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비리 치부’ 농민 피해 눈덩이...경찰, 직무유기 수사 예고-소송도 이미 시작

공무원이 농민을 상대로 10억원대 사기행각을 벌인 사건과 관련해 소속기관인 제주도 농업기술원이 이미 지난해 이 같은 사실을 일부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도 농업기술원 공무원의 사기 사건과 별도로 상사들의 직무유기 여부 등에 대해 추가 수사를 예고하면서 행정기관의 사건 은폐 의혹에 대한 파장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제주의소리>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결과 농업기술원이 지난해 12월 허모(40)씨의 비위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경찰 수사 이틀 전인 올해 3월3일에야 제주도에 비위사실을 통보했다.

허씨는 2012년 2월부터 2013년 2월말까지 1년간 농민 44명을 상대로 거짓 시설지원 보조사업 정보를 건네 자부담금 명목으로 16억5000만원을 가로챈 혐의(상습사기)를 받고 있다.

수법은 평소 알고 지내던 농민 등에게 접근해 “당신만 알고 있어라. 하우스 시설 보조금이 남았다. 지금 신청하면 된다”고 속여 자부담금을 받고 돌려주지 않는 방식이다.

허씨에게 속아 돈을 건넨 농민들은 실제 시설지원이 이뤄지지 않자 농업기술원에 관련 사항을 문의하기도 했다. 이를 이상하기 여긴 금융 관계자가 농업기술원을 직접 방문한 사실도 확인됐다.

시점은 지난해 12월. 금융 관계자는 농업기술원을 방문해 허씨의 상사를 만나 보조금 사업 진위 여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 내용은 실제 지원 사업이 있느냐 여부였다.

면담이 끝난 후 농업기술원 간부들은 당사자를 불러 사실관계를 확인했으나 허씨가 개인적 채무라고 주장하면서 이 사건은 그 상태로 묻히는 결과로 이어졌다.  

▲ 피의자가 농민들을 속이기 위해 조작한 공문서. 해당 사업소장의 명의까지 도용했다.
내부 감찰이 이뤄지지 않자 허씨는 사기 행각을 이어갔다. 2월 업무와 관련해 평소 알고 지내던 고모씨에게 하우스 시설 지원비를 보조해 주겠다고 속여 9000여만원을 가로챘다.

허씨는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 3월5일 전까지 범행을 계속했다. 1~2월 사이 허씨가 저지른 범행만 20여건으로 이 기간 농민들의 피해액만 10억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농업기술원이 지난해 말 허씨의 비위사실에 대해 정식 조사와 후속조치만 있었더라도 막을 수 있었던 금액이다.

피해 농민들의 민원이 이어지자 농업기술원은 3월3일 부랴부랴 동향보고 형식으로 허씨의 비위사실을 제주도 청렴감찰단에 알렸다.

농업기술원이 비위사실을 통보하기 직전 허씨가 사표를 제출하려 했던 사실도 추가로 확인됐다. 현재 허씨는 사직처리가 아닌 직위해제 상태에 있다.

감찰단은 4일부터 6일까지 허씨 행각에 대한 자체조사를 진행해 피해 농민과 범행 규모 등을 확인하고 7일자로 제주도감사위원회 조사과에 비위사실을 정식 통보했다.

그 사이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고 관련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자 피해를 봤다는 농민들이 봇물처럼 늘었다. 허씨는 긴급 체포돼 구속됐지만 농민들의 보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땅을 담보로 자부담금을 마련한 일부 농민들은 빚 독촉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허씨는 빼돌린 16억5000만원 중 11억원을 불법 도박으로 날렸다. 나머지 5억원은 행방이 묘연하다.

신분을 밝히기 꺼려한 농민 K씨는 “농업기술원이 허씨의 개인 비리 문제로 몰고가는 것 같다”며 “농업기술원은 이미 허씨의 비위사실을 알고 있었다.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밝혔다.

   
다른 농민은 “농업기술원은 농민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다. 일이 터지니까 이제야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여놓고 있다. 직원도 상관도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농업기술원 관계자는 이와 관련, “당시(지난해말) 허씨를 불러 얘기할 때 처음에는 부인했다. 이후 압박을 하자 개인 채무라고 토로했다. 우리는 그런 줄만 알았다”고 해명했다.

이어 “본인이 사적인 문제니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해서 넘긴 사안”이라며 “결과적으로 이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 현재 조사가 이뤄지고 있으니 우리도 처분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감사위원회는 제주도 청렴감찰단이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관련 정보를 수합하고 있다. 현재 경찰 조사가 이뤄져 정식 조사에는 착수하지 않은 상태다.

경찰은 허씨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하고 21일 오후 사건을 검찰로 넘겼다. 혐의는 상습사기, 공문서 위조, 위조공문서 행사, 업무상 횡령, 도박 등 국민체육법 위반 등 5가지다.

이와 별도로 경찰은 농업기술원 관계자들에 대한 조사도 검토중이다. 상사들이 사기와 공문서 위조 등을 알고 있음에도 묵인했다면 처벌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경찰 수사와 별도로 피해 농민 3명은 최근 우근민 제주도지사와 사기 피의자 허씨를 상대로 1억9000만원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피해 농민 상당수가 추가 소송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향후 제주도의 관리 책임을 두고 법정 분쟁이 불가피해졌다.<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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