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에 떠난 배들을 기다리는 모슬포항 앞바다가 오늘따라 무척 쓸쓸해 보인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걸으멍 보멍 들으멍](29) 한 겨울 모슬포항서 만난 제주의 어머니, 그녀는 / 정신지

바람이 모질게 분다. 코끝이 찡하다 못해 얼 것만 같다. ‘걷다 보면 누군가 만나겠지.’ 하며 발걸음을 옮기지만, 종종걸음으로 걸으니 제대로 보이는 게 없다. 사람도 풍경이 되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기만 한다. 사람 만나기에 좋은 날이 어디 따로 있겠느냐마는, 몇 시간째 바닷바람을 맞으며 나는 애꿎은 날씨 탓만 하고 있다.

그래도 명색이 모슬포인데…. 가파도와 마라도로 향하는 배가 다니고, 오일장이 서고, 해마다 화려한 방어축제가 열리는 곳이라 기대가 컸다. 하지만 모슬포라고 해서 늘 분주하기만 하겠는가. 이른 새벽에 떠난 배들을 기다리는 모슬포항 앞바다가 오늘따라 무척 쓸쓸해 보인다. 포구 끝에 서서 바다를 보는데 어디선가 반가운 냄새가 난다. 장작 태우는 냄새다. 마침, 생선 파는 아주머니 한 분이 깡통에 불을 지피고 있다. “어머니, 불 좀 고치(같이) 쬐게 마씨(쬘게요).” 하고 말을 거니, “이디 왕 앉으라(여기 와서 앉아).”하신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장작불 옆에 다가가니 따스함이 가히 감동적이다.

올해나이 예순다섯이라는 아주머니는 30년이 넘게 모슬포에서 생선 장사를 하고 계신다. 조그마한 가판대에 볼락, 아카모치(눈볼대), 황조기, 객주리(쥐치), 방어, 삼치 등 없는 게 없다. 아침 6시부터 나와서 생선을 사들이고, 그것을 포구나 시장에서 팔며 저녁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저녁 배가 낚아온 온 싱싱한 생선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면 오후 6시. 반나절을 홀로 앉아 고기를 팔며 바다를 바라본다. 그렇게 평생 생선 장사를 하며 딸 다섯을 길렀다.

▲ 마트가 생기고 포구에 생선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었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우리 셋째가 이번에 시집을 가신디(갔는데), 중문에서 제일 좋은 호텔에서 결혼식을 했어. 가이가(그애가) 그디(거기) 직원이거든. 첫째 둘째도 양반집에 시집을 갔고(그녀가 ‘양반집’이라 함은, 딸들이 제주 부 씨와 고 씨 집안에 시집을 갔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자유의 몸이야.”

유쾌하게 딸 자랑을 하던 아주머니지만,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조용히 한숨부터 내쉰다. 그녀는 스물다섯 되던 해에 가파도 출신의 고기잡이 청년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동정심으로 결혼했어. 부모 없이 혼자인 아방이 불쌍행이네(불쌍해서)…. 선을 봐신디(봤는데) 사람이 착하고 욕심이 어신 거라(없는 거야). 경행(그래서) 결혼 했주게(했지). 잘도(정말) 마음씨가 고운 사람인디, 병 걸려서 일찍 죽어부런(죽어버렸어).”

한 때는 남편과 함께 배에서 고기를 낚기도 했다. 하지만 일 년도 안 되어 배에 타는 일은 관두었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두 사람이 배에 타니 수지가 안 맞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그녀는 타고난 장사꾼이다. 그러면서 아주머니 인생의 전성시대였다던 20여 년 전의 모슬포항을 회상하신다.

▲ 그녀의 작은 가판대에는 없는 것이 없다. 집으로 오는 길에 생선을 세 마리 샀는데 아주머니가 “이것도 좋은 인연인데!” 하시며 세 마리 더 얹어주셨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그땐 마트가 없잖아. 손님이 몬딱(전부) 시장으로만 왔지. 게민(그러면), 호룰 내왕(온종일) 이디를(여기를, ‘포구’) 걷는 거야. 전복 소라 해삼 같은 거 막 널엉이네 팔민(널어서 팔면), 발 뒤치기(뒤꿈치)에 불이 날 정도로 바빤(바빴어). 발이 짝짝 갈라지고 둥둥 부엉이네(퉁퉁 부어서). 돈도 세지 않앵(않고) 데꼉 놔둬불민(그냥 던져 놔두면), 어떵사(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라나서(몰랐었어). 그 시절에 돈 하영 벌엉(많이 벌어서) 재산도 사곡(사고), 자식들 학교도 보냈주.”

하지만 그것도 한 시절. 어렵게 모은 돈이 남편 때문에 순식간에 사라지는 일도 있었다. 평생 고기 잡는 일 이외에는 해 본 적도 없는 성실한 남편이 어느 날 도박에 맛을 들이면서 아주머니 속을 새까맣게 태워놓았다. 벌어서 모아두면 없어지고, 숨겨놓으면 사라지고…. 이제는 가고 없지만 지금도 그 시절의 남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시리다. 미워서 아픈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때문에 아픈 거라고 하신다.

순진한 뱃사람을 상대로 사기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남편이 그들의 속셈에 넘어가서 그런 거란다. 솔직한 마음, 그녀는 아직도 남편을 용서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원망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늘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순진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세상’이다.

▲ 갓 잡아올린 삼치를 배에서 직접 사오시는 아주머니.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우리가 늙엉 죽어불민, 지금 사람들은 어떵되불건지(어찌 될는지)…. 세상 돌아가는 판이 말이 아니라. 카드가 나오고 아이들이 이제는 돈도 셀 줄 모르고. 하루하루 벌멍 쌓아가는 재미도 모르고. 스마트편(‘스마트폰’을 말함)도 잘못 나와서. 아이들이 매날(맨날) 구석에 쳐 박아졍(박혀서) 전화만 베리고(바라보고), 그추룩(그렇게) 다 바보가 되는 거 아니라! 아이고 이놈의 세상이, 아맹(아무리) 부모들이 맺어준 결실이랜(결실이라) 해도……. 허이고, 난 모르켜(몰라).”

그러나 적어도 그녀는, 당신 몸으로 낳은 다섯 자매만큼은 훌륭하게 길렀다. 어려서부터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귀가 따갑도록 가르쳤고, 세숫대야를 팔더라도 사람은 자기 밑천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고 딸들에게 말해왔다. 그렇게 자란 다섯 자매 중의 두 딸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머니의 뒤를 이어 생선 장사를 한다. 물론 양반집에 시집을 가서도 말이다. 어쭙잖은 회사생활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거나 불안해할 바에는, ‘작지만 내 가게의 사장이 되어라’던 그녀의 가르침이 제대로 결실을 본 모양이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못하고 부모가 늘 바빴던 탓에, 돼지 등뼈에 감자를 삶아 한 솥 끓여 놓으면 어린 다섯 딸들이 알아서 밥을 차려 먹고 자랐다. 시장에서 얻어오는 닭발과 창자, 이제는 구하기도 힘든 닭똥집이 딸들의 도시락 반찬이었다. 부모가 생선장사라지만, 좋은 것은 다 내다 팔고, 남은 생선뼈와 머리를 끓여 만든 국만 질리도록 먹어왔을 딸들이다.

▲ 그녀와 나는 이 깡통 장작불 연기에 눈물을 흘려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포구로 돌아오는 고깃배를 기다리며, 바다를 바라보며 보내는 그다지 춥지 않은 겨울이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잘 먹이지도 못하고 똘들신디는(딸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지만, 경허난 우리 똘들이 하나같이 꽝이(뼈가) 튼튼한 거 아니가? 먹을 것도, 놈들이 안 사 먹고 배리지도(쳐다보지도) 않는 것들이, 사실은 진짜 진국이라 이?” 라시며 웃는 아주머니. 그 웃음 또한 진국이다.

“혼자가 좋은 거라. 나 필요한 만큼 벌엉(벌어서), 나 쓰고 싶은 대로 쓰멍(쓰면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이제 놈의 밥 차려줄 일도 없고, 아기들도 다 컸고. 남편은 놈의(남의) 편만 든댄 행(든다고 해서) 남편 아니가? 여자건 남자건 결국 혼자 왔당(왔다가) 혼자 가는 거. 이추룩 매날 바당에 나왕(이렇게 매일 바다에 나와서) 좋은 공기 마시고, 배 들어오는 거 기다리고. 아이고, 우리 어멍…, 잘도 좋은 디(곳에) 날 나아쪄(나를 낳았네)! ”

한겨울의 모슬포는 결국 기대 이상의 결실을 내게 주었다. 포구에서 만난 그녀는, 추운 날  홀로 앉아 생선을 파는 ‘그냥’ 아줌마가 아니었다. 마치 장작불 옆에 앉아 바다를 보며, 경험이라는 알을 품고 있는 커다란 어미 새 같다. 바쁘다 바쁘다 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주히 세상 위를 달릴 때, 한 자리에 묵묵히 앉아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초라하고 심심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은 둥지는 누군가가 틀고 앉아있어야 한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품고 앉은 것이다. 그녀에게 배운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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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매주 한차례 <제주의소리>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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