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 ‘귓것 하르방’이 남긴 ‘오늘’이라는 유산

 

▲ 할망은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걷는데, 무심한 차들은 쌩쌩 달리며 좀처럼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 그다지 서두를 필요가 없는데, 우리는 늘 너무 빨리 걷고 달린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쌩쌩 차가 달리는 큰길 한 귀퉁이에 꼬부랑 할머니. 핸드카트에 몸을 의지한 채 조금 가다 앉아서 쉬고, 또 일어나 걷는 할망 모습이 꼭 달팽이 같다. 신호등 없는 건널목을 건너려는데, 차들은 그녀를 보고도 좀처럼 세울 기색이 없다. 불안한 마음에 보다 못한 내가 나섰다. 길 건너는 꼬마처럼 한 손을 높이 치켜들고 할망 뒤에 서서, 멈출 줄 모르는 무심한 차들을 매섭게 째려본다. 그러자 달리던 차 한 대가 속도를 멈추어 섰고, 그 앞을 할망이 느릿느릿 걸어간다. 

달팽이 속도로 걷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니, 평소 내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실감이 난다. 그렇게 무심코 스토커가 되어 할망 뒤를 졸졸 따라왔는데도 그녀는 눈치 채지 못했는지, 골목길 한편에 카트를 세우다가 나와 눈이 맞았다. 집에 오셨나 보다. ‘넌 누게냐(누구냐)?’ 하는 눈으로 빤히 나를 쳐다보는 할망과, 뭐라 설명을 해야 할 지 모르는 나. 멋쩍은 웃음과 함께 나는 우연히 그녀의 오후에 잠시 멈추어 섰고, 결국 할망 방으로 불려 들어가 나그네 커피를 한 잔 얻어 마셨다.

그녀는 간밤에 양다래를 잘못 잡수시고 배탈이 났다. 변비에 좋다며 지인이 가져다준 것을 먹고 탈이 났는지, “누우난(누우니까) 오목가슴이(명치가) 우트레(위쪽으로) 막 치받앙(쏠려서) 빵빵허연(답답했어). 나냥으로(나대로) 막 쓸어도(쓸어내려도) 안 들엉(안 나아서) 병원 갔당(갔다) 오는 거.”라고 하신다. 

 

▲ 혼자 사시는 할망들은 대부분 깔끔하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현관. 정리정돈도 80년 넘게 하다 보면 습관이 되는지. 난 언제쯤 할망들처럼 깔끔한 여자가 될 수 있을까?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혼자 사는 할망은 머리 어깨 무릎 팔다리 안 아픈 곳이 없다. 연세를 여쭈니 올해 여든다섯. 하지만  오 년 전까지 물질을 하던 동네 상군해녀(해녀들을 기량에 따라 상·중·하군으로 구별, 가장 기량이 좋은 해녀)출신이다. 열아홉에 이웃 마을에서 시집을 와 육 남매를 낳고 사는 동안, 4.3사건도 있었고 전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진 세월보다 할망을 힘들게 한 것은 돌아가신 ‘귓것 하르방’. 하고많은 이야기 다 놔두고 할망은, 저승서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하르방 이야기를 해질 무렵까지 하셨다.

‘귓것’이라는 제주어가 있다. 표준어로 ‘귀신’ 혹은 ‘바보’라 불리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그 무엇도 귓것이 가진 깊은 속뜻을 잘 전달해주지는 못한다. 귀신같이 괴상하고 바보처럼 철이 없지만, 미워하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가련한 존재. 밉지만 정겹고, 정겹지만 버거운 존재, 그것이 바로 제주인들이 말하는 귓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우리는, “어이구, 저 귓것 닮은 거!” 하면서도 대부분 혀를 차며 웃는다. 밉지만 미운 것이 전부가 아닌 애정 어린 존재. 그것이 바로 귓것이다. 할망은 30년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하르방을 떠올리며 말씀하신다.

“그 하르방 덕분에(?) 집이 쫄딱 망해부렀주게(망해버렸지). 술을 하영(너무) 먹어부러나서(먹었었지). 옛날 사람들이 ‘놈의 눈물 나게 허민 이녁 눈으로 피가 난다(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자신의 눈에는 피가 난다)’고 고라나신디(말했었는데) 딱 그 추룩허영(그렇게 해서) 쉰일곱에 가부런(가벼렸지).”

지긋지긋한 술 때문에 하르방은 한평생 할망을 속 썩였다. 물질도 하고 밭일도 하면서 산방(마루) 가득 할망이 나록(쌀)이며 콩이며 조며 포대로 해다 놓으면, 그것을 칼로 찔러서 범벅을 만들어 놓으시고, 당시 약국을 하던 주인집 유리창을 깨부수는 통에 할망이 남모르게 새벽에 그것을 다시 박아 놓고….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귓것 하르방의 일화에 병들어 아프다는 할망 목청에 힘이 들어가고, 핏기 없던 얼굴에 생기가 돈다. 

 

▲ 푸른 하늘도 한라산도 그대로인 할망 동네 바당. 하지만 아파트가 들어서며 바뀌는 풍경처럼, 물밑 풍경도 많이 변했다고 할망은 말한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허이고, 그거 왕(와서) 곤조 부리민(성깔 부리면) 두들이젠도 헌다(때리려고도 한다). 경허민(그러면) 신발 신디도 못행 맨발로 도망가곡. 아이들도 울멍 나 조름에(꽁무니에) 곱고(숨고), 놈의(남의) 집에 강 곱고…. 귀것도 그런 귓것이 어서나서(없었지)!”

하르방이 살아계실 적에는 집안에서 잔치 한 번을 한 적이 없다는데, 그가 술병으로 돌아가시고 할망은 자식들을 시집장가 보내며 잔치를 일곱 번이나 치렀다고. 잔치를 해도 술을 먹고 횡포 부리는 이가 없으니, 조용히 집안 경사를 맞이할 수 있었고, 부조가 들어오면 하르방이 술값으로 낸 빚들도 조금씩 갚아 나갔다. 여하튼 하르방이 죽고 나서 집안이 살아났다고 할망은 말씀하신다.

귓것 하르방 말씀에 혈압이 올라 쓰러질 듯한 할망이 무서워, 나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소문난 상군해녀로 살아오신 그녀의 물질 이야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오널(오늘) 별 기억이 다 남쪄만은(나는 것 같은데). 친정어머니 집 쪽이 바당(바다)이라, 겐디(그런데) 그디는 돌라졍(그곳은 떨어진 곳이라) 좀녀(해녀)들이 잘 안 가. 헌 날(어느 날) 큰아들 도랑 강이네(데려가서) 아들은 괴기 낚고(고기 잡고), 해 져물어 가는디 바당 아래 내려갔주. 겐디(그런데), 넙짝한 여에(넓적한 바위에), 카이카이헌 트멍에 보난(사이사이 난 구멍에 보니까) 구젱기가 소~빡허연(소라가 엄청나게 많았어). 혼숨에 시 개 네 개씩 줍당 보난(한숨에 서너 개씩 줍다 보니) 테왁(해녀들이 잡은 해산물을 넣는 도구)이 갈라젼(찢어졌어). 구쟁이가 하부난 게(소라가 너무 많아서 말이야). 어멍은 나가 돌아오지 안 허난(않으니) 이년이 죽었짼(죽었다고). 해는 져감신디 안왐짼(해가 지는데 안 온다고)…. 그거 몬딱(전부) 가져 왕 쏠망이네(가져와서 삶아서) 날 어두운디(어두운데) 버스 타고 시에 폴레 가서(팔러 갔지). 동시장(동문시장) 알력(아래)쪽 호남시장에. 겡(그래서) 그것을 얼멩이에 놩 치난(대나무로 된 채에 넣고 치니) 존 것이 어성 몬딱 굵은 거라(잔 것이 없고 전부 굵은 것이야). 일등 먹엉이네(일등상품이 되어서) 구쟁기 포는 소름(소라 파는 사람)이 고라라(말했어). ‘어떵허영 살민 경 재수치레 해집디가(어떻게 살면 그렇게 재수 좋은 일이 생깁니까)?’ 하하하. 게난 그 돈으로 교복도 어시(없이) 학교 댕긴(다닌) 큰아들 옷 사고, 빤쓰 사고, 양말 사고. 게도(그래도) 돈이 남아. 잘도 지꺼져서(너무나 기뻤었어), 그때.”

 

▲ 해녀 탈의장.  올해 여든다섯인 할망은, 오 년 전까지만 해도 물질을 하던 상군해녀였다. 예전에는 하얀 적삼에 ‘빤쓰’라 불리는 바지를 입었었는데, 곰옷(고무옷)이 생기고 나서 바다의 보물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라고 할망은 말했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 “오늘 별 기억이 다 나네!” 하시며 여러 말씀 나누어 주신 할망. 나그네 커피에 고구마까지 얻어먹고 길을 나서는데 할망이 따라나선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할망이 모처럼 크게 웃었다. 그러다가 이내 또 귓것 하르방 말씀.
“게난, 그 귓것이 아직 살아시민(살았으면)…. 술만 퍼 먹엉(먹고) 밥은 먹지도 안 허고 곤조 부리당(부리다가) 경 가분 거 아니라게(그렇게 가버린 것 아니냐)! 젊은 때 못 볼 것만 하영(많이) 보고, 부모성제(형제)도 시국(할망은 4.3사건을 ‘시국’이라 말한다)에 다 가불고(죽고). 경허당(그러다) 머리가 돌아분 생이여(돌아버린 모양이지). 허이고, 게도(그래도) 하르방 죽은 후로 좋은 일만 하난(많았으니)….”

할망은 30년째 꾸준히 절에 다닌다. 하르방이 돌아가신 것도 30년 전인데, 아마도 할망은 귓것 하르방의 넋을 달래며 그렇게 살고 계신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런 그녀에게 한 동네 아주머니는, 여든이 넘어서 절에 가면 절을 해도 부처님이 도라졍 베리지(뒤돌아서 봐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는데, 그 말을 할망은 이렇게 받아치셨다. “나~ 이(나 있지)!, 속으로 ‘저 사람은 늙지 않을건가?’ 생각해서(생각했어). 나도 젊은 땐 늙어지카부댄 안 해라만은(늙어질 거라고는 생각 안했지만). 곧 팔십 나는 동네 여편네가 경(그렇게) 고라라(말 하더라)!”
 
돌아가신 하르방, 막말 쟁이 동네 아줌마, 그리고 평일 오후 하는 일 없이 할망 뒤꽁무니를 스토커처럼 따라 여기까지 온 나. “그러고 보니 할망 주변에는 귓것이 참 많네요” 하고 내가 장난 말을 건낸다. 그러자, “허이고” 하며 한숨을 쉬며 할망이 하신 명언. “감저(고구마)나 먹으라!” / 정신지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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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매주 한차례 <제주의소리>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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