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 (19) 영등할망의 사랑스러운 둘째 딸된 사연 / 정신지

 * 이 글은 10월13일자에 실린 '애월읍 영등할망, 그 첫번째 이야기'에 이은 두번째 글입니다. 

▲ 바다내음이 물씬 풍기는 할망의 작은 보금자리.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오후의 가을 햇살이 방 안을 온통 노란 귤빛으로 물들인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바다 내음이 물씬 풍기는 할망의 작은 보금자리.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오후의 가을 햇살이 방 안을 온통 노란 귤빛으로 물들인다. 노인이 사는 집이라 아무것도 없어 부끄럽다는 할망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로 올라가 벽에 걸린 손주들 사진을 하나씩 끄집어 내린다. 손주들이 하나같이 할망의 얼굴을 닮은 것이 너무나 신기하다.

“뭉클락뭉클락행(동글동글해서) 잘도(너무) 아꼬와(사랑스러워). 할망 닮앙(닮아서) 송편추룩(송편처럼) 생겨서(생겼어).”

할망은 손주만 아꼬와하는(사랑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하르방도 잘도 곱고(매우 멋지고) 아꼬와.”라고 말씀하시는 그녀의 남편 역시 할망의 커다란 자랑거리다. 몸이 아파 손을 쓸 수 없는 할망을 위해 이불 바느질도 대신 해주고, 요리도 청소도 해준다는 하르방.

“에~이~, 이제도(지금도) 할아버지를 막(정말) 사랑하셤구나예(사랑하시는구나)?”하며 장난을 걸자, “어게(아 그럼)! 당연히 사랑허주게게(사랑하지)!” 하신다. 넉살 좋고 정이 넘치는 그녀에게 ‘영등할망’이라는 별명은 괜히 붙여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이 처음부터 알콩달콩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 나이 아홉 살, 전쟁고아가 될 뻔 했던 일본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해방 후 귀향했지만,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녀는 어린 나이에 물질을 시작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바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소중했고, 노력한 만큼 얻어지는 결과에도 재미가 붙었다. 그러다 보니 실력도 늘고, 시집갈 때 즈음의 나이에 그녀는 집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일꾼이 되어있었다.

 

▲ 방에 들어오자마자 귀여운 손주들의 사진을 보여주시던 할망. 모두 할망의 동그란 얼굴을 닮아 사랑스럽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 할망의 거친 삶에 뒤늦게 찾아온 평화로운 오후. 아꼬운(사랑스러운)이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면 훌쩍 시간이 간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지난날, 제주에서 해녀 며느리는 꽤나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해녀인 딸을 시집보내며 부모는 딸을 잃음과 동시에, 집안의 기둥이 하나 없어지는 휘청거림을 경험해야 한다. 집안만 휘청거리면 좋았을 것을, 할망이 시집을 오던 해에는 나라도 크게 휘청거렸다. 4.3사건이 터지고, 한국전쟁이 나고, 가족과 지인들을 지옥 같은 전쟁터에 떠나보내며, 또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이 그녀를 찾아왔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평화를, 할망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열아홉에 시집을 왔을 때, 하르방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그들이 결혼한 이유는 가슴 설레는 십 대의 풋풋한 사랑 덕분이 아니다. 그저, 가난한 신랑의 집에 일꾼이 되어줄 해녀 며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시집을 와신디(왔는데), 오랑 보난(와서 보니) 베게도 없고 이불도 없고. 방은 흙방에, 먹을 것도 하나도 어서(없어). 하영(너무) 가난한 집인 거라. 시집와서 처음에는 아맹(아무리) 배가 고파도 하르방 집에서는 밥 한 번 안 먹어봤쪄게(먹어봤어). 친정집에 강(가서) 먹어서. 집이 가민(집에 가면) 어멍이 ‘야이 막 배고팠덴’ 허멍(‘이 아이 엄청 배가 고팠다’고 하면서) 먹을 것을 이마니(이만큼) 줘나서(줬었지). 나 어서지민(없어지면) 서방이 친정에 매날(매일) 나를 데리러 완(와서). ‘아이고, 각시가 배고팡(배고파서) 또 집에 갔구나’, 허멍(하면서)…. 서방은 매날(매일) 쌀 항아리 앞을 가리고 앉아났주게(앉아있었어). 이녁(당신) 집에 쌀 어신 거(없는 거) 나신디(나에게) 안 들키젠(안 들키려고). 나가 그걸 보민(보면) 부끄러우난(부끄러우니까),  경 해나서서(그렇게 했었어).”

그렇게 집에서 나온 할망은 고기잡이 꼬마 신랑과 함께 살며 집안을 일으키고 싶었다. 하지만 4.3사건이 터지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늘어만 갔고, 남편은 한국전쟁으로 군인이 되어 집을 나갔다. 바람 잘 날 없는 그녀의 몸과 마음에 연달아 구멍이 뚫렸다.

 “(4.3사건) 당시에 우리 큰오빠가 특공대 지서에 주임이어신디(이었는데), 폭도(할망은 당시 무장대를 폭도라 불렀다)들이 오빠를 잡아다 죽이지 못허난(못하니까), 그 댓 갚음으로 둘째 오빠를 심어당(잡아다) 죽여 부려서(죽여 버렸어). 겨우 스물다섯 낭(나서) 생죽음으로 게. 게난 그 시체를 강(가서) 촞아오잰 허난(찾아오려 하니까), 차에 탕(타서) 대정읍 까정(까지) 간(갔어). 어느 만치(어디까지) 강(가서) 죽어신가 행(죽었나 해서). 겐디(그런데), 죽은 사람이 하영(너무) 많아부난(많으니) 어떵(어떻게) 촞아지크냐게(찾을 수 있겠어)? 오빠가 쓰던 허리띠영(허리띠랑) 신발 봥(보고) 겨우 촛아왕이네(찾아와서) 아버지 땅에 묻은 거라…….”

 

▲ 몸이 불편하신 할망을 위해 집안일은 하르방이 하신다. 얼마나 정리를 잘했느냐며, 나에게 하르방이 정리한 부엌 이곳저곳을 자랑 중이신 할망.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 할망이 꼬불꼬불한 글씨로 써놓은 삶의 원칙. 거짓말 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아라 . 영등할망의 커다란 가르침, 그대로 살자.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할망의 아버지는 화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아흔이 넘게 사셨다는 어머니도 돌아가신지 오래고, 아홉 남매였던 형제들도 모두가 세상을 떠났다. 남은 것은 이제 할망뿐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60년 넘게 물질을 하며 전복과 소라를 따다가 키운 보석 같은 자식들이 있다.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오빠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훔치던 할망은, 자식 이야기에 한 번 더 눈물을 보이셨다. 없는 형편에 늘 장학금을 받아가며 대학까지 나왔다는 큰아들의 이야기와, 군대 간 작은아들이 푼돈을 모아 부모에게 새 양말을 한 상자 사서 보냈다는 이야기. 그런 착한 아들의 아꼬운 아내가 자식을 남긴 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하며 할망의 눈시울에 또다시 짠물이 고였다.

가는 곳마다 죽을 고비였고, 우는 것이 일이었다는 그녀의 지난날. 하지만, 그 어떤 고난보다 힘이 들었던 것은,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것이었다고 할망은 말한다. 배우고 싶어도 학교가 불에 타 없어지고, 하루아침에 선생이 죽음을 당한 시절을 살아온 그녀는, 아직도 일본에서 다녔던 소학교 시절의 일 년과 제주에 돌아와서 다녔던 일 년간의 국민학교 시절을 잊을 수 없다. 그때 익힌 한자와 한글을 내게 써 보이시고, 기억하는 일본어로 나와 대화를 하는 그녀의 얼굴에 해맑게 홍조가 돈다.

‘놀아도 좋다. 거짓말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아라’는 원칙으로 그녀는 삼 남매를 길렀다. 현관문 바닥의 상자에 연필로 그렇게 쓰여 있던 낙서도 할망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명언 중의 명언은 이와 같다.

“아기들은, 아무리 족아도(작아도) 오래 안고 이시민(있으면) 무거와(무거워). 경해도(그래도) 절대로 무겁덴(무겁다고) 말하면 안 되어. 복이 벗어져(복이 달아나). 촘아사 돼(참아야 해). 안은 자식이 나 자식인디, 절대로 무겁덴(무겁다는) 말이랑(말은) 말아야 해. 놈 신디도(남에게도) 그런 말고르민(그런 말하면) 안 되는 거라. 무거와도(무거워도) 전부 나신디(나에게) 온 것은 나꺼니까.”

할망과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노인정에서 한바탕 놀다 오신 잘생긴 하르방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이는 누게라(이 아이는 누구야)?”라고 묻는 하르방의 말에, 할망이 장난삼아, “딴디 강(다른 곳에 가서) 낳아온 둘째 딸이우다(딸입니다).” 하셨다. 그 말에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해가 저물기 시작한 오후, 아쉽게 인사를 하며 그녀의 집을 나서는데 할망이 뒤에서 나를 부르시며 말씀하셨다. “맹심행(명심해서) 가라이(가거라). 혼자만 댕기지 마라. 위험허여. 그것 만은 부탁하크라이(부탁할게)!”

“네!” 하고 대답하며 할망에게 크게 웃음 지으며 인사를 했다. 그렇다. 이 순간만큼은 나도 영등할망의 딸. ‘무거워도, 전부 나에게 온 것은 내 것’이라던 커다란 할망의 한마디를 꼭꼭 씹어 삼키고 나니, 어깨에 진 짐이 한결 가벼워진다.<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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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매주 한차례 <제주의소리>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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