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혁의 중국횡단기] (27) 孔子(콩쯔), 包子(바오쯔), 祥子(샹쯔)

어제 이불 속에 들어간 그대로 나왔다. 세수도 하지 않고 눈곱을 손으로 떼고 거울을 보면서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갈무리하고 방을 나섰다. 가게에서 생수를 한 병 사면서 길 건너편의 버스터미널 위치를 확인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옌저우에서 취푸까지는 버스로 30분 거리인데 버스를 타고 잠깐 졸았는데 벌써 도착이다. 차에서 내리자 먼저 맞는 것은 역시 일일투어를 권하는 택시기사들. 한눈에 관광객차림을 알아보는 그들에게 나는 군침 도는 먹잇감이고 표적이다.

다가오며 말을 건네는 그들을 무시한 채, 역 앞 계단에 주저앉아 배낭에서 가이드북을 꺼내서 취푸에서 가봐야할 것들을 찾았다. 취푸는 공자의 고향인 만큼 삼공(三孔)이라고 하는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이 있고 주공묘(周公廟)와 공자의 제자 안회의 묘인 안묘(顔廟) 정도가 있다. 공자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다는 공부와 공자의 가족묘인 공림을 제외하고 공자의 사당인 공묘와 주공묘만을 보고 취푸관광을 끝내기로 작정했다.

택시 대신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차로 다가가서 주공묘로 가자고 했다. 늙수그레한 운전기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삼륜차를 출발시켰으나 속도를 내지 못하고 오토바이가 아니라 경운기 수준으로 달려갔다. 금방이라도 길 한가운데 멈춰 서버릴 것 같은 경운기 삼륜차는 그러나 끈질기게 달려서 주공묘에 다다랐다. 노인은 돌아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렸다가 다녀오면 다음 갈 곳도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 주공묘의 전경. ⓒ양기혁

주공묘는 낡고 초라했다. 찾는 사람도 없어서 적막한 분위기였다. 매표소가 있는 것도 모르고 들어가려는데 옆에 사무실 같은 데서 한 남자가 나와서 손짓으로 불렀다. 다가갔더니 표를 사야 한다고 해서 50원을 내고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드리 고목들로 채워진 정원, 가지런히 늘어선 오래된 비석들, 그리고 그 끝에 들어선 주공의 영정. 그뿐이다. 비석들의 일부는 깨어진 것을 이어 붙인 흔적이 보이는데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된 흔적이라고 한다. 주공은 공자가 흠모해 마지않았던 인물이다. 신영복 선생은《강의》에서 주공을 저우언라이()와 함께 중국 최고의 정치가로 평가하고 있었다.

기원전 1046년 주(周) 무왕(武王)이 은(殷, 원래는 商)의 마지막 주(紂)왕을 멸하고 새로운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무왕은 희(姬)씨 종친들에게 분봉하여 노(魯), 연(燕), 제(齊)라는 제후국을 건설하게 하는데 노(魯)나라는 무왕의 넷째 동생인 단(旦), 즉 주공에게 분봉한 제후국이며, 500년 뒤에 노나라의 도읍인 곡부(曲阜) 인근 마을에서 공자(孔子)가 태어나게 된다. 당시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주공은 아들 백금(伯禽)을 노나라로 대신 보내고 자신은 남아 무왕을 보좌하고 무왕이 죽은 후에는 그 아들 성왕(成王)을 섭정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갔다.

▲ 공묘(孔廟)의 본전인 대성전(大成殿). ⓒ양기혁

“칸완러(看完了, 다 봤다).”
“저머콰이칸완러(이렇게 빨리)!”
내가 올라타자 노인은 다시 삼륜차를 달려 공묘로 갔다. 25원을 받고 노인은 수명이 이미 다했음 직한 삼륜차를 몰고 돌아갔다. 쓸쓸하고 한적한 주공묘와 달리 공묘는 거대한 사당이었고,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공자 사후 1년 뒤인 기원전 478년 노나라 애공(哀公)이 처음 세웠다고 하니 25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 세 칸짜리 소박한 공간이었던 공묘는 역대 왕조에서 확장과 증축을 거듭하여 지금은 남북으로 거리가 1km, 면적이 총 2만㎡인 세계 최대의 사당이 되었다.

화려하고 거대한 사당 속에서 공자의 본래 모습은 사라져버리고 역대 권력자들에 의하여 과장되게 덧칠된 허상만이 남아 있다는 느낌이다. 흔히 ‘노자’에는 인간 노자가 보이지 않지만‘논어’에는 공자의 인간적 풍모가 풍부하게 드러나 보인다고 하는데 거대한 공자의 사당 속에 논어에서 드러나는 인간적인 모습은 없고 우상화되고 상품화된 왜곡된 공자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선진 제자의 하나인 유가는 기원전 136년 한무제(漢武帝)에 이르러 왕조지배의 이념적 근거를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관학으로 지정되었고, 그 이외의 모든 사상은 배척되었다. 이후 유교는 20세기 초 청조가 멸망할 때까지 2천 년간 역대 왕조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고, 문관정치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유교가 국교의 지위를 갖게되면서 유가사상의 시조인 공자 또한 신격화되고 성인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5·4 신문화운동 시기에는 전통을 부정하고 서양의 민주주의와 과학문물을 수용하려고 하는 지식인들에 의하여 공자와 유가사상은 근대에 들어서 중국이 낙후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으로 낙인이 찍혀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봉건시대의 노예도덕’이라고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1960년대 중반 이후에 나타난 문화대말살의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전통과 권위를 부정하는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정치적 의도로 이용되기도 했다.

▲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피하여 유가경전들을 숨겼다는 노벽. ⓒ양기혁
▲ 이 벽은 공자 옛집의 담벽이었으나, 진시황 분서갱유시에 공자 9대손인 공부(孔駙)가 벽 속에 서적들을 숨겼다. 한무제 때 노공왕이 공자 옛집을 헐었을 때‘논어’, ‘효경’등 옛 죽간을 발견했다. 명나라에 와서 유가경전이 보존된 것을 기념하여 비석을 세웠다. ⓒ양기혁

최근에 공자는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세계 각국에 중국문화의 수출 첨병으로 공자학당이 세워지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마오쩌둥 사상이 쇠퇴하고 시장경제체제가 지배하는 중국사회에서 유가사상과 같은 전통사상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것 같다. 21세기 들어 대학의 교정에 공자의 동상이 세워지고 올해초에는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도 거대한 공자상이 세워졌다.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는 이제 유가사상의 색깔이 더해져 새로운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진화하고 있다.

기념품 파는 곳에서 공자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부채를 15원 주고 하나 샀다. 그리고 오래된 비석과 기괴한 고목들을 지나서 출구로 나갔다. 여행 중에 기념품을 산 것이 없어서 부채를 하나 더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출구를 나와서 기념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곳에서 공묘 안 기념품 가게에서 팔던 것과 똑같이 생긴 부채를 보고 얼마인지를 물었다.

“알스우콰이(25원).”
공묘 안에서 샀던 가격보다 10원이나 높여 부르는 가격에 관심 없는 척 지나가는데 가게 아주머니는 내 뒤통수에 대고 한 걸음마다 가격을 내려 불렀다. 스우콰이(15원), 스콰이(10원). 몇 걸음 걸어가다 돌아와서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이거 스콰이(한 개 10원)?” 아주머니는 맞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부채를 하나 더 샀다.

똑같은 기념품들이 진열된 가게들을 지나 돌아가는데 조그만 만두가게가 보였다. 잠시 망설이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 식사도 하지 않은 채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가게 안은 탁자 서너 개가 전부인 좁은 공간인데 깔끔하고 정돈되어 보였다.

▲ 공묘 옆의 만두가게. ⓒ양기혁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을 보고 이름이 마음에 들어 주문했다. ‘수에차이(雪菜)’는 채소이름에눈 설(雪)자가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사전에는 ‘갓’이라고 나온다. 갓김치를 만드는 그 갓인 것 같다. 로우시는 실처럼 잘게 썬 고기를 말한다. 말하자면 고기를 다져서 갓과 함께 속을 만든 만두인 것이다. 한 통에 8개가 들어 있고 3.5원이다.

만두를 주문하고 나서 메뉴판을 찬찬히 살펴보는데 맨 밑에 쓰여 있는 글을 보고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만두는 말이 없다, 맛으로 말을 한다.’ 그동안 간편하다는 이유로 바오쯔를 몇 번 먹은 적이 있는데 사실 별로 맛을 못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맛이 아주 괜찮은 느낌이다. 어쩌면 분위기 탓도 있을 것이다. 역 근처의 사람들이 북적대거나 지저분한 식당에서 재빨리 먹고 식당을 나가야 했었는데 깔끔하게 정돈된 식당에서 여유 있게 먹으니 그 맛도 한결 좋아진 게 아닐까. 한 통을 다 먹고 종업원을 불렀다.

“웨이다오 수워화 하오츠, 하이요우 이롱.(맛있다고 말한다. 한 통 더 달라.)”

▲ 취푸에서 탄 자전거 인력거. ⓒ양기혁

이번에는 부추를 다지고 계란에 버무려서 속을 만든 만두 같다. 만두 두 통을 먹고 나니 배가 든든해졌다. 공묘 입구 매표소 옆 보관소에서 맡겨둔 배낭을 찾아 나오니 이제중국 여행을 다 끝낸 기분이다. 처음 출발지인 칭다오로 가서 배를 타는 일만 남았다. /양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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