차례 <제주의소리>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